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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2-03 16:49:02

95개조 반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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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종교 개혁 주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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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내용
<colbgcolor=#F8F0C3,#191919> 95개조 반박문 마르틴 루터의 면벌부 판매 비판
사코 디 로마 교황권 위기의 상징
슈말칼덴 전쟁 가톨릭루터파 대립
기독교 강요 장 칼뱅의 이중예정설과 직업소명설 등장
수장령 헨리 8세와 잉글랜드의 교황청으로부터 독립
예수회 이냐시오 데 로욜라의 예수회 창립
트리엔트 공의회 가톨릭 교리 재확인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신성 로마 제국루터파 인정
위그노 전쟁 프랑스 가톨릭과 칼뱅파 간의 종교 전쟁
통일령 엘리자베스 1세잉글랜드 국교회 선포
낭트 칙령 앙리 4세의 칼뱅파 인정
30년 전쟁 친합스부르크 세력과 반합스부르크 세력의 충돌
베스트팔렌 조약 개인의 종교 자유 인정
← 중세 교황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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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png

1. 개요2. 특징3. 루터가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붙였다?4. 내용5. 참고 자료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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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5개조 반박문은 1517년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루터가 작성한 문서로, 로마 가톨릭교회의 면벌부 판매를 강하게 비판한 내용이다. 그는 신앙과 회개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촉구하며, 교회의 부패를 지적하였다.

이 문서는 루터가 비텐베르크 성 교회의 문에 게시했다고 전해지며[1], 신학적 토론을 촉진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면벌부 판매를 둘러싼 논쟁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95개조 반박문은 빠르게 인쇄되어[2]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많은 학자와 성직자들이 이에 공감하거나 반대하며 논쟁에 참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루터는 교황청과의 갈등이 깊어졌으며, 결국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하게 되었다.

95개조 반박문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신앙의 본질과 교회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논의를 촉진하였다. 이후 개신교의 형성과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기독교 역사에서 중요한 문서로 평가받고 있다.

2. 특징

마르틴 루터가톨릭 신학적 오류에 따른 면죄부 남용과 같은 행위에 분개하여 학문적 토론과 지적 차원에서[3] 1517년 10월 31일 작성된 문서다.[4][5]

95개조 반박문 항목을 읽어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가톨릭 세계관과 질서를 존중하는 뉘앙스를 버리지 않았음에도 교회의 사면 권한을 부정하고 있기 때문에 처음부터 문제의 소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가톨릭 교회는 예수가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하사한다고 선언하는 장면을 근거로 `교회의 사면권'을 주장하는데, 특히 가톨릭 교회의 권력 체계가 공고하던 전근대 시기에는 이 교리가 아주 확고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루터가 제기한 다른 문제를 받아들이더라도 교황청에서 저 대목을 받아주는 것은 아예 불가능한 것이었다.

95개조 반박문 내용 자체는 이전 루터가 썼던 《스콜라 철학에 대한 반박》보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 수위가 낮다. 그러나 이전의 비판은 공론화 되지 않았지만 95개조 반박문은 2주 만에 독일어로 번역되어 신성 로마 제국 전역에 퍼지고 1달여 만에 유럽 전체 지역에 퍼지면서 종교 개혁의 신호탄이 되었다.

내용 자체는 전반적으로 루터 신학의 가장 중요한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바탕으로 서술했다. 그러나 개신교 신자라도 어지간한 신학적인 배경이 없으면 주석과 설명을 참조해도 사실 이해하기 매우 어렵다. 내용의 난이도가 신학생급 정도는 되어야 근접할 수준. 이에 대해 요한 테첼은 마르틴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에 반발해 일명 '106개조 반박문' 으로 루터의 주장에 대해 반론했으나 그렇게 큰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3. 루터가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붙였다?

