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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2 11:10:36

후마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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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굴 제국 제2대 황제
후마윤
هُمایون
파일:humayun.png
<colbgcolor=#4A5D23><colcolor=#fff,#fff> 이름 나시르 앗딘 무함마드 후마윤
نصیرالدین محمد‎ همايون
출생 1508년 3월 6일
파일:mughalalam.svg 무굴 제국 카불[1]
사망 1556년 1월 27일 (향년 47세)
파일:mughalalam.svg 무굴 제국 델리[2]
재위 기간 무굴 제국 황제
1530년 12월 26일 ~ 1540년 5월 17일 (10년)
대관식 1530년 12월 26일
전임자 바부르 (제1대)
후임자 악바르 대제 (제3대)
부모 아버지 : 바부르 황제 (1483 ~ 1530)
어머니 : 마함 베굼 (? ~ 1534)
자녀 슬하 5남 6녀
차남 악바르 대제 (1542 ~ 1605)
종교 이슬람 수니파

1. 개요2. 생애
2.1. 1차 즉위2.2. 15년의 망명 생활
2.2.1. 페르시아로의 망명
2.3. 2차 즉위와 죽음
3. 후마윤 묘지

[clearfix]

1. 개요

무굴 제국의 제2대 황제. 아버지이자 선황인 바부르 못지않은 시대의 풍운아였다.

후마윤이 22세의 나이로 황위에 올랐을 무렵 무굴 제국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형제들 간의 갈등은 끝이 없었고 동쪽에서는 셰르 샤 수르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북인도의 패권을 다투었다. 결국 1540년 후마윤은 셰르 샤 수르의 수르 왕조에게 대패하고 저 멀리 페르시아사파비 왕조로 기나긴 망명길을 떠났고, 무려 15년 동안이나 집도 절도 없이 방랑하게 된다.

이후 수르 왕조가 셰르 샤 수르의 죽음 이후 점차 흔들리자 이를 기회로 삼은 후마윤은 15년 만인 1555년 북인도로 돌아와 델리를 수복하고 인도에 무굴 제국을 재건한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제국을 재건한지 1년 만인 1556년에 도서관에서 넘어지는 바람에 실족사하는 어이 없는 최후를 맞게 된다. 이후 '무굴 최고의 명군'이라 불리는 악바르 대제가 후마윤의 뒤를 이어 무굴 제국의 황제로 즉위한다.

2. 생애

후마윤은 1508년 3월 6일 바부르와 그가 가장 총애하는 아내였던 마함 베굼 황후 사이에서 태어났다.[3] 이후 바부르의 후계자들 중 하나로 선택되어 제왕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하지만 후마윤의 인생 첫 시련은 바부르가 죽은 이후에 터졌다. 티무르 제국의 후예를 자칭했던 바부르는 자신이 세운 제국을 칭기즈 칸티무르의 전통에 따라 자식들에게 공평하게 배분하려고 했다. 장자 상속이 원칙이었던 일반적인 왕위 계승법과는 확연히 달랐던 몽골 부족 사회의 전통으로, 일단 자식 모두에게 평등한 대우를 해준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기껏 세운 제국이 조각조각 찢어진다는 엄청난 단점이 존재했다.

2.1. 1차 즉위

22세의 어린 나이에 무굴 제국의 황제에 즉위한 후마윤 주위에는 온통 적들 밖에 없었다. 그 외에도 영토를 물려받은 형제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후마윤의 자리를 위협했고, 델리의 귀족들마저 후마윤을 황제로 인정하지 않는 비토 분위기가 강했다. 한 번은 다른 형제를 새로운 황제로 올리려 쿠데타까지 모의했을 정도니 당시 후마윤이 얼마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후마윤이 자신의 제위를 지키기 위해선 정복을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신생 무굴 제국을 위협하던 세력은 크게 2개가 있었다. 하나가 남서쪽 구자라트의 바하두르 술탄이었고, 나머지 하나가 동쪽 비하르의 셰르 샤 수르였다. 후마윤은 즉위하자마자 이들 모두를 상대해야 했고, 1532년에 바하두르 술탄을 꺾고 구자라트를 성공적으로 합병했다.

