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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로저 달트리 Roger Daltrey | |||
<colbgcolor=#ADD8E6><colcolor=#333> 본명 | 로저 해리 달트리 Roger Harry Daltrey | ||
출생 | 1944년 3월 1일 ([age(1944-03-01)]세) | ||
영국 잉글랜드 미들섹스 이스트 액튼 (現 잉글랜드 런던 이스트 액튼)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음악가 | ||
소속 | 더 후 (1964 – )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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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재클린 릭맨 (1964 – 1968) 헤더 달트리 (1971 – ) | ||
자녀 | 사이먼 달트리 로지 레아 달트리 윌로우 엠버 달트리 제이미 달트리 매티아스 달트리 | ||
신체 | 168cm | ||
재산 | 약 $90,000,000[1] | ||
종교 | 무종교(무신론) | ||
활동 기간 | 1959년 – 현재 | ||
사용 악기 | 보컬, 기타, 하모니카 | ||
장르 | 하드 록, 프로그레시브 록, 로큰롤, 파워 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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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록 보컬리스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프론트맨이다.
더 후의 창립자이자 초창기 리더, 리드 보컬리스트였다. 1960년대 하드 록을 이끌었던 음악가 중 한 명이며, 파워풀한 보컬과 폭발적인 무대 매너로 당시 큰 인기를 얻었던 보컬리스트이다. 하드 록 보컬의 시초라고 불릴 수 있을만큼 로저 달트리에게서 영향을 받은 하드 록, 헤비 메탈 보컬들이 매우 많다.
롤링 스톤이 선정한 “최고의 보컬리스트 100인”에서 61위에 들었고, 동일 잡지에서 독자들의 투표로 선정한 “최고의 록 가수”에서 6위를 차지했다.
2. 생애
2.1. 유년기
로저 달트리는 1944년 런던 서부 액튼의 해머스미스에서 3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2] 로저는 어린 시절 액튼 카운티 문법 학교에 들어갔는데, 이 학교의 동문이 훗날 더 후를 조직하게 되는 피트 타운젠드와 존 엔트위슬이다.
로저는 11살 때 일레븐 플러스 시험[3]에서 반 1등을 차지할만큼 공부를 잘했다. 로저의 부모님은 로저가 대학교에 들어가길 바랬지만, 로저는 록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록 아티스트를 꿈꾸게 되었다.
2.2. 디투어스 시절
록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로저는 스스로 체리색 스트라토캐스터 모조품을 만들었고, 1959년에 “디투어스”라는 포크 송 밴드를 결성하게 된다. 당시 그는 리드 보컬리스트로 활동하였고, 이후 에피폰 기타를 아버지가 사주셔서 리드 기타리스트가 된다. 하지만 학교에서 담배를 펴서 퇴학당하게 되고, 밴드를 이끌음과 동시에 판금 작업자로 일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낮에는 판금 작업자로 일하고 밤에는 밴드 활동을 하게 된다.1961년 디투어스는 존 엔트위슬과 함께 피트 타운젠드를 기타리스트로 영입하게 된다. 그리고 메인 보컬이 밴드를 나가게 되면서 보컬에 적성이 맞았던 로저가 메인 보컬을 맡게 된다.[4] 1964년 디투어스 멤버들은 밴드 이름을 바꿀 것을 논의하였고, 결과적으로 밴드는 더 후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이후의 행적은 문서 참조.
3. 음악적 재능
3.1. 보컬리스트로서
1978년 Baba O’Riley 라이브 |
보컬리스트로서 그는 동시대의 수많은 동료 보컬리스트들처럼 발성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음에도, 이안 길런과 함께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좋은 발성을 보유한 보컬들 중 하나였다. Won't Get Fooled Again같은 곡에서는 기본 발성이 탄탄해야 할 수 있는 스크리밍을 보여준다.
데이비드 커버데일, 액슬 로즈 등과 더불어 하드 록 보컬리스트 중에서는 드물게 성부가 테너가 아닌 바리톤이다.[5][6] 실제로 그의 평소 목소리는 상당히 낮은 편이며, 저음역이 매우 넓기에 저음역대를 잘 소화해낸다.[7] 그러나 바리톤임에도 불구하고 딥 퍼플 시절 고음역대를 버거워하던 데이비드 커버데일과는 달리 고음역도 매우 높게 올라가는데, 진성으로 3옥타브 초중반대를 뽑아내는(…) 괴물같은 보컬이다.[8] 또한 “카멜레온 같은 보컬”이라는 별칭답게 고음역에서도 얇은 미성과 거친 탁성을 자유자재로 쓸 줄 알았다. Live at Leeds에서 부른 Young Man Blues 같은 곡에서 로저 달트리의 어마어마한 음역대를 들을 수 있는데, 이 노래는 최저음이 0옥타브 솔, 최고음이 3옥타브 레인 어마어마한 음역대의 곡이다.
