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원
건함 계획 : 마루 4 계획(マル4計画)기공 : 1939년 6월 7일
진수 : 1940년 9월 17일
취역 : 1942년 2월 28일
침몰 : 1942년 10월 13일[1]
제적 : 1944년 4월 15일
승무원 : 94명
기준 배수량 : 2,198톤 (수상 2,584톤 / 수중 3,654톤)
전장 : 108.9m(357 ft) / 함폭 : 9.3m(31 ft) / 흘수선 : 5.14m(16.9 ft)
기관 : 함본식 2호 10형 디젤(艦本式2号10型ディーゼル) 2기 (2축 추진)
출력 : 수상 12,400마력(9,200 kW) / 수중 2,000마력(1,500 kW)
속력 : 수상 23.5 kn(44 km/h) / 수중 8.0 kn(15 km/h)
항속거리 : 수상 16 kn(30 km/h; 18 mph)시 14,000해리(26,000 km) / 수중 3 kn시 96해리
안전잠항심도 : 100 m(330 ft)
연료 : 중유 774톤
주무장 : 533 mm(21 in) 어뢰발사관 6문 (95식 어뢰 17발)
부무장 : 40구경 14cm 단장포 1문 / 25mm 기총 2정
함재기 : 영식 소형수상정찰기(零式小型水上偵察機) 1기
발함장비 : 쿠레식 1호 4형 사출기(呉式1号4型射出機)
2. 건조
구일본 해군의 순잠 을형 잠수함인 이-15형 잠수함(伊十五型潜水艦) 중에서 11번째 함선으로, 1차 독일 순양 항해를 성공한 잠수함으로 유명하다. 처음에는 이호 제35잠수함(伊号第三十五潜水艦)이라고 명명되었지만 1941년 11월 1일에 이-30으로 함명이 바뀌었다. 1939년에 제4차 해군 군비 보충 계획에 의거해 그 해 6월 7일부터 쿠레 해군공창(呉海軍工廠)에서 공사에 들어가 1940년 9월 17일에 진수되었고, 1942년 2월 28일에 준공되었다. 완성과 동시에 쿠레 진수부(呉鎮守府籍) 제14잠수대(第14潜水隊)에 편입되었다.3. 초기 운용
1942년 3월 10일, 14잠수대는 제8잠수전대(第8潜水戦隊)에 편입되었다. 3월 27일, 독일 해군은 일본 연합함대에 인도양에서 연합군의 수송선단 공격을 요청했고, 같은 해 4월 8일에 연합함대는 이를 승낙했다. 4월 11일에 I-30은 쿠레 항구를 벗어나 출항했다. 16일에 I-10[2]과 해상에서 접선해 제1잠수대와 함께 갑 선발대(甲先遣隊)를 구성한 두 잠수함은 항해를 계속에 20일에 페낭 섬(Penang)에 도착해서 보급을 받은 후 22일에 홀로 페낭을 떠났다. 5월 7일 새벽에 함재기를 띄워 아덴만을 항공 정찰한 I-30은 8일 밤에는 또다시 함재기로 아프리카 동북부의 지부티(Djibouti) 방면을 정찰하던 도중 발각되어 대공 사격을 받았으나 기체와 함선 모두 무사했다. 19일에는 잔지바르와 다르에스살람(Dar es Salaam) 상공을 정찰하고 그곳에 정박 중인 연합군 수송선 1척과 항해 중인 4000톤급 수송선의 위치와 항적을 보고했다. 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영식 소형수상정찰기는 착수할 때 충격으로 기체 일부가 부서졌지만 수리할 틈이 없어서 그대로 격납고에 접어 넣었다.20일에 케냐 남동부의 몸바사(Mombasa) 해안가에 당도한 I-30은 잠망경으로 현지를 정찰하고 24일 밤에는 마다가스카르 섬 최북단의 디에고 수아레즈(Diego-Suárez : 현재는 안치라나나)를 잠망경으로 정찰했다.
6월 17일, I-30은 해군성이 오사카 상선(大阪商船)에서 징발한 1만톤급 특설순양함 고코쿠마루(報国丸)와 아이코쿠마루(愛国丸)와 합류해서 연료와 식량 등을 보급받았다. 이 잠수함에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지게 된다.
I-30은 제1차 독일 방문 잠수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함내 격납고와 선창에 영식 수상정찰기 1대와 91식 항공어뢰의 설계도, 89식 공기어뢰 14발, 그리고 천연수지인 셸락(shellac) 660 kg과 운모 840 ㎏을 싣고 이역만리 떨어진 동맹국인 제3제국으로 향했다.