셰르 샤 수르는 후마윤이 구자라트에 있는 틈을 타서 수도 아그라를 먹으려고 군사를 일으켰다. 후마윤에게 패배하고 도망친 바하두르 술탄은 목숨만을 부지하고 있다가, 후마윤이 셰르 샤 수르를 상대하기 위해 회군한 틈을 타 구자라트 시민들을 선동해 다시 세력을 끌어모았다. 특히 포르투갈의 지원을 받아 후마윤에게 밀리지 않을 만큼의 화기를 수입해 군대를 재정비한 바하두르의 군대는 후마윤도 무시못할 수준의 위협이었다. 셰르 샤 수르의 침공을 일단 막아낸 후마윤은 어쩔 수 없이 다시 군대를 돌려 구자라트로 돌아왔고, 바하두르를 다시 패퇴시킨 뒤 구자라트에 세력을 굳혔다.[4]

후마윤은 셰르 샤 수르의 공격으로부터 델리와 아그라를 지키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당시 무굴 제국 제2의 도시였던 가우어를 빼앗겼다. 후마윤이 기껏 보내놓은 증원군은 셰르 샤 수르의 집요한 공격에 길이 막혀 제대로 길을 뚫지도 못했고, 그렇게 무굴 제국이 허둥지둥거리는 동안 셰르 샤 수르는 가우어의 군량 창고에 쌓여 있던 엄청난 양의 곡물을 싹 털어갔다. 당시 가우어는 무굴 제국의 최대 경제 중심지인 벵골 지방의 중심지로 무굴 제국 내에서 가장 많은 양의 곡물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이번 공격으로 그 많던 군량미가 한꺼번에 털려버린 것. 당연히 무굴 제국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까지 몰렸고 반대로 셰르 샤 수르의 군대는 날로 강성해져갔다.

이와중에 후마윤의 형제동생들도 사단을 일으키며 그를 방해했다. 오히려 시시때때로 후마윤의 황위를 뺏기 위해 후마윤을 뒤통수치면 쳤지 절대 후마윤을 도와주지 않았다. 후마윤이 셰르 샤 수르로부터 입은 막대한 피해 때문에 낙심하고 궁전에 칩거하는 동안, 19살 먹은 후마윤의 동생 힌달은 몰래 후마윤을 배신하고 아그라로 가서 스스로 황제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후마윤이 힌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재상 셰이흐 부룰을 힌달에게 보내자 힌달은 부룰의 목을 잘라버리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후마윤의 또다른 형제였던 캄란 미르자는 한술 더 떴다. 그는 후마윤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모은 후. 오히려 힌달을 몰래 만나 협상을 맺고 후마윤을 쫒아낸 후 제국의 권력을 나눠먹자고 꿍꿍이를 꾸몄다.

한편 후마윤은 형제들이 아그라에서 자신을 쫒아낼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에 제대로 대응할 시간이 없었다. 가우어의 막대한 군량 창고를 약탈하고 사기가 하늘 끝까지 오른 셰르 샤 수르의 군대가 동쪽으로부터 서서히 진군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1539년에 셰르 샤 수르와 후마윤은 차우사 전투에서 격돌했고, 수많은 인명 피해를 내면서 양측 모두 지루한 소모전으로 들어갔다. 결국 셰르 샤 수르와 후마윤 둘다 막대한 병사 소모를 감당할 수가 없었기에 평화 협정을 맺었고,[5] 협정이 체결되자 후마윤의 군대는 마음놓고 바로 경계를 풀어버렸다. 하지만 셰르 샤 수르는 그렇지 않았다. 셰르 샤 수르는 그날 밤 군대를 이끌고 후마윤의 진지를 기습했고, 마음을 풀고 있던 후마윤의 군대는 대패하고 무너졌다. 후마윤은 갠지스 강을 헤엄쳐 건너 겨우 살아남았다. 목숨을 건진 후마윤은 아그라로 귀환했고, 아그라에서 형제들이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도 이들 모두를 용서했다.[6]

