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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6 20:03:48

헤센의 엘리자베트 공녀

헤센의 엘리자베트에서 넘어옴
<colcolor=#000> 러시아 제국의 대공비
헤센의 엘리자베트 공녀
Prinzessin Elisabeth von Hessen und bei Rhein
파일:Grand_Duchess_Elisabeth_Fedorovna_in_1885.jpg
<colbgcolor=#C7F3FF> 이름 독일어 엘리자베트 알렉산드라 루이제 알릭스
(Elisabeth Alexandra Luise Alix)
러시아어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Елизавета Фёдоровна)
출생 1864년 11월 1일
독일 연방 헤센 대공국 베순젠
사망 1918년 7월 18일 (향년 53세)
소비에트 러시아 알라파옙스크
배우자 러시아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
(1884년 결혼 / 1905년 사망)
아버지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어머니 영국의 앨리스 공주
형제 빅토리아, 이레네, 에른스트 루트비히, 프리드리히, 알릭스, 마리
종교 루터교회러시아 정교회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373a3c,#ddd {{{#!folding [ 시성 정보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C7F3FF><colcolor=#000> 시성 1981년 해외러시아정교회
1992년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성인분류 순교자
축일 7월 18일(성인 단독)
10월 3일(한국정교회 24인 수호성인 축일)[1]
}}}}}}}}}}}}
1. 개요2. 생애
2.1. 유년 시절2.2. 러시아 대공비 시절2.3. 남편의 죽음2.4.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등장2.5. 러시아 혁명과 비참한 죽음
3. 가족관계
3.1. 조상
4. 여담

[clearfix]

1. 개요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영국의 앨리스 공주의 2남 5녀 중 둘째이자 차녀로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또한 밀포든 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의 여동생이자 헤센 대공 에른스트 루트비히의 누나이며,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왕자비 이레네러시아의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언니이다.

풀네임 중 엘리자베트는 할머니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로부터 따왔고 미들네임인 루이제와 알릭스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으로부터 따왔으며 '엘라' 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파일:261080-1331571250.jpg
파일:헤센의 엘리자베트(1870).jpg
유년 시절의 초상화 1870년에 찍은 사진
파일:The_Hessian_family_in_1876.jpg
파일:Princess_Elisabeth_of_Hesse_1883.jpg
1876년에 찍은 가족사진[2] 1883년에 찍은 사진

헤센 대공가의 공녀였음에도 비교적 평범하고 검소하게 자랐다. 방 청소도 직접 하였고 어머니 영국의 앨리스 공주가 직접 만든 옷을 입었다고 한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당시 어머니를 따라 부상당한 군인들을 돕기도 하였다. 엘리자베트는 행복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영국인이었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일어보다 영어에 더 능통하였다. 어머니에게는 영어로, 아버지에겐 독일어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엘리자베트가 14살일 때 어머니와 막내 여동생 마리를 디프테리아로 잃었다. 당시 엘리자베트만 할머니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의 집에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족 중 유일하게 감염되지 않을 수 있었고, 이후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곁에서 자랐다.

미모가 뛰어나고 매력적이었던 엘리자베트는 당대 유럽 왕실 최고의 미녀로 손꼽혔고 그만큼 다른 나라의 왕자들이 엘리자베트를 좋아했다. 그 중에는 이종사촌 오빠인 독일 제국빌헬름 황태손[3] 있었다. 빌헬름 황태손은 본 대학에 다니면서 주말에 이모 영국의 앨리스 공주의 집에 종종 방문하곤 했는데, 그러면서 사촌 엘리자베트에게 사랑에 빠져버린 것. 이후 빌헬름 황태손은 1878년에 엘리자베트에게 청혼했으나 거절당했다. 이후 빌헬름 황태손은 본인의 6촌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와 결혼했다. 참고로 엘리자베트의 여동생 이레네는 빌헬름 황태손의 남동생인 하인리히 왕자와 결혼했는데 만약 빌헬름 황태손과 결혼했었다면 겹사돈이 될 뻔했다.