4. 아프리카를 돌아 지구 반대편으로
황족이자 제6함대를 지휘하는 해군 제독이었던 코마츠 테루히사(小松輝久 : 1888~1970)가 총괄하기로 된 이 작전의 암호명은 사쿠라(サクラ)로, I-30은 수 만킬로나 되는 긴 항해를 하는 동안 연합군 초계기나 구축함을 피해 급속 잠항하거나 기관 고장이나 침수로 인해 표류하는 일도 있었다. 6월 30일에는 남아공 공군의 정찰기에 발견되어 공격을 받기도 했지만 피해를 입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갔다. 같은 날에 희망봉 앞바다를 돌아 대서양에 들어간 I-30은 1개월이 넘게 지난 8월 2일에 드디어 비스케이 만에 도착해서 상공 엄호를 위해 날아온 독일 공군의 Ju 88A 폭격기 8대와 합류했다. 이들의 유도를 받아 독일 제공권 안에 들어온 I-30은 독일 해군의 소해함들에게 수로를 안내받으며 6일에는 프랑스 연안에 있는 로리앙 항구(당시에는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에 입항하여 싣고온 화물을 부렸다.함장 엔도 시노부(遠藤忍 : 1906?~1944. 2. 15) 중좌 이하 I-30의 승무원들은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엔도 중좌는 히틀러에게도 초대되어 개인적인 면담을 했고, 그 자리에서 곡엽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를 포함한 승무원들은 길고 위험천만한 항해에 매우 지쳐 있어 한동안 파리에 머물며 휴식을 취했다.
일본 해군의 잠수함은 그 후 점검과 정비를 받을 때 U보트와 똑같은 회색 위장 페인트로 칠해졌다. 또한 원래 달려 있던 96식 연장대공기총(96式連装対空機銃)을 철거하고 그 대신에 독일 해군 잠수함대 측이 제공한 METOX 전파탐지기와 욀리콘 20mm 4연장 기관포가 장비되었다. 또한 정찰 비행 도중 부서졌던 함재기인 요코스카 E14Y도 독일 기술진들에 의해 말끔히 수리되었다.
5. 독일로부터 받은 화물 목록
보름 후인 8월 22일에 I-30은 일본인 엔지니어 1명과 최신의 사격통제 레이더인 뷔르츠부르크(Würzburg)와 그 설계도, G7형 어뢰 8발(공압식 5발, 전지식 3발), 어뢰 유도장치 5대, 에니그마 암호기 50대, 수중청음기 기만용 데코이인 볼트 240개, 로켓탄, 글라이더 폭탄, 대전차 포탄, 대공 사격 지휘장치, 미넨게쇼스 20mm 기관포탄 200발과 공업용 다이아몬드, 잠수방위반(潜水方位盤), 영국의 군용 암호해독기를 싣고 로리앙 항구에서 독일인들의 전송을 받으며 고국으로 먼 여정을 떠났다.6. 아군의 함정에 빠지다
그로부터 7주가 흐른 1942년 10월 8일에 페낭에 도착한 I-30은 이곳에서 호시나 젠시로 제독의 요청을 받고 해군성 산하 병기국에 에니그마 암호기 10대를 내려 싱가포르 수송 선편으로 옮겨 실었고, 11일에 페낭을 항해 다시 출항했다. 13일 오전 09:30에 싱가포르에 도착한 이 잠수함은 에니그마 10대를 다시 되찾아 실은 다음 16:09에 마지막 기착지인 쿠레 항구를 향해 떠났다. 그러나 얼마 안가 항구에 숨겨진 기뢰가 선체 측면에 접촉해 대폭발을 일으켰고, 이 충격으로 수병 13명이 사망하고 함장 엔도 중좌 이하 탑승자 96명은 아군 함대에게 구조되었다.아군이 뿌려둔 기뢰가 일으킨 이 폭침의 원인은 기뢰를 제거한 안전한 항로로 새롭게 설정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나기 작전 도중에 변경된 퍼플 암호체계에 관해 미처 전달받지 못한 I-30이 아군의 기뢰원을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해군은 급히 잠수반을 편성해 귀중한 탑재 화물을 건져냈다. 이때 미넨게쇼스 탄의 대부분과 더불어 어뢰 유도장치, 뷔르츠부르크 레이다와 설계도 같은 물자들을 인양해냈으나, 이미 기뢰 폭발 당시에 많은 짐이 파괴되어 버린데다 가장 중요한 뷔르츠부르크의 원본은 망가져 있었다. 사쿠라 작전의 결과에 매우 실망했던 일본 해군 수뇌부는 인사국을 통해 엔도 함장에게 육상 근무를 명령했지만 본인이 절실히 잠수함 근무를 희망하는 청원을 여러 번 올려 새롭게 I-43(伊-43)의 함장으로 취임했다가 1944년에 사이판에서 미군 잠수함에게 격침되어 전사했다.
I-30은 침몰 2년 뒤인 1944년 4월 15일에 함적 명부에서 제적되었다. 패전 이후 19년이 지난 1959년 8월에서 1960년 2월 기간 동안 키타보시 선박공업(北星船舶工業)에 의해 인양되었고, 이때 남겨진 화물도 함께 인양되었지만 이제는 전략 물자가 아니라 역사적인 유물이 되어 있었다. 선체는 스크랩 처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