셰르 샤 수르는 후마윤의 군대를 야습해 대승을 거둔 이후 계속 아그라로 진군해 들어왔다. 자칫하면 제국 전체가 망할 위기에도 형제들 간의 알력다툼은 거듭 계속됐다. 후마윤은 시간을 끌고 기회를 노리다가 셰르 샤 수르를 공격할 것을 원했지만, 형제였던 캄란 미르자는 바로 뛰쳐나가 셰르 샤 수르를 공격하기를 바랐다. 결국 뜻이 맞지 않자 캄란 미르자는 제 이름으로 군대를 몰고 아그라에서 빠져나가 라호르로 떠나버렸다. 캄란 미르자가 나가자 후마윤은 힌달 등 형제들을 이끌고 1540년 5월에 칸나우즈에서 셰르 샤 수르와 재격돌했고, 이 전투에서마저 패배하고야 만다. 칸나우즈 전투에서마저 패배하며 완전히 끝장나버린 후마윤은 아그라에서 도망쳐 델리를 거쳐 라호르로까지 멀리멀리 도망친다. 한편 후마윤의 무굴 제국을 쫓아낸 셰르 샤 수르는 1540년 수르 왕조를 세웠다.

2.2. 15년의 망명 생활

파일:타마습 1.jpg
후마윤 (좌)과 타흐마스프 1세 (우)

그렇게 후마윤과 캄란 미르자를 포함해 총 4명의 형제들은 라호르에서 다시 모였다. 후마윤과 무굴 제국을 완전히 끝장내기로 마음먹은 셰르 샤 수르는 후마윤을 쫓아 라호르에까지 쫒아왔다. 셰르 샤 수르가 시르힌드에까지 도달하자 후마윤은 그에게 사신을 보내 더이상 추격을 멈추고 이쯤에서 멈출 것을 제안했지만, 쎼르 샤 수르는 '카불로 돌아가라'라고 응수하며 후마윤을 완전히 인도에서 몰아낼 준비를 계속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발이 단 것은 캄란 미르자였다. 캄란 미르자는 아버지로부터 카불을 물려받았는데, 만약 후마윤이 카불로 쫒겨온다면 카불의 통치권을 어쩔 수 없이 그와 나눌 수 밖에 없는 실정이었기 때문. 캄란 미르자는 몰래 셰르 샤 수르에게 전령을 보내 후마윤을 배신하고 그를 넘겨줄 것을 제안했지만, 셰르 샤 수르가 필요없다고 일축하며 거절했다. 이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후마윤에게 폭로되었고 모든 신하들이 캄란 미르자를 죽일 것을 요청했지만 후마윤은 또다시 거절했다.[7]

딱히 셰르 샤 수르를 상대할 수를 찾지 못한 후마윤은 더 멀리 피난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그는 라호르에서 빠져나와 군대를 이끌고 타르 사막을 건너 정처없는 망명길에 올랐다. 참고로 이 시기는 후마윤의 일생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고난의 시기였다. 가장 더울 때 찌는 듯한 더위를 자랑하는 사막을 건너야만 했고, 곳곳에서 적이 나타났으며 먹을 식량도 마실 물도 거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특히 당시 후마윤의 아내인 하미다 바노는 당시 임신한 상태였는데, 그녀의 말이 탈수로 죽어버렸을 때 아무도 임신 8개월의 왕비에게 말을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후마윤이 그의 말을 대신 내줘야만 했고 후마윤은 낙타를 타고 다녀야 했을 정도였다.

후마윤은 형제들을 불러모아 신드 주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신드 주에는 이전에 그에게 신세를 진 후세인 움라니가 에미르로 있었고 그의 아내인 하미다 바노 역시 신드 주의 유서깊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각지에 전령을 보내 형제들과 함께 신드 주로 향할 것을 요청했지만, 역시나 개판인 집안답게 캄란 미르자를 포함해 여러 형제들이 더 안전한 카불로 자기들끼리만 도망쳤다. 그나마 이전에 반란을 일으킨 힌달은 어찌 된 일인지 후마윤에게 충성을 유지하고 그를 따라 신드 주로 향했다. 한편 후마윤은 신드 주를 향하는 도중 아내 하미다 바노의 출산 때문에 잠시 오아시스 도시 암라코트에서 잠시 머무르게 된다. 암라코트의 왕은 그를 환대했고 후마윤은 몇 달 동안 암라코트에 머물렀다. 이 곳에서 하미다 바노가 출산한 사람이 바로 악바르 대제다. 다만 악바르가 힘든 방랑길을 하기엔 너무 어려서 후마윤은 그를 암라코트에 두고 떠났다.

