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595959><colcolor=#fff>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十二代目 [ruby(片岡, ruby=かたおか)] [ruby(仁左衛門, ruby=にざえもん)] | Nizaemon Kataoka XII | |
본명 | [ruby(片岡, ruby=かたおか)] [ruby(東吉, ruby=とうきち)] (카타오카 토키치, Tōkichi Kataoka) |
예명 | 초대 카타오카 토키치 2대 카타오카 츠치노스케 4대 카타오카 가토우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1936년 습명) |
출생 | 1882년 9월 9일 |
도쿄부 아사쿠사구 이마도 | |
사망 | 1946년 3월 15일 (향년 63세) |
도쿄도 시부야구 센다가야 자택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70cm |
가족 | 외조부 8대 카타오카 니자에몬(1810년-1863년 사망)[1] |
양아버지 10대 카타오카 니자에몬(1851년-1895년 사망)[2] | |
친어머니 8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장녀 | |
배우자 코마치 토시코(1940년 결혼, 1921년-1946년 사망)[3] 정부 무츠(1941년 사망)[4] | |
장남 14대 카타오카 니자에몬(1910년-1993년 사망)[A][6] 차남 2대 이치무라 요시고로(1918년-2010년 사망)[A][8] 3남 6대 카타오카 로엔(1926년-2011년 사망)[A][10] 장녀 카타오카 테루에(1942-)[11] 4남 카타오카 히데요리(1944년-1946년 사망)[12] | |
작은아버지 11대 카타오카 니자에몬(1858년-1934년 사망)[13] | |
당질 15대 카타오카 니자에몬(1944년-) | |
야고[14] | 마츠시마야 (松嶋屋) |
직업 | 가부키 배우 |
문장 |
1. 개요
일본의 가부키 배우, 인간 국보의 인물이자 카타오카 니자에몬 일가 살해 사건의 피해자.2. 생애
1882년, 당시 도쿄부에서 출생하였다. 출생명은 카타오카 토키치. 아버지가 데릴사위로서 가문에 들어왔기에 카타오카의 성을 이어받았다. 카타오카 가문임에도 몇 안 되는 도쿄 태생의 인물인데 그는 직계가 아닌 8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장녀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8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외손에 해당되는 그는 세 살 때부터 가부키를 배우고 무대에 섰으며 연기에 재미를 붙였지만 그렇게 큰 역할이 주어지지는 않았다.그렇게 형식뿐인 여러 습명을 거치고 1901년, 후계가 없던 큰아버지 10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양자로 입적되며 4대 카타오카 가토우를 습명받는다. 가토우 습명 이후로 여러 무대에서 활약하며 고전 가부키를 부활 시키는 등, 파격적인 시도를 하고 이를 성공시켰다.
이 당시, 무츠라는 정부를 들였는데, 동거인에 가까웠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슬하에 3남을 두었다. 12대 니자에몬은 무츠와 결혼하려 했지만 그녀의 배경을 천하다고 여기는 이가 많아 끝내 입적하지 못하고 무츠는 동거인으로 남게 되었다.
1895년, 양아버지인 10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이 사망한 뒤, 그의 뒤를 이어 작은아버지가 11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을 습명받았지만 1934년에 사망한다.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습명 기념 촬영한 사진 |
1940년, 쇼치쿠 관계자의 소개로 쇼와시대 유명 여배우 코마츠 토시코와 선을 보고 결혼하였다. 그녀와의 사이에서는 1남 1녀를 두었고 여러 극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며 타치야쿠, 온나가타의 정점을 찍고 세간에서 단연코 최고의 배우라는 평을 들으며 승승장구하였다. 이후 중요 무형문화재에 등재된 것도 이 시기였다.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식량난을 겪었지만 처음 몇 달뿐이었지, 이후로는 간사이에 있는 본가에서 쌀을 보내주어 가문의 사람들이 간신히 먹고 살았다고 한다. 시대가 어렵지만 그래도 운명을 마다할 수는 없다며 가부키 공연을 계속하였다.
