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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18 23:29:26

헨리 드 헤이스팅스

성명 헨리 드 헤이스팅스
Henry de Hastings
생몰년도 1235년경 ~ 1269년 3월 5일 이전
출생지 잉글랜드 왕국 노퍽주 애쉴
사망지 잉글랜드 왕국 코번트리
아버지 헨리 드 헤이스팅스
어머니 헌팅던의 에이다
형제 에이다, 마조리, 힐러리
배우자 조안 드 캔틸루프
자녀 존, 에드먼드, 오드라, 로라, 조안
직위 헤이스팅스 남작(자칭)

1. 개요2. 생애3.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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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2차 남작 전쟁에서 시몽 드 몽포르의 편에 서서 왕당파에 대적했다.

2. 생애

헤이스팅스 가문에서 처음으로 알려진 인물은 노퍽의 애쉴 영지를 소유했으며, 헨리 1세의 청지기인 윌리엄 1세 드 헤이스팅스였다. 윌리엄 1세의 손자인 윌리엄 2세 드 헤이스팅스는 제1차 남작 전쟁에서 존 왕에 대적하는 귀족 반란군에 가담했다가 1217년 링컨 전투에서 패배해 생포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 풀려났다.

윌리엄 2세의 아들인 헨리 드 헤이스팅스는 헨리 3세를 추종했으며, 그의 군사 원정에 참여했다. 그는 스코틀랜드 국왕 일리엄 1세의 형제이자 스코틀랜드 왕자이자 헌팅던 백작인 데이비즈의 딸 헌팅던의 에이다와 결혼했다. 에이다는 자녀가 없는 형제인 헌팅던과 체스터 백작 존의 상속인 중 한 명으로, 이를 통해 헤이스팅스 가문의 재산을 크게 늘렸다. 헨리 3세는 헨리 드 헤이스팅스에게 체스터 주의 갖치의 1/3에 해당하는 임재권을 부여했다. 이 헨리의 아들 헨리가 이 문서의 주인공이다.

13세기 연대기인 <The Complete Peerage(완전한 귀족)>에 따르면, 헨리는 노퍽의 애쉴에서 출생했다고 한다. 1250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영지를 물려받았는데, 그 결과 연간 약 600파운드의 수입을 받았다. 1251년, 헨리 3세는 당시 미성년이었던 그의 재산에 대한 후견권을 8명으로 나누었다. 주요 후견인은 왕의 이복형제인 기 드 뤼지냥과 조프루아 드 뤼지냥, 기 드 로체포트였다. 헨리와 그의 자매들의 결혼을 주선할 권리는 기 드 뤼지냥에게 부여되었지만, 그는 약 1년 후에 그것을 윌리엄 3세 드 캔틸루프에게 팔았다. 이후 헨리는 윌리엄 3세 드 캔틸루프의 딸이자 에버게브니 남작 조지 드 캔틸루프의 자매인 조안 드 캔틸루프와 결혼했다.

1255년 헨리 3세와 함께 스코틀랜드 국경을 방문했으며, 1256년 5월 10일 성인으로 인정받은 뒤 자신의 소유물에 대해 헨리 3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1260년 8월 처음으로 왕의 부름을 받고 군 복무에 응했지만, 1261년 헨리 3세에 대항해 옥스퍼드 조례를 관철하려 한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를 추종했다. 헨리가 시몽 드 몽포르 편을 든 이유에 대해, 현대 학자들은 여러 이유를 제시한다. 먼저, 그의 장인과 아내의 가문인 캔틸루프 가문이 시몽 드 몽포르를 절대적으로 지지한 니콜라스 드 세그레이브의 세그레이브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또한 헨리는 자기가 어렸을 때 후견권을 맡았던 뤼지냥 가문이 성인이 된 자신에게 영지를 되돌려 주는 대가로 200파운드에 달하는 거금을 요구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 헨리는 프로방스의 엘레오노르 왕비의 총신인 제프리 드 루시와 친구 사이였는데, 제프리 드 루시는 왕실을 좌지우지하려는 뤼지냥 가문의 경계 대상이었기 때문에 그 역시 여기에 휘말렸을 수도 있다.