신드에 성공적으로 도착한 후마윤은 그제서야 한숨 돌리고 재정비에 나섰다. 당시 신드의 에미르였던 후세인 움라니는 이전에 바부르에게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후마윤을 환대했다. 후마윤은 신드 주에 머무르면서 완전히 무너진 자신의 세력을 재건했다. 결국 수 백명의 신드와 발루치족 전사들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고, 후세인 움라니에게 지원받은 말과 대포 등을 가지고 가문의 본거지인 카불로 진군했다. 카불로 향하는 길에 수 천명의 전사들이 바부르의 후계자라는 정통성 때문에 그의 주위에 몰려들었고 그의 세력은 날로 불어갔다. 그는 다시금 자신이 티무르 제국의 정당하고 유일한 후계자임을 천명하면서 그의 정통성을 굳혀나갔다.

신드에서 충분히 세력을 끌어모아 어느 정도 재기한 후마윤은 카불에 박혀 있던 캄란 미르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1543년 7월 인더스 강을 도하했고, 수르 왕조를 갈아엎고 다시 무굴 제국을 재건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형제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당시 카불을 다스리던 캄란 미르자는 후마윤의 도움 요청을 무시했고 후마윤은 어쩔 수 없이 카불로 가지 못하고 서쪽의 페르시아, 즉 사파비 왕조로 가야만 했다. 그는 망명 길 도중 수많은 부족들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면서 점차 세력을 불려나갔다. 참고로 오아시스에 놔두고 온 악바르는 그 곳에서 겨울까지 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고, 결국 캄란 미르자의 밑에 있던 부하들 중 하나이자 후마윤의 형제이기도 했던 아스카리 미르자가 악바르를 거두어간다. 아스카리는 어린 악바르를 캄란 미르자의 후궁들이 양육하도록 맡겼고 악바르는 덕분에 죽지 않고 무럭무럭 자라난다.

2.2.1. 페르시아로의 망명

형제로부터도 외면당한 후마윤은 카불로 들어가지 못하자 서쪽의 사파비 왕조로 갔다. 이 망명길에서 또 수많은 부족들이 다시 떨어져나갔다. 당시 후마윤의 일행은 왕비와 후마윤을 포함해 겨우 40여 명 밖에 안됐는데, 식량이 없어 말고기를 햇빛에 달군 투구에 익혀먹어야할 정도로 사정이 열악했다. 그의 고생길은 겨우겨우 사파비 왕조의 중심 도시 헤라트에 당도해서야 겨우 끝난다. 페르시아의 황제였던 타흐마스프 1세는 후마윤을 정당한 티무르의 계승자로 인정해주었다. 덕분에 후마윤은 융슝한 대접을 받고 왕족과 같은 대우를 받았고, 당대 무슬림 동부 세계에서 가장 풍요로웠던 헤라트에서 아름다운 페르시아 문화를 접하고 크게 감명 받게 된다. 특히 당시 헤라트에서 페르시아 문화가 번성하게 된 요인들 중 하나가 티무르 제국의 유입 때문이었으니 더더욱 페르시아 문화에 심취하게 되었던 것.

후마윤은 사파비 왕조로부터 엄청난 대접을 받으면서 망명객답지 않은 생활을 했다. 특히 타흐마스프 1세는 후마윤에게 이상할 정도로 그에게 후한 대접을 해주었다. 특히 카불에 도사리면서 후마윤이 다시 제위를 되찾으러 올 것을 두려워한 캄란 미르자가 타흐마스프 1세에게 전령을 보내 후마윤을 송환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타흐마스프 1세는 이마저도 거절하고 후마윤에게 여전히 후한 대접을 계속했다. 후마윤에게는 매일같이 연회가 베풀어졌고 몇 달에 걸쳐 호화로운 생활을 누렸다. 특히 몇 달 동안 후마윤은 페르시아 문화에 빠져 수많은 예술가들을 만나고 다녔으며, 그가 무굴 제국을 되찾으면 그의 땅으로 이주해 올 것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후마윤이 다시 떠날 채비를 하자 타흐마스프 1세는 성대한 송별식과 함께 12,000여 명의 정예 기병을 붙여주었다. 이런 엄청난 지원을 해주는 조건은 칸다하르 지방을 그에게 주는 것 뿐이었다.