3. 사망
자세한 내용은 카타오카 니자에몬 일가 살해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공연을 위해 분장하는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사진 속 날짜로부터 10개월 뒤, 살해당했다 |
이 때문에 매스컴에서는 한동안 살해당한 니자에몬이라 불리며 선대 카타오카 니자에몬들과 구분을 지었다.[15]
패전의 잔상으로 가부키계가 침체되어가는 시대상에 가부키계의 큰 별이 살해당한 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이었는데 이 때문에 도쿄 가부키좌에서는 한동안 가부키극이 중단되기도 하고 배우들이 집에서만 지내며 밖을 나가는 것을 꺼리기도 했다.
사건 이후,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명적은 5년간 공석이 되었다가 1951년, 12대 니자에몬의 사촌형제에 해당하는 자가 13대로서 발탁되어 그 계보를 간신히 이었고 이 13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3남이 당대 계승자이자 가문의 현 당주인 15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이다.
4. 여담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타치야쿠 |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온나가타 |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일평생 온나가타를 연기했던 장남 14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에게 생전 '온나가타도 좋지만 조금은 다른 연기도 배울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라는 말을 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의 사망 이후부터 흔히 말하는 가부키계의 두 번째 암흑기가 찾아왔지만 당시 주둔해 있던 GHQ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최측근인 바워즈 소령이 일본의 전통극과 가부키를 흥미롭게 여기고 좋아하여 자주 관람하였기에 완전한 침체는 면할 수 있었다. 이때 바워즈 소령이 관람한 극이 바로 코오라이야의 2대 마츠모토 하쿠오의 습명 피로연 공연이었다.
[1] 본명은 불명. 나리타야 7대 이치카와 단쥬로의 방자로 가부키계에 입문하였으며 후에 카타오카 가문으로 입적 후 습명받았다. 타치야쿠, 온나가타 양쪽 연기를 모두 익힌 배우였다. 아내는 마찬가지로 가부키 가문인 하리마야 초대 나카무라 카로쿠의 삼녀로 2남 1녀를 얻었으며 후에 10대, 11대 니자에몬이 되는 형제이다.[2] 본명은 카타오카 츠치노스케. 카타오카 니자에몬 습명 당시 피로 공연에서 잦은 동작, 대사 실수와 피로연을 찾은 다른 일문의 배우들과의 마찰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친동생의 습명 피로연에도 참석하지 않고 44세의 나이로 급사한다. 12대 니자에몬에게는 외숙부에 해당하지만 후계가 없던 그가 12대 니자에몬을 양자로 들였다.[3] 코마츠 토시코는 여배우 활동명으로, 본명은 카타오카 토시코. 아버지와 오빠가 나가우타의 장인이었고 토시코도 어릴 적 후리마류의 무용을 배웠으며 현 닛카츠 주식회사의 촬영소에 입사하여 여배우가 되었다. 이후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여배우로서 이름을 날리다, 12대 니자에몬과의 결혼을 기점으로 은퇴하였다.[4] 본명은 불명. 오랜 기간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정부였으며 그녀의 입지에 의해 입적하지 못했다는 설이 있다. 12대 니자에몬이 코마치 토시코와 결혼하고 1년 뒤 병사하였다.[A] 내연녀 무츠 소생.[6] 본명은 카타오카 하지메. 본래 5대 카타오카 가도였으나 그의 사후 아버지의 세습명인 카타오카 니자에몬을 14대로서 추존받았다. 일평생 온나가타를 주력으로 연기한 배우.[A] [8] 출생명은 카타오카 요시나리. 가부키 가문 타치바나야의 15대 이치무라 우자에몬의 양자로 입적되어 본명을 '이치무라 요시나오'로 개명했다. 태어나자마자 타치바나야로 입적하며 가족과는 떨어져 지냈다.[A] [10] 본명은 카타오카 다이스케. 카타오카 가문이지만 2대 이치카와 엔오의 가부키극에 더 많이 출연하였다.[11] 코마츠 토시코 소생. 카타오카 일가 참극 당시, 외조모의 댁에 맡겨져 있어 화를 면하였지만 부모와 동생을 하루 아침에 잃어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한다.[12] 코마츠 토시코 소생. 12대 니자에몬이 예순을 넘어서 본 막내아들이라 애착이 무척 깊었다고 한다.[13] 양부 10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친동생이다. 본명은 카타오카 히데타로.[14] 가부키 배우로서 가지는 집안 이름. 세습명 구도를 중심으로 창시되며, 가부키계에는 10대 명문가를 포함한 40개 정도의 야고가 있다고 한다.[15] 이는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