헨리는 1261년 겨울 왕에게 옥스퍼드 조례를 따르라고 강요하기 위해 결성된 귀족군에 가담했으며, 1263년 5월 의회에서 프랑스로 망명했던 시몽 드 몽포르를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헨리 3세는 그를 기사로 삼겠다고 약속하면서, 웨일스인들의 침략에 대항한 군사 작전에 참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후 제2차 남작 전쟁이 발발하자, 헨리는 시몽 드 몽포르 편에 섰고 캔터베리 대주교 사보이아의 보니파초에 의해 파문되었다. 같은 해 12월 13일, 헨리는 다른 귀족들과 함께 중재 역할을 맡은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결정에 따라 왕과의 분쟁을 해결하기로 한 결의안에 서명했다. 그러나 루이 9세가 헨리 3세 편을 들어 옥스퍼드 조례를 무효로 처리하자, 이에 반발해 시몽 드 몽포르 등과 함께 본격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1264년 4월 시몽 드 몽포르의 로체스터 공방전에 참여했지만 8일만에 포기했고, 5월14일 루이스 전투에서 몽포르군 좌익 부대를 결성한 런던 민병대 사령관 중 한 명으로서 헨리 3세, 에드워드 왕자, 콘월의 리처드 등을 생포하는 데 일조했다. 이후 시몽 드 몽포르가 정국을 주도하는 가운데, 그는 스카버러, 커틀링, 윈체스터 성의 순경을 맡았다. 그 해 6월 소 시몽 드 몽포르가 법원 절차를 악용해 서식스의 브람버에서 왕당파 귀족인 윌리엄 드 브로스의 영지를 자기 것으로 삼을 때 협조하고, 윌리엄 드 브로스에게 10,000마크의 벌금을 선고했다. 12월 14일 시몽 드 몽포르로부터 1265년 1월 20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소집될 의회에 출석하라는 소환장을 받았고, 1265년 2월 던스턴빌에서 열리는 마상창시합에 참여하려 했지만 웨일스 변경지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나자 중단했다.

그 후 시몽 드 몽포르와 함께 에드워드 왕자의 군대를 격멸하기 위한 공세를 감행했지만, 1265년 8월 4일 이브샴 전투에서 참패를 면치 못했다. 시몽 드 몽포르 등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고, 그는 중상을 입은 채 생포된 뒤 모든 영지를 몰수당했다. 헨리 3세는 1266년 1월 또는 2월에 그의 장원에서 얻은 수입 중 100파운드를 왕비에게 부여하고, 나머지는 추종자 8명에게 분배했다. 1266년 석방되었고, 그 해 5월, 초대 더비 백작 로버트 드 페러스에게 가담해 체스터필드 전투에 참여했다가 패배한 뒤 가까스로 탈출한 뒤 케닐워스 성으로 피신했고, 그곳에서 1266년 6월부터 12월까지 토벌대를 상대로 케닐워스 공방전을 치르다가 식량난에 시달리자 벌금을 지불하면 영지를 돌려받고, 다시는 왕을 상대로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 후 자유를 얻은 헨리는 무기를 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엘리 섬으로 피신한 뒤, 그곳에 있던 반란군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1267년 6월 토벌대가 엘리 섬을 대대적으로 정복하고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본보기로 모조리 죽이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즉시 헨리 3세에게 항복하고 케닐워스 협정을 받아들였다. 이후 벌금이 7년이 아닌 5년 동안의 소득에 해당할 정도로 삭감되었고, 그는 큰 어려움 없이 벌금을 납부했던 듯하다. 1269년 3월 5일 이전에 사망했고, 코번트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아내 조안 드 캔틸루프는 미망인 몫으로 연간 230파운드의 수입을 받았고, 1271년 7월에 사망한 후 남편과 함께 묻혔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