2.3. 2차 즉위와 죽음

페르시아에서 권토중래를 노리던 후마윤은 마침내 수 만명의 페르시아 군대를 이끌고 북인도로 돌아왔다. 그는 형제 아스카리 미르자가 다스리던 칸다하르를 2주 만에 돌파하고 지원을 해준 보답으로 칸다하르를 사파비 왕조에 넘겼다. 칸다하르를 함락한 후마윤은 이제 가문의 심장부였던 카불 재수복에 나섰다. 당시 카불은 그의 형제 캄란 미르자가 여전히 다스리고 있었는데, 캄란 미르자는 악정 때문에 카불 주민들에게 크게 미움받고 있었다고 한다. 후마윤의 군대가 접근하자 카불 시민들은 캄란 미르자에 반란을 일으켜 캄란 미르자를 쫒아냈고, 캄란 미르자는 어쩔 수 없이 도시 바깥에 진을 치고 후마윤을 맞을 준비를 했다. 참고로 1545년 11월에 후마윤은 카불에서 몇 년만에 아들 악바르와 재회했다. 이때 악바르의 할례를 기념해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캄란 미르자는 카불을 지켜내기 위해 발악했지만 결국 수적 우세였던 후마윤을 꺾는 데에는 실패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후마윤의 형제 힌달이 후마윤을 위해 싸우다가 전사했고, 아스카리 미르자는 끝까지 후마윤에게 저항하다가 메카성지순례하라는 명분으로 카불에서 강제로 쫓겨났다.[8] 1552년 캄란 미르자는 수르 왕조와 반-후마윤 동맹을 맺기 위해 협상장으로 향하던 도중 가카르 부족에 의해 사로잡혔고, 그대로 사슬에 묶인 채 후마윤 앞으로 끌려갔다. 후마윤은 캄란 미르자를 선처해주고 싶어했지만 신하들이 또 봐준다면 좋지 못한 선례를 남길 것이라고 강력하게 탄원하여 결국 눈을 뽑아버리고 메카로 성지 순례를 보내버렸다.[9]

당시 무굴 제국을 멀리 쫒아내고 북인도를 차지한 수르 왕조는 개국 군주 셰르 샤 수르의 죽음 이후 계속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왕조 내부에서도 내분이 일어나 수많은 경쟁자들이 왕위를 잡아보겠답시고 날뛰었고, 수르 왕조의 국력은 셰르 샤 수르 시절의 성세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급격히 줄어들었다. 수많은 도시들이 각자 할거해 수르 왕조에 반기를 들었고 이는 무굴 제국이 다시 북인도에 귀환하기에는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후마윤은 휘하의 바이람 칸 장군에게 군대를 맡겼고, 1555년 6월 22일 시르힌드 전투에서 무굴 군대가 바이람 칸의 뛰어난 전략에 힘입어 수르 왕조의 시칸다르 샤 수르의 군대를 대파하며 북인도를 수복하는 데 성공했다. 15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만에 마침내 인도에 무굴 제국을 재건한 것.

시칸다르 샤 수르의 군대마저 무너지고 수르 왕조가 멸망하자 더이상 북인도에서 후마윤을 가로막을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초에 수르 왕조의 폭정을 싫어하던 북인도인들도 후마윤의 군대를 크게 환영했다. 1555년 7월 23일, 후마윤은 15년 만에 델리에 재입성했다. 후마윤이 델리의 황좌에 앉아있는 것은 15년 전과 똑같았지만 후마윤의 입지는 이전과는 차원이 다르게 탄탄했다. 믿을 만한 신하와 장수들이 휘하에 많았고, 가장 큰 장점은 더이상 황위를 위협할만한 형제들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더이상 내치가 흔들릴 이유가 없었기에 후마윤은 마음놓고 외부 확장에 열을 올릴 수 있었다. 그는 망명 생활 동안 얻은 뛰어난 용병술로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고, 무굴 제국은 15년 전보다 훨씬 안정적인 제국으로 재탄생했다.