고음역에서의 특유의 파워풀한 보컬로 유명한데, 스크래치를 가미한 파워풀한 탁성의 음색이 특징이다. 다만 몇몇 곡에서는 스크래치를 넣지 않은 맑은 미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마이크를 마구 돌리면서 파워풀한 고음을 뽑아내는 모습은 로저 달트리를 상징하는 모습이다. 성량 또한 매우 좋아서 더 후의 라이브 영상을 보면 보컬이 밴드 소리를 뚫고 나오는 것을 들을 수 있다.
2015년 My Generation 라이브. 그의 굵은 저음을 들을 수 있다. |
기본 발성이 탄탄하고 목 관리를 잘했기 때문에[9] 60대인 라이브 8 시절까지도 변치 않는 보컬을 보여 주었다. 그러다가 70대가 되면서 보컬이 굵어졌으며, 그동안의 무리한 공연으로 인해 중간에 성대 결절이 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성대 결절 후 2010년에 성대 수술을 통해 음역대가 상당히 회복되었기에, 팔순을 바라보는 현재까지 전성기 시절에 불렀던 여러 곡들을 원키로(!) 소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10] 2022년에는 스크래치를 쓰던 과거와 달리 맑은 미성으로 곡을 전개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고음 자체도 오히려 2015년보다 더 잘 올라가는 기현상을 보이고 있다.
그의 진성 음역대는 -1옥타브 시(B1) ~ 3옥타브 솔(G5)이다.
3.2. 프론트맨으로서
록 밴드 프론트맨의 이미지를 구축한 아티스트이다. 흔히 록 음악의 보컬리스트라고 하면 마이크를 위로 던지거나, 3옥타브 이상의 샤우팅을 하거나, 헤드뱅잉 하는 등의 거친 퍼포먼스를 하는 프론트맨을 떠올린다. 로저 달트리는 1960-1970년대 당시 믹 재거, 로버트 플랜트 등과 함께 이러한 퍼포먼스를 거의 최초로 시작하여 록 음악의 전반적인 퍼포먼스와 이미지를 만든 아티스트이다. 현재 대중적으로 자리잡은 난폭한 퍼포먼스를 하는 이미지의 록 뮤지션의 모습은 더 후, 롤링 스톤스, 레드 제플린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마이크 줄을 잡고 마이크를 허공에서 빙빙 돌리는 이른바 “마이크 돌리기”라는 특유의 퍼포먼스가 매우 유명하다.[11] 마이크를 돌리다가 마이크 줄에 걸려서 넘어진 적도 있다.
보컬과 하모니카뿐만 아니라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 Who Are You 같은 곡들에서는 직접 기타도 연주했는데, 원래 디투어스 시절에는 리드 기타리스트였다보니 기타 실력도 상당한 수준이다. 더 후 시절에는 피트 타운젠드 단독 기타로 밴드 구성이 자리잡으며 직접 기타를 잡는 일은 별로 없었으나, 몇몇 어쿠스틱 곡들은 직접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4. 여담
* 풍성한 금발 머리 때문에 1970년대의 사진을 보면 은근히 로버트 플랜트를 닮았었다. 다만 이 헤어스타일은 1970년대부터 했으며[12], 1960년대에는 여타 록밴드들처럼 바가지 머리를 하고 다녔다.
- 에미넴의 팬이라고 한다. 여러 인터뷰에서 힙합 관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에미넴을 샤라웃한 바 있다.
- 본인이 가장 존경하고 좋아하는 록스타로 로버트 플랜트를 꼽았다. 레드 제플린 시절의 수많은 퍼포먼스들부터, 솔로 음악가 시기 다양한 장르를 수용하고 시도했던 부분이 인상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 더 후 멤버들 중 유일하게 마약을 하지 않은 멤버이다. 마약을 하면 보컬적인 부분에서 안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 80세에 가까워가는 나이이지만 꾸준한 관리를 하는지 젊은 시절의 근육질 몸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롤링 스톤과의 인터뷰에서는 실제로는 관리는 많이 하지 않고 그냥 자신이 원래 타고난 것이라고 한다(…).
