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171B1C,#000><colcolor=#eeeeee,#dddddd> 카타오카 니자에몬 일가 살해 사건 片岡仁左衛門一家殺害事件 | |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이 살해되었음을 알리는 아사히 신문 | |
발생일 | 1946년 3월 15일 |
발생 위치 | 도쿄도 시부야구 센다가야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자택 |
범죄 항목 | 살해, 존속살해, 유아살해 |
원인 | 불명(후술할 내용 참조) |
피의자 | 히토미타 토시아키(당시 22세) |
피해자 | 5명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당시 63세) 부인 카타오카 토시코(당시 25세) 4남 카타오카 히데요리(당시 2세) 여자 하수인 2명(당시 63세, 12세)[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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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46년 3월 15일, 도쿄도 시부야구 센다가야에서 가부키 명문가인 카타오카 가문의 당주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과 그의 가족이 함께 지내던 문인에게 자택에서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이다.2. 사건 전개
최초 목격 당시의 상황 |
발견된 시체의 상태는 매우 처참했는데 모두 장작패기용 도끼로 머리를 공격당했으며 이중에서 12대 니자에몬의 부인인 토시코의 상태가 제일 처참하였다. 시체가 발견된 거실과 부엌 쪽은 온통 피바다였고 문이나 창문은 부숴지고 깨졌으며 식량 창고의 항아리도 전부 깨져있었다.
3. 범죄자의 진술
이러한 참혹한 사건의 범인은 다름아닌 카타오카 일가와 함께 살해당한 여자 하수인(당시 12세)의 친오빠이자 12대 니자에몬의 자택에서 함께 지냈던 견습 작가 신분의 히토미타 토시아키(당시 22세)였다. 히토미타는 사건이 발생된 3월 15일부터 행방이 묘연했기에 제일 먼저 용의선상에 올랐었다. 수사본부는 히토미타를 바로 지명 수배하였고 3월 30일, 미야기현의 한 온천에서 발견되어 긴급 체포되었다.히토미타 남매의 아버지는 한때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에게 3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신세를 지고 살았었다.[2] 그러나 1945년, 도쿄 대공습으로 인해 히토미타 남매 부모님과 다른 형제들을 잃고 갈 곳이 없어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자택에 하수인으로 들어가게 된다.
히토미타는 아예 카타오카 가문의 견습 작가로 전향하여 가부키극에 매진하였다. 그러던 중 전쟁의 기미가 다 가시지 않은 상황 속에 일가는 식량난을 겪게 된다. 가뜩이나 식구가 많던 카타오카 일가였기에 히토미타 남매는 본인들의 몫으로 배급받아온 쌀까지 12대 니자에몬 부부에게 착취당하며 1일 2식[3]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여기에 12대 니자에몬의 부인 토시코는 틈만 나면 이들 남매에게 욕설과 여러 모진 말을 하고 매도했다고 진술하였다.
또한 히토미타 남매는 장작을 패서 불을 지펴가며 힘들게 밥을 해먹었지만 12대 니자에몬 부부는 남매에게서 착취한 쌀을 많이 모아두어 곤로에 조리해서 먹었다고 한다. 사건 전 날, 히토미타는 매일 주던 소량의 쌀을 앞으로는 밀가루로 대체하겠다는 토시코의 일방적인 통보에 분노하여 12대 니자에몬 부부와 말다툼을 하였고 12대 니자에몬은 "오늘 밤까지의 원고를 다 쓰면 이 집에서 나가라!" 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히토미타가 다 쓴 원고를 가져오자 12대 니자에몬은 "이러고도 네가 작가냐? 가부키극작가로서 센스가 없다'" 라며 윽박지르고는 그의 원고를 불에 태웠으며 히토미타는 그에 대한 분노를 품은 채로 자신의 방에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인 1946년 3월 15일, 히토미타는 이른 아침 변소에 다녀오는 길에 장작패기용 도끼에 발이 걸려 넘어진다. 그 도끼를 보고는 순간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부부를 살해해야겠다고 다짐한 뒤, 도끼를 들고 자택으로 들어가 12대 니자에몬과 토시코, 둘 사이의 어린 아들과 하수인 두 명을 막무가내로 살해하였다.
그리고 히토미타는 부엌으로 가, 그곳에 있던 곤로에 지어진 쌀밥과 중쌍당[4]을 훔쳐 먹고 피 묻은 옷을 국민복으로 갈아입은 뒤, 12대 니자에몬의 서랍에 있던 현금 580엔을 훔쳐 현장으로부터 도주했다.
여기서 의문인 점은 함께 12대 니자에몬 부부에게 홀대를 받았다던 여동생까지 살해한 것인데, 히토미타는 이에 대해 "여동생이 나를 말리길래 나도 모르게 죽여버렸다"라고 진술하며 여동생은 우발적으로 살해하였음을 밝혔다.