빌헬름 황태손 말고도 찰스 몬태규나 헨리 윌슨 등이 엘리자베트를 흠모했다고 한다. 빌헬름 2세의 고종 사촌 형이자 바덴의 대공이었던 프리드리히 2세빅토리아 여왕이 특히나 손녀사윗감으로 마음에 들어했는데 엘리자베트가 그의 청혼을 거절하자 여왕의 상심이 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엄청난 경쟁을 거치고 엘리자베트가 사랑에 빠진 사람은 바로 알렉산드르 2세의 5남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었다.[4] 세르게이의 어머니인 마리야 알렉산드로브나 황후는 그녀의 아들들을 데리고 친정인 헤센에 자주 방문하곤 했다.[5] 그래서인지 엘리자베트와 세르게이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는데, 결혼할 나이가 되자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6] 두 번의 청혼 끝에 엘리자베트는 결혼을 약속했지만,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은 문란한 로마노프 왕가를 싫어했던 터라 이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

2.2. 러시아 대공비 시절

파일:f5423e51f7e9d76d58db3b06e8daa4db.jpg
파일:Princess_Elisabeth_of_Hesse_1887_(a).jpg
옐리자베타와 세르게이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 대공비

세르게이와 엘리자베트는 1884년 6월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 궁전의 예배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엘리자베트는 세르게이와의 결혼과 함께 루터교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했고, 이름도 러시아식인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로 바꿨다. 엘리자베트의 결혼식은 여동생 알릭스러시아 제국니콜라이 황태자가 처음 만나게 된 자리이기도 했다.

로마노프 황실을 비롯해 러시아의 국민들도 아름답고 매력적인 새 대공비 옐리자베타 표도로브나에게 호감을 품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 부부에게는 평생 아이가 없었는데 아예 임신을 못했다.[7] 결국 엘리자베트가 37살이 되는 1901년에 남편 세르게이 대공은 자신의 조카들인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을[8] 아내와의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입양했다.[9] 이런 문제로 비난을 많이 받자 점점 세르게이 대공은 아내와 사이도 멀어지고 술을 가까이 했다. 엘리자베트는 그래도 세르게이 대공을 사랑했기에 늘 참고 살아갔다.

엘리자베트는 시조카 니콜라이 2세와 여동생 알릭스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러시아 황족을 싫어했던 빅토리아 여왕과 달리 엘리자베트는 두 사람의 관계를 도왔는데, 종교 때문에 니콜라이 2세의 청혼을 거절한 알릭스를 설득하기도 했다. 결국 며칠 뒤 알릭스는 청혼을 받아들여 러시아 제국의 황후가 되었다.

한편 1903년에 조카 알렉세이 황태자혈우병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사이비 종교인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러시아 황실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2.3. 남편의 죽음

1905년 남편인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대공보리스 사빈코프가 이끄는 사회혁명당 소속 혁명가 이반 칼리아예프에게 암살되었고, 엘리자베트는 산산조각이 난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며 오열했다. 엘리자베트는 직접 감옥으로 찾아가 암살범의 구명을 청원했으나 상대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파일:Elisabeth_Fyodorovna.jpg
수녀가 된 엘리자베트

남편이 죽은 뒤 상복을 입고 채식을 하였으며, 보석이나 장신구 등을 팔아서 자금을 마련하였다. (입양된) 아이들이 결혼하거나 독립하여 품을 떠나자[10], 1908년에 집을 수녀원으로 바꾸고 스스로 수녀원장이 되었다. 1909년에는 가지고 있던 보석과 장신구 등을 팔아 자금을 마련해 병원이나 고아원 등을 세우고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봉사하며 살았다.

엘리자베트는 자신이 세운 마르포-마린스키 수녀원(Марфо-Мариинская обитель)에서 입을 수도복도 디자인했는데, 사진을 보면 러시아 정교회의 수도복보다는 (아마도 엘리자베트에게 더 익숙했을) 가톨릭 교회의 수도복과 유사했다. 그러나 현재 해당 수녀원 소속의 수녀들은 엘리자베트가 디자인한 수도복이 아니라, 다른 러시아 정교회 수녀들의 복장에 가깝게 바꾼 수도복을 착용하는 듯하다.