- 정치적으로는 예전에는 강력한 노동당의 지지자였으나 토니 블레어 집권 이후 노동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최근에는 미투 운동을 격렬하게 비난하고 제러미 코빈을 공산주의자라고 부르는 등 거의 우파 성향으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젊어서 우파였다가 최근에 좌파 성향이 된 브라이언 메이와는 정 반대인 셈.[14] 또한 브렉시트를 지지했는데, 이 때문에 브렉시트를 반대하던 피트 타운젠드와 정치적 충돌이 일어나 싸웠다고 한다.
* 1992년 웸블리에서 열린 프레디 머큐리 추모공연 무대에 올라 퀸의 13집 앨범 The Miracle에 수록된 I Want It All을 불렀다.[15] 로저 특유의 파워풀한 보컬과 마이크돌리기를 확인할 수 있다.[16]
- 자세히 보면 마이크선이 있는 자리가 테이프로 둘둘 감겨 있다. 마이크를 돌리는 퍼포먼스를 안정적으로 하기 위함인 듯.
4.1. 외모
1974년 작 ‘토미’ 中 |
1944년생으로 현재 80대가 되었지만, 엄청난 동안이다. 사실 동안 속성은 40대 시절부터 보유하고 있었는데, 라이브 에이드 공연 영상을 보면 더 후 해체 시절 이전과 별 다를 게 없으며, 50대에 노엘 갤러거와 합동 공연을 했을 당시 30대였던 노엘과 동년배로 보였을 정도(…)이다. 그리고 이러한 동안 속성은 현재까지 이어져 한 살 어린 피트 타운젠드보다 훨씬 어려 보인다.
[1] # 한화 약 1,200억원.[2] 이때 로저의 아버지는 2차 세계 대전에 참전 중이었다.[3] 영국, 특히 잉글랜드 지역에서 초등학교 마지막 학년에 보는 시험이다.[4] 이때 영입 일화가 약간 골때리는데, 자세한 것은 존 엔트위슬 문서 참조.[5] 하드 록 보컬리스트 중에선 프레디 머큐리 또한 성부가 바리톤으로 추측되나, 확실한 것은 아니기에 기재하지 않았다.[6] 사실 바리톤으로 보기도 좀 애매한 게, 로저 달트리는 바리톤이라고 하기엔 음색이 얇은 편이기 때문이다. 최고음이 높은 하이 바리톤이거나 혹은 로우 테너일 가능성도 있다. 애초에 성종이란 게 딱 칼로 무 베듯 나눠지는 게 아니기에, 애매한 성종의 사람들은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바리톤일 수도 테너일 수도 있다.[7] A Quick One, While He's Away의 화음 파트에서 고음 부분은 피트 타운젠드가 맡았으며, Pinball Wizard에서도 피트 타운젠드의 파트가 더 높다.[8] 다만 고음의 구사 빈도가 그렇게 높지는 않은 걸로 보아 무턱대고 고음을 난사할 수 있는 로버트 플랜트보다는 고음이 안되는 듯. 애초에 플랜트는 테너 중에서도 하이 테너로, 바리톤인 로저 달트리보다 훨씬 성종이 높으니 당연한 얘기지만.[9] 후술하겠지만 보컬에 영향이 갈까봐 더 후 멤버중 유일하게 마약을 멀리했다.[10] 해외에서는 브루스 스프링스틴과 비슷해졌다는(…) 말이 나오기도 한다.[11] 나이가 들면서 마이크 돌리기를 예전보다는 적게 한다.[12] 정확히는 1968년 중반 때부터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13] 존 엔트위슬 제외.[14] 참고로 피트 타운젠드는 공산당의 지지자였기 때문에 정치 성향이 정 반대인 셈이 되었다. 물론 더 후가 정치적인 성향을 자주 드러내는 밴드이긴 하지만 신곡 발표보다는 투어 위주로 돌아가고 있으니 정치적인 이유가 재결합을 가로막고 있는 더 스미스와는 달리 별 문제가 없는 모양이다.[15] 백업 기타로 블랙 사바스의 토니 아이오미도 참여[16] 프레디가 라이브 공연에서 I Want It All을 부른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