여기까지가 히토미타 검거 이후, 그가 수사과정에서 진술한 사건의 내용이며 모든 신문 기사는 그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4. 재판 결과
히토미타에게는 정신장애를 앓은 전적이 전혀 없었지만 조사 결과, 살해를 저지른 시점부터 도주에 이르기까지의 기억을 상실한 건으로 밝혀졌다. 이에 도쿄대학 의학부 정신과 교수 우치무라 유노의 집도로 정신감정을 진행하였다. 감정 결과는 격렬한 정동(情動)으로 인해 일시적인 의식장애를 일으킨 것으로 판별되었다. 한편 우치무라 교수와는 별도로 히토미타의 정신감정을 진행한 키쿠치 이치로 교수는 적어도 사람을 두 명 살해한 시점부터 일시적으로 정신병 상태였다고 결론지었다.1947년 10월 22일, 히토미타는 무기징역을 판결받았다. 구형은 사형이었다. 진작 사형 판결이 나고 곧장 형이 집행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죄목이었지만 히토미타는 그러지 않았는데,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정신 감정 결과 덕에 범행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음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판사가 그의 딱한 사정을 봐주었다는 설이 한때 신문을 통해 유포되었지만, 실제 판결문에서는 모든 살인 행위에 대한 책임 능력은 히토미타 본인에게 달려 있으며 이에 따라 우치무라 교수와 키쿠치 교수, 둘 중 어느 쪽의 정신 감정 결과도 법정에서 채용되지 않았고, 형법 39조 또한 적용하고 있지 않는다는 것이 밝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토미타가 사형 판결을 받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당시 영양실조 상태였던 히토미타와 카타오카 부부의 갈등, 범행 전 날의 여러 분쟁, 불면 등의 이유로 히토미타의 감정이 흥분하여 평정심을 잃었던 것을 재판부에서 고려해주었다는 것이라는 설이 그나마 유력하다.
히토미타는 1960년대에 사면되어 감옥에서 석방됐다고 여겨지고 있지만, 자세한 것은 현재까지 불명이며 2000년대에 들어서 겨우 석방되었다는 설도 있다.
5. 사건의 여파
당연히 큰 피해를 입은 쪽은 일본의 가부키계를 운영하는 쇼치쿠와 마츠시마야 카타오카 가문이었다.쇼치쿠의 본사 앞에는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사생활과 그가 여러 무대에서 보여줬던 매너와 품행에 대해 진실을 요구하는 신문사의 기자들로 인산인해였다. 가뜩이나 전쟁의 여파로 가부키계가 침체되어 가고 있는 상황에서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이 이를 연명하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는데 그랬던 그가 하루 아침에 살해당한 것이었다.
카타오카 가문의 일문은 기둥이던 당주를 잃었고 일찍부터 독립하고 있던 12대 니자에몬의 세 아들은 하루 아침에 아버지를 잃은 것도 모자라 세간에 '식구에게 쌀도 안 나눠준 아비의 자식'이라는 말을 들어가며 무대에 섰다.[5]
쇼치쿠와 12대 니자에몬의 세 아들이 이러한 모진 압박 속에서도 묵묵히 가부키 무대에 오른 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아버지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굳게 믿었고 이를 증명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쇼치쿠의 관계자와 타 가문의 가부키 배우 또한 매 인터뷰마다 12대 니자에몬은 자신의 문인에게 그런 모진 말을 하거나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발언은 하지 않는다며 히토미타의 진술을 적극 부인하였다. 가부키 4대 명문가에 속하는 오토와야와 코라이야, 나카무라야는 아예 주변의 경찰 관계자에게 사건의 진상을 착실히 조사해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기도 했다고
그리고 그로부터 22년 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다.
6. 22년만에 밝혀진 진실
살해 사건으로부터 22년 뒤인 1968년,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과 코마츠 토시코의 장녀이자 사건 당시, 남동생과는 달리 외탁되었기에 화를 면한 카타오카 테루에의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발신인은 다름아닌 사건의 범인 히토미타 토시아키.사건으로 인해 세 살의 나이에 부모님과 남동생을 한꺼번에 잃고 배다른 오빠들과 함께 갑질 부부의 딸이라며 온갖 모욕을 듣고 자라온 그녀는 처음에는 단순히 이제와서 사죄를 구하는 옥중 편지인 줄 알고 며칠간 편지를 안 읽으려다 가족의 설득으로 겨우 편지를 읽었으며 그곳에는 그토록 바라던 사건의 진상이 적혀 있었다.