흔히 마르틴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성문에 붙였다는 주장이 대한민국[6][7][8] 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 일본[9] 등과 같은 국가들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에 반박문을 교회 문에 직접 붙였는지는 역사적으로 논란이 있다. 이 사건을 기록한 1차 사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이야기는 후대에 형성된 전설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루터가 반박문을 발표한 방식은 다소 달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작성한 것은 확실하지만, 그는 이를 곧바로 대중에게 공개하기보다는 학문적인 토론을 위해 사용했다. 그는 반박문을 라틴어로 작성하여 당시 학계와 성직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했으며,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내는 편지와 함께 이를 여러 명의 신학자들에게 발송했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할 때, 95개조 반박문은 처음부터 대중을 대상으로 한 문서가 아니라 신학적 논쟁을 촉진하려는 목적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이 게시되었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기록에서 등장한다. 루터의 동료였던 필리프 멜란히톤이 1546년 작성한 전기에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언급했으며, 이후 루터의 행적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널리 퍼졌다. 그러나 멜란히톤은 루터가 반박문을 발표했을 당시 비텐베르크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의 기록이 실제 사실을 반영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5개조 반박문이 교회 문에 게시되었다는 이야기는 종교 개혁의 상징적인 장면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중세 후기 유럽에서 중요한 공적 발표문을 교회 문에 게시하는 것이 흔한 관행이었다는 점과 맞물려 신빙성을 부여받았다.

결론적으로, 95개조 반박문이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붙었는지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없으며, 이는 후대에 형성된 전통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사건이 종교 개혁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은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중요한 점은 루터의 반박문이 학문적 논쟁을 촉진하고 면죄부 판매에 대한 비판을 널리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95개조 반박문의 실제 발표 방식이 어떠했든, 그것이 유럽 사회와 기독교 역사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4. 내용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이를 해명하려는 열정을 근거로 비텐베르크의 신부이며, 인문학부 및 신학부 교수 겸 비텐베르크 대학 정교수인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 논쟁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인은 구두로 토론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직접 찾아오지 않더라도 서신을 통해서 토론에 참여해 주기를 당부한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10]