2.4.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등장

1884년 세르게이 대공과 엘리자베트의 결혼식에서, 엘리자베트의 여동생 알릭스와 시조카 니콜라이 황태자(훗날의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만나, 12살 소녀와 16살 소년은 서로 첫눈에 사랑에 빠졌다.

10년이 지나 1894년, 두 사람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연애 결혼을 했다. 엘리자베트와 알릭스의 외할머니인 빅토리아 여왕은 러시아의 정치가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두 사람의 결혼을 끝까지 반대했으나, 알릭스는 사랑을 위해서 종교도 루터교회에서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고 이름도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라고 개명하여 알렉산드라 황후가 되었다. 그러나 시어머니 마리야 황태후와 성격 차이, 친정의 입장[11], 아들 출산의 압박 등으로 심한 고부갈등을 겪었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딸만 넷을 낳다가 드디어 다섯 째로 아들 알렉세이 황태자를 낳았으나, 불행히도 알렉세이는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물려받은 혈우병 때문에 몸이 허약했다. 그리고 당시의 의학으로는 혈우병을 치료하거나 증세를 완화시킬 수 없었다. 그런데 1903년에 요승 라스푸틴모스크바에 나타나 이름을 날렸다.

알렉산드라 황후는 자신 때문에 아들이 몹쓸 병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자책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이었는지 라스푸틴을 불러들여 아들의 치료를 부탁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나름대로 효험을 보았다. 그러자 황후는 라스푸틴을 덜컥 신뢰하며 가까이에 두었다.

엘리자베트는 그런 여동생을 걱정하여 니콜라이 2세의 막내 여동생인 올가와 함께 알렉산드라 황후에게 편지를 쓰는 등, 여러모로 알렉산드라에게서 라스푸틴을 떨어뜨려놓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허사로 끝났고 오히려 자매 및 올케 사이만 악화될 뿐이었다.

라스푸틴알렉산드라 황후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국정에 관여하고, 농민들에게 생계 유지조차 어려울 만큼 가혹한 세금을 거둬들여 사리사욕을 채웠으며 이에 항의하는 농민들에게는 총탄을 퍼붓기까지 했다. 뜬금없이 황실에 나타난 요승 한 명이 부린 전횡 때문에 러시아 제국의 백성들은 라스푸틴뿐만 아니라 차츰 독일(헤센 대공국) 출신 외국인 황후에게도 불만을 품었다.

결국 1916년, 라스푸틴은 펠릭스 유수포프를 중심으로 한 반대파들(황족&귀족)에게 암살되었다. 엘리자베트의 양아들 드미트리 대공 또한 라스푸틴 살해에 앞장섰기 때문에 알렉산드라 황후는 언니가 암살에 관여했다고 믿었고, 자매 사이는 더욱 나빠졌다. 니콜라이 2세도 분노하여 드미트리 대공을 추방했다.

2.5. 러시아 혁명과 비참한 죽음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고 나서도 망명하지 않은 채 엘리자베트는 러시아에 남았다. 엘리자베트는 죽는 순간까지 망명하지 못한 황족들을 보살피며 기도 생활과 봉사에 충실하였으나, 결국 1918년 7월 18일[12] 갱도 안에 끌려가 폭탄으로 살해되었다. 시신에는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들을 도왔던 흔적이 남았다고 한다.
주여,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13]
(Herr, vergib ihnen, denn sie wissen nicht, was sie tun!)

사망 당시의 유언.