12대째 카타오카 선생님 유족 귀하
저는 22년 전, 카타오카 일가족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의 범인입니다. 지금 이 편지는 단순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그날의 이야기를 몇 자 적어보려합니다. (중략) 처음에는 제대로 말할 생각이었으나 변호사로부터 음식 때문에 불만이 쌓여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하면 충분히 감형받을 수 있다는 얘기에 변호사와 이야기를 짜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에 진심으로 사죄드리며 깊이 참회하고 있습니다.
1968년, 장녀 카타오카 테루에가 공개한 히토미타의 옥중 편지 일부.
저는 22년 전, 카타오카 일가족의 목숨을 앗아간 사건의 범인입니다. 지금 이 편지는 단순 사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그날의 이야기를 몇 자 적어보려합니다. (중략) 처음에는 제대로 말할 생각이었으나 변호사로부터 음식 때문에 불만이 쌓여 범행을 저질렀다고 말하면 충분히 감형받을 수 있다는 얘기에 변호사와 이야기를 짜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에 진심으로 사죄드리며 깊이 참회하고 있습니다.
1968년, 장녀 카타오카 테루에가 공개한 히토미타의 옥중 편지 일부.
테루에는 드디어 부모님이 누명을 벗었다며 기자회견을 열었고 두 번째 편지에 적혀 있는 대로 히토미타는 자신의 범행의 이유가 단순 돈이었지만 현재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내용까지 밝혔다. 그러나 이미 많은 방송사에서 12대 니자에몬 부부를 속 좁고 욕심많은 패전 이후의 가족상으로 묘사한 영화나 드라마를 제작하고 시나리오를 계약하는 등, 12대 니자에몬에 대한 명예훼손은 계속되었다.[6]
이와 더불어, 카타오카 테루에는 당시 사건의 수사를 맡았던 경찰관들이 12대 니자에몬의 주변인들에 대한 얘기를 듣기보다 그저 사건 현장을 배회하기만 했고, 증언하기를 원하는 이웃집 노부부의 발언을 그저 12대 니자에몬의 자택에 함께 살지 않는다는 이유로 묵살하였으며 히토미타가 검거되자 증언 수집을 그만두고 히토미타의 진술만을 정사로 삼고 신문 기자들에게 이를 사실이라 알렸다는 진상을 알게 되어 심통해했다.
사건 당시, 자택의 거실에 장식돼 있던 히나단 제일 하단에 12대 니자에몬의 혈흔이 남아있다 |
애초에 아무리 패전으로 다들 가난한 때였다고는 하지만 가부키 가문은 그때나 지금이나 잘 먹고 잘 사는 귀족 가문이었다. 즉, 남의 쌀을 탐낼 정도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츠시마야 또한 전쟁 직후에나 쌀을 구할 경로가 끊겼었지 그 이후부터는 간사이에서 매번 쌀을 보내주어 이웃에게도 나눠주고 동냥을 하러 오는 아이들에게도 소량이지만 나눠줬다고 한다. 위의 사진은 12대 니자에몬이 세 살에 히나마츠리를 맞은 장녀 테루에를 위해 구입한 히나단과 히나 인형인데, 일반 가정에다 당시의 시대상이라면 더욱 구할 수 없던 것을 5층이나 쌓아놓고 여러 인형들로 장식해 놓은 것으로 12대 니자에몬 일가가 풍족했던 것을 알 수 있다.[8]
이후 경찰이 묵인했던 증언으로는 도쿄 대공습으로 갈 곳을 잃은 히토미타 남매를 12대 니자에몬이 오랜 친구의 자식들이라며 이미 하수인이 있고 당시 패전 직후였던지라 식량도 넉넉치 않았던 상황이었지만 우선 집으로 들였다는 것과 히토미타에게 너의 아버지가 시를 잘 읊었으니 너도 글 쓰는 일을 하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하며 '견습 작가' 라는 배울 수 있는 위치를 제공해주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후에 14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으로 추존받은 12대 니자에몬의 장남 또한,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댁에 가면 친자식들은 외가에 보내놓고 한동안 일본 무용과 가부키 극의 일부를 히토미타 남매를 포함한 문인들에게 몸소 보여주었고 여기에는 하수인들까지 한자리에 모아 궁금한 것이 있으면 물어보라 한 뒤 답해주는 시간도 가졌던 가정이었다고 한다.
12대 니자에몬은 장남인 14대 니자에몬에게 어릴 때 주었던 대사집을 다시 줄 수 있냐 물어봤다고도 하는데, 이에 어디에 쓸 거냐고 묻자 새로 들어온 견습 작가에게 선물해줄 것이라 답했던 것을 기억한다고 눈물로 회고하였다.
대표적인 증언으로는 당시 나카무라야 소속의 배우인 17대 나카무라 칸자부로[9]가 한 것이 유명한데, 아래와 같다.