5. 참고 자료

6. 외부 링크


[1] 실제로 비텐베르크 교회의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2] 1517년 당시의 유럽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인쇄기로 지식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진 시기였다.[3] "95개조 반박문은 좀 더 정확히는 '95줄로 요약한 논제'라고 할 수 있는데, "지금부터 이 주제에 대해 토론해보자!"라는 일종의 제안서와 같은 것이다." 출처.[4] 훗날 개신교에서는 이 날짜를 종교개혁기념일로 삼게 된다.[5] 아이러니하게도 다음날인 11월 1일은 가톨릭에선 모든성인대축일이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모든성인대축일 전날 밤이 그 유명한 할로윈이다.[6] [이번 주 세계 교회사] 루터는 왜 95개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성(城)교회에 붙였을까(국민일보)[7] 중세 철옹성 무너뜨린 '멧돼지'… 서구 근대의 문을 열다(조선일보)[8] 95개조 의견서(두산백과)[9] 일본어 위키백과 '95か条の論題' 문서의 "本当に「掲示」されたのか?(정말 '게시'되었는가?)" 문단 참조.[10] 숭실대학교 인문학부 사학과 교수 박은구 번역(스티브 오즈멩의 종교개혁에서 발췌함), 나머지 본문은 번역출처가 확인되면 써주기 바람[11] 앞서 "회개하라"는 성경 문구는 불가타에서는 고해하라 였는데 이를 두고 가톨릭 교회에서는 고해 성사란 용어의 근거로 쓰였던 구절이었다. 그러나 1516년 에라스무스판 헬라어 원본 성경에서는 외적인 고해가 아닌 내적인 속죄에 해당하는 회개 또는 참회가 원문에 부합한다는 견해가 나왔다. 종교개혁 시기 당연히 다른 구절의 오역이던 혼인'성사'와 더불어 루터가 성사임을 부인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12] 후손에게 파는 죽은자에 대한 면벌부, 과거행위에 대한 통째 면벌부는 15세기 각각 갈리스토 3세와 식스토 4시절부터 새롭게 등장한 것으로 성경은 물론 교회 전통과도 거리가 멀다.[13] 중세시대 종부성사(병자성사)시에 사제들이 지옥이나 연옥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신도들에게 마귀를 쫓아준다며 장엄구마 의식을 하고 신도의 가족들에게 돈을 받는 풍속이 있었다.[14] 현대어로 잡초. 성서에서 가라지와 알곡의 비유를 인용함[15] 독일지역에서 면죄부를 팔던 도미니코회 수사 요한 테첼의 명언(?).[16] 중보기도[17] 교회에서 가르친 바에 의하면 성 세베리누스, 성 파스칼리스는 연옥에서 바로 구원 받을 수 있었으나, 스스로 연옥에서 죄과를 다 하기를 청원했다. 이런 내용은 일반인 신도 중에서도 알고 있는 이가 많은데, 교황청이 이런 걸 장려하는게 옳지, 돈으로 대충 때우려는 걸 조장한다는 걸 비판한 것이다.[18] 말 자체는 이 세상의 보물이 아닌 하늘나라의 보물이란 뜻인데, 교회에서 인정한 선행공덕을 뜻한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선행은 축적이 되며, 그 사용권한은 교회가 갖는다는 이론을 배경으로 면벌부를 팔았다. 성인의 공덕이 재화처럼 쌓여서 교회에 저장되고 이를 베푼다고… 구체적으로 라테라노 성당 5만 7천 점의 순교자의 유골은 한 점당 6천 년씩 면벌효과가 있다고 선포했다.[19] 가톨릭 교회에선 성경을 근거로 사도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받았고, 이세상의 메이고 풀 권한까지 받았다고 한다. 후임 로마 주교(교황)가 사도전승을 통해 권한을 이어받는다는다고 보았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는 천국의 열쇠는 물론 메이고 푸는 권한은 베드로 개인 1인이 아니라, 믿는 자 모든 신도에게 준 것으로 해석한다.[20] 도미니코회원 요한네스 테첼 수사를 겨냥한 것으로, 루터는 테첼이 이런 광고를 하였다고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반전이 있는데, 테첼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A like hostility appears in the rumor mentioned skeptically by Luther, which quoted Tetzel as having said at Halle that even if, per impossibile, a man had violated the Mother of God the indulgence would wipe away his sin. Tetzel obtained certificates from civil and ecclesiastical authorities at Halle that they had never heard the story. He was an enthusiastic salesman, but not quite conscienceless."[비슷한 적개심이 루터가 비관적으로 언급한 루머에 의해 나타났다. 이 루머의 인용에 의하면, 테첼은 이렇게 말했다: '설령 ㅡ내(루터)가 보기엔 불가능한데ㅡ한 남자가 하나님의 어머니를 범했더라도 대사(면벌부)는 그의 죄를 씻어낸다'. 그러나 테첼은 Halle시의 시민적 및 교회적 권위로부터, 그들은 그런 이야기를 결코 들은 적 없다는 입증을 얻어내었다. 테첼은 열정적인 세일즈맨이었으나 양심을 내다버리진 않았다.] - Will Durant. The Reformation. The Story of Civilization. Vol. 6. Simon and Schuster.
심지어 루터교에서도 루터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본다. Concordia Seminary(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의 루터교 신학교)에서 운영하는 프로테스탄트 개혁 500주년 기념 홈페이지인 Reformation 500에서는 인물 소개란의 Johannes Tetzel 탭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Luther also targeted an alleged view of Tetzel that such onerous sins as violating the Virgin Mary could be absolved by an indulgence, though this was unsubstantiated."#
[21] 면죄부 판매원 요하네스 테첼의 마케팅(?) 발언으로 이건 교황청에서 판단하기에도 빼도박도 못하게 신성모독성 발언이라 결국 테첼이 처벌 받는다. 1518년 밀티츠 추기경에 의해 라이프치히에 있는 도미니코회 수도원으로 감금된다.[22] 중세시대엔 가톨릭 교회에서 종부성사시 헌금을 내지 않으면 교회에서 관리하는 묘지에 묻히지 못하게 압력을 넣었고 죽은 이의 재산의 1/3정도를 세금으르 걷었으며, 특히나 환자가 죽음의 문턱에서 괴로워할 때 악마에게 끌려가 지옥에 빠지지 않게 한다며 가족에게 돈을 요구하거나, 죽고 나서 약 50일간의 죽은 이를 위한 미사를 요구하며 거액을 탕진시켰기 때문에 지역을 가리지 않고 큰 비판 대상이었다. "가난한 이는 죽을 수도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23] 십자군 전쟁시기 성지 순례자나 참전자는 사실상 사지로 가는 거나 다름없는지라 특별히 발행했던 것인데 수백 년 후 사문화된 것을 이제 금전 목적으로 다시 팔았다.[24] 원문에서는 로마 시대 삼두정치의 일원으로 대부호의 대명사였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를 비유로 든다.[25] (1924~2012) 한국루터교회 목사, 신학박사(조직신학), 루터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