이후 엘리자베트를 포함하여 폭탄으로 살해된 6명의 시신[14]은 후에 베이징에 옮겨져 안장되었다가 사후 2년 뒤인 1920년, 언니 빅토리아에 의해 엘리자베트의 시신은 예루살렘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성당[15]에 수녀 바바라 야코블레바(И́нокиня Варвара Я́ковлева)[16]와 함께 이장되었다.[17]

해외러시아정교회[18]가 1981년, 러시아 정교회가 1992년에 각각 엘리자베트를 순교자라고 인정하고 시성하였다. 정교회 성인으로서의 축일은 (율리우스력) 7월 5일[19]이다. 이와 별도로 러시아 정교회는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 순교한 이들을 '러시아의 새 순교자들과 증거자들'이라고 하여 따로 묶어서 기념하는데, 엘리자베트도 '새 순교자'로서 함께 공경받는다.

3. 가족관계

3.1.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헤센 대공국의 엘리자베트 대공녀
(Princess Elisabeth of Hesse and by Rhine)
<colbgcolor=#fff3e4,#331c00>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colbgcolor=#ffffe4,#323300> 헤센 대공국의 카를 공자
(Prince Charles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2세
(Louis II,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바덴의 빌헬미네 공녀
(Princess Wilhelmine of Baden)
프로이센의 엘리자베트 공주
(Princess Elisabeth of Prussia)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자[20]
(Prince Wilhelm of Prussia)
헤센홈부르크의 마리아 안나 여방백
(Landgravine Maria Anna of Hesse-Homburg)
영국의 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Prince Albert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에른스트 1세
(Ernest I, Duke of Saxe-Coburg and Gotha)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루이제 공녀
(Princess Louise of Saxe-Gotha-Altenburg)
빅토리아 여왕
(Victoria)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21]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cess Victoria of Saxe-Coburg-Saalfeld)