니자에몬 씨는 그 친구를 댁에 거두고 함께 가부키 분장실에 들어오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왔다 가면 배우들의 물건이 하나씩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다지 비싼 물품은 아니었으나 그것이 반복되자 내가 말했었죠. 계속 저렇게 놔두면 저 사람은 언젠가 니자에몬 씨에게 크게 해가 될 수도 있다고. 니자에몬 씨는 잘 타이를 거라며 그저 웃어보였습니다.
한마디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도 모자라 존속살해까지 한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2023년을 기준으로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세 아들은 모두 세상을 떠났으며 장녀인 테루에 혼자 남았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범인의 진심어린 사죄를 바란 적이 없으며 그저 가부키 팬들의 기억 속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속물인 사람들로 기억되질 않기를 바랄 뿐이라며 참담한 심정을 토로했다.
여담으로 히토미타가 5명을 살해하고도 사형을 면한 것에 대해, 당시 일본의 식량난이라는 것에 모두가 힘들어하였고 못 먹어서 사람을 죽였다라는 진술이 5명의 목숨과 맞먹혔다는 점에서 현재까지 상당한 논란이 되어 법학과 논문에 해당 살해 사건이 단골 주제로 오르기도 했다.
7. 사건 이후 카타오카 니자에몬 명적의 행방
사건 이후, 카타오카 가문의 당주의 명적인 카타오카 니자에몬은 5년간 공석이었으며 누가 이것을 이을 것인가가 큰 관건이었다. 그리고 이것을 이을 자는 350여년의 역사와 함께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이 겪은 이미지를 회복시켜야 할 의무가 주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이에 유력한 후계로는 당연히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장남인 카타오카 하지메가 거론되었다. 하지메 또한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아버지의 세습명을 이어 명예를 되찾고 싶어했지만 쇼치쿠의 결정은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사촌형제에 해당하는 카타오카 치요노스케였다.
카타오카 치요노스케는 사건으로부터 5년 뒤인 1951년, 48세의 나이에 13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을 습명받으며 가문의 당주에 올랐고 선대 니자에몬들 못지 않은 실력으로 대배우로 거듭나며 인간 국보에 오른다.
한편 12대의 장남인 하지메는 자신이 실력으로 밀린 것에 분하여 니자에몬 대신 습명받게 된 '5대 카타오카 가도'라는 명적을 13대 카타오카 가도라고 자칭하기까지 한다. 다만 13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이 당시의 가도를 딱하게 여겼는지 자신의 유언장에 가도를 14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으로 추존하며 자신의 3남인 카타오카 타카오를 15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으로 인정하겠다고 적음으로써 가도는 무참히 살해된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토록 원하던 아버지의 세습명인 카타오카 니자에몬을 14대로서 추존받아 계보를 이었다.
[1] 이중 12살의 피해자는 가해자의 친동생이다.[2] 정확히 무슨 일로 신세를 졌던 것인지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다른 배우들의 증언에 의하면 부채를 만들고 붓으로 글귀를 써주는 것으로 카타오카 가문의 가부키 극에 여러 도움을 주고 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3] 2식이라 해봤자 점심은 쌀 한 홉에 저녁은 죽이었다고.[4] 일본에서 파는 설탕의 일종이다.[5] 이 당시 세 아들은 6대 오노에 키쿠고로 극단, 3대 이치카와 엔노스케 극단 등을 전전하며 겨우 가부키를 배우고 무대에 섰다.[6] 맨발의 겐에서도 쌀을 나눠주지 않겠다는 오만한 모습의 부부가 나오는데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 부부를 풍자한 것이다.[7] 타 가부키 가문들의 가족 사진만 봐도 하수인이나 집에서 함께 사는 방자, 문인들은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코라이야의 초대 마츠모토 하쿠오의 장남인 2대 마츠모토 하쿠오의 자서전에서도 10대 시절 하수인 두 명과, 문인 세 명을 데리고 밤늦게까지 타지에서 놀다 귀가하자 남의 집 귀한 자식들을 그저 한 순간 오락의 동반자로 삼으라고 가부키 가문에 보내준 것이 아니라며 아버지에게 죽도록 혼났었다는 내용이 있다.[8] 히나단은 보통 3월 3일에 장식한 뒤, 다음 날이 되면 여러 불행한 운을 피하기 위해 바로 들여다 놓는 편인데 사건 당시인 15일까지 히나단이 자택의 거실에 비치되어 있었다. 이는 테루에가 외탁을 가있었기에 돌아오면 축하하고 보여주게 하려던 12대 카타오카 니자에몬의 뜻이었다고 한다.[9] 18대 나카무라 칸자부로의 아버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