이렇게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후마윤은 엄청나게 허망한 죽음을 맞는다. 델리를 되찾은지 1년도 안된 1556년에 책을 품안에 가득 들고 가다가 도서관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실족사하는 바람에 아들인 악바르가 13세에 3대 황제로 즉위하게 되었다.[10] 전 세계 군주들의 죽음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어이없는 죽음이었다.[11]

3. 후마윤 묘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후마윤 영묘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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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shunya.net/HumayunTomb13.jpg

인도 여행가이드 책자를 보다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무덤 주인으로 후마윤의 이름을 처음 듣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후마윤 묘지). 인도 여행을 가면 델리에 있으니 꼭 가보도록 하자. 아무래도 선대나 후대들인 바부르나 악바르 대제, 샤 자한, 아우랑제브에 비해 네임밸류가 낮아도 한참 낮다. 다만 무굴 제국의 전성기인 악바르 대제에 지어진 후마윤 무덤의 건축 수준은 매우 높은 편이며, 북인도 최초의 페르시아 양식 영묘이다. 무덤이 워낙 커서 그런지 이후 제위 계승 분쟁에서 패배한 왕자들이 이곳에 함께 안장되었다. 무굴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바하두르 샤 2세는 세포이 항쟁 말엽의 혼란 속에서 영국군을 피해 후마윤 묘에 숨어있다가 발각되었고 이후 미얀마로 유배되어 사망하였다. 패배자들의 안식처 아우랑제브 시기 힌두교도들의 폭동으로 부관참시 당한 아들 악바르보다는 나은 운명일지도 ...

Europa Universalis 시리즈에서는 해당 시기에 무굴 제국의 군주로 구현되었으나 능력치(외교력, 행정력, 군사력)는 아버지 및 특히 아들에 비해[12] 밀리는 편으로, 4편에서는 행정력 5, 외교력 2, 군사력 3의 능력치를 갖고 있다.

[1]파일:아프가니스탄 국기.svg 아프가니스탄 카불.[2]파일:인도 국기.svg 인도 델리.[3] 마함 베굼 황후는 호라산의 술탄과도 혈연이 있는 유력한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한다.[4] 참고로 술탄 바하두르는 목숨을 건져 포르투갈에 망명했지만 쓸모가 없다고 여겨져 결국 1537년 2월 포르투갈인들에게 살해당한다.[5] 이 협정에서 후마윤은 황제로서 '하사'하는 방식으로 셰르 샤 수르에게 벵골과 비하르 지방의 통치권을 인정했다.[6] 이해는 안가지만 후마윤은 형제들을 용서해줬다. 특히 대놓고 반란을 선언한 힌달마저 용서했다.[7] 이정도 되면 후마윤이 호구가 아닐까 의심하겠지만, 후마윤 역시 캄란 미르자를 죽이고 싶어했다고 한다. 다만 어떤 일이 있어도 형제들끼리 칼부림을 하지 말라는 아버지 바부르의 유언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8] 아스카리 미르자는 이 과정에서 의문스러운 최후를 맞았다. 후마윤이 죽였을 가능성이 크다.[9] 후마윤은 캄란 미르자가 메카에서 회개하기를 바랐지만 그는 1557년 아라비아 반도에서 그대로 죽었다.[10] 당시 후마윤이 품에 책을 가득 들고 가던 도중, 밖에서 아잔의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무슬림들은 아잔이 들리면 무릎을 꿇고 신에게 기도하는게 관행이었기 때문에 후마윤은 계단에서 책을 든 자세 그대로 무릎을 굽혔는데, 이때 망토를 밟고 굴러떨어져 아래의 돌에 머리를 박았다. 결국 이 상처로 3일 후 사망했다.[11] 정말 아이러니인건 그의 조부도 사인이 똑같다. 조부 쪽은 한 술 더떠 비둘기를 구경하려다가 실족사했다.[12] 악바르는 모든 능력치가 만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