4. 여담




[1] '한국정교회 24인 수호성인' 중에 한 명으로 지정되어, '한국정교회 24인 수호성인 축일'에 함께 기념한다.[2] 맨 왼쪽에서 아버지인 루트비히 4세 바로 옆에 서 있는 여자 아이가 엘리자베트.[3] 엘리자베트의 이모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의 장남.[4] 엘리자베트에겐 아버지 루트비히 4세의 고종사촌으로 5촌 숙부이기도 했다.[5] 마리야 황후가 엘리자베트의 아버지 루트비히 4세의 고모였다. 즉, 엘리자베트는 고모할머니가 시어머니가 된 셈.[6] 세르게이 대공이 부모를 잃은 후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엘리자베트와 깊은 공감대가 형성되었으며, 서로 비슷한 점이 많았던 것에 끌렸다고 한다.[7] 미남인 세르게이 대공은 자신의 외모에 대단히 예민했는데 항상 코르셋을 입어서 허리선을 날씬하게 다듬는 거야 당시 프로이센 왕국군 장교들의 군기의 영향을 받아 그렇다 쳐도, 늘 보석 반지를 한 개도 아니고 여러 개 끼고선 얘기할 때 만지작거리는 버릇이 있었고 참고로 이 버릇은 48세에 암살 당할 때까지도 있었다고. 또한 세르게이 대공이 암살되고 혁명이 일어나고 훨씬 뒤에 로마노프 왕조 관련 각종 책들이 나오면서 세르게이 대공의 동성애자 설이 유포되었다. 세르게이 대공은 입양한 어린 조카인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과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을 미숙아 시절부터 손수 길렀다. 조카들인 마리야 여대공과 드미트리 대공도 세르게이 대공을 매우 좋게 기록했는데 비록 평생 아이는 낳지 않았을지언정, 엘리자베트와 평생 한 침대에서 잤다고는 하지만 "여성적이기까지 한 독점욕으로 우리를 돌보셨다."고 기록해서 동성애자 의혹을 더욱 부채질했다.[8] 자신의 동생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첫 번째 아내 그리스와 덴마크의 알렉산드라(1870~1891. 요르요스 1세의 장녀(셋째). 드미트리 대공을 조산하고 사망했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었다. 참고로 드미트리 대공은 러시아 혁명 이후 프랑스로 망명을 갔다가 샤넬과 친분 관계를 맺는데 그녀에게 조향사인 에르네스트 보를 소개해 준 것과 향수 산업에 도움을 준다.[9] 다만 이는 아이들의 친부인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이 전처와의 사별 이후 자식들을 내팽개치고, 올가라는 평민 여성과 불륜을 저지르면서 사실상 드미트리 대공과 마리야 여대공이 아버지에게 버림받게 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드미트리와 마리야는 작은 아버지인 세르게이 대공에게 입양되지 않았더라면, 제위 계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넘어서 고아가 될 뻔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참고로 파벨 대공은 결국 불륜녀인 올가와 귀천상혼을 해 1남 2녀를 낳았지만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면서 살해당했고, 올가 소생의 외아들도 엘리자베트와 같이 살해당했다.[10] 세르게이 대공이 입양한 1남 1녀 중 첫째인 마리야 파블로브나 여대공은 1908년 쇠데르만드 공작 빌헬름 왕자와 결혼하여 외아들 레나르트(1909~2004 : 귀천상혼했고 두 번 결혼해서 9명의 자녀를 두었다. 부모가 이혼한 후에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고, 성인이 된 한참 뒤에야 어머니와 가끔 만났다고 한다)을 두었으나 1914년에 이혼했다. 이후 마리야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무렵 한 군인과 재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이 아들은 만 1살 때 죽었고 두번째 남편과도 곧 이혼했다. 이후 미국, 중남미 등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차 대전 후에는 독일에서 지내고 1958년에 68세로 사망했다. 둘째인 드미트리 파블로비치 대공은 누나가 결혼한 뒤 집을 떠나 다른 친척들과 지내다가 군에 들어갔다. 라스푸틴 암살에 가담한 후에는 페르시아 국경으로 추방되었고, 페르시아에서 지내다가 영국을 거쳐 프랑스로 망명했다. 이후 이런 저런 활동을 하다가 2차 대전 중인 1942년 스위스에서 병으로 죽었다. 1926년에 미국 여성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1937년 이혼했다고 한다.[11] 당시 알릭스의 친정인 독일과 마리야 황태후의 친정인 덴마크는 사이가 나빴다.[12] 여동생 알릭스가 처형당한 다음 날이다.[13] 루가복음 23장 34절에 나오는 구절이다.[14] 엘리자베트 공녀, 요한 콘스탄티노비치 왕자, 바바라 야코블레바 수녀, 알렉세이 표토노프 구스타프손 신부, 나머지 하인 2명.[15] 이유는 엘리자베트가 생전 이 성당의 준공식에 참석했을 때 후에 자신이 죽은 후 시신을 이곳에 안장되고 싶다고 언급했기 때문이다.[16] 바바라 역시 엘리자베트와 함께 폭탄으로 살해되었다.[17] 나머지 사람들의 시신은 베이징에 그대로 있다가 문화대혁명 발생 후 묘지가 파괴되었다고 한다.[18] 원래는 러시아 정교회 성직자 일부가 공산당 세력을 피해 해외로 나가면서 생긴 교회. 실질적인 설립은 1920년에 되었으나 1927년에 모스크바 총대주교가 공석인 상태에서 수도대주교 세르게이가 소련 정권에 충성을 서약하자, 이를 계기로 공식적으로 결별을 선언하였다. 2007년에 다시 러시아 정교회(모스크바 총대주교청)과 일치하였는데, 이때 러시아 정교회는 해외러시아정교회가 독립적으로 시성한 성인들도 인정하기로 하였다. 현재 해외러시아정교회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청 산하 준자치교회로 운영된다.[19] 엘리자베트가 죽은 날짜를 율리우스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위에서 설명한 1918년 7월 18일은 그레고리력 날짜.[20]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4남이다.[21] 조지 3세의 4남이다.[22] 헝가리어로 Magyar Szent Erzsébet(헝가리의 성녀 에르제베트)이다.[23] 이콘에서 묘사된 엘리자베트의 모습은 수녀복 차림이 아니라, 본격적인 수도복 차림으로 수도생활을 하기 이전 수수한 검은 드레스 차림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수녀 시절 문단의 상단 사진을 검은색으로 바꾼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