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중인 폴 게티 박물관 소개 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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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韓服 입은 男子[1](영어)Man in Korean Costume (1617년 경)
드로잉에는 루벤스가 생전 처음 만난 동양인에 매혹돼 정신없이 그렸던 감흥이 그대로 살아 있다. 머리는 작게, 몸집은 좀 크게 그렸는데 이는 루벤스가 특히 복장에 매료됐기 때문이다. 위에서 아래까지 선이 소용돌이치듯 내려오며 옷감의 반짝임까지 살렸다.
○ 《조선일보》 기사. 2003년 12월 10일.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J. 폴 게티 박물관이 소장중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드로잉. 1983년 11월 29일 영국의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첫 공개되었고 해당 경매장에서 32만 4천 파운드, 한화 약 6억 6천만원에 낙찰되었다. 이 금액은 당시 드로잉 경매 사상 최고가를 갱신한 금액으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조선일보》 기사. 2003년 12월 10일.
크기 38.4cm×23.5cm의 드로잉 작품으로, 짙은 회색의 초크로 그린 소묘화로 양쪽 광대뼈 부근에 엷은 붉은 색깔을 칠한 것이 특징. 그리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의 화풍을 즐기던 루벤스가 드로잉으로 그린 작품이라는 점도 주목받았다.
2. 조선 남자를 그린 그림?
1617년 정도에 스페인령 네덜란드[2] 안트베르펜에서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망건과 도포를 걸친 모습이 특징이다. 1617년 즈음이라면, 흔히 조선에 상륙한 최초의 유럽인으로 알려진 박연이 조선에 상륙은 커녕 태어나기도 전인 때이다.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이 작품을 처음 수집하고 조사하던 도중 사진 구석에 조그마한 범선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 배는 위의 작품 사진에서도 찾아볼수 있다. 그림 왼쪽 중단부를 자세히 보면 그리다 만 배가 희미하게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바다를 건너서 온 인물이 아닐까?"하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위의 인물이 누구를 그린 것인지 조사하던 도중 해당 그림속 복장이 한복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름을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한복 입은 남자(Man in Korean Costume)》인 것이다.당시 조선과 유럽은 교류가 없었으므로 루벤스가 어떻게 조선인을 모델로 작품을 그릴 수 있었는지 의문이지만 제대로 된 연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사람이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갔다가 다시 유럽으로 팔려간 노예라는 주장이 있는데, 그렇게 보기엔 너무 옷차림새가 단정하고 풍채가 당당하다.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과 시기적으로 근접하고, 당시 노예시세가 하락했다고 할 정도로 조선인 노예가 많이 풀렸기 때문에 일부가 어떻게 흘러흘러 유럽으로 건너갔을 것이란 추정이다. 이와 관련해서 가장 유력하게 언급되는 인물이 안토니오 꼬레아이다. 오세영의 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의 모델이기도 하지만, 부산대학교 사학과 곽차섭 교수의 책 《조선청년 안토니오 꼬레아 루벤스를 만나다》에서도 이 가설을 택하고 있다. 곽차섭 교수는 이 그림의 인물은 철릭을 입은 조선인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이 주장에 따르면 《한복 입은 남자》의 모델은 임진왜란 때 일본에 끌려간 뒤 피렌체 상인 카를레티가 구매해서 로마로 데려온 안토니오 코레아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명숙과 왈라벤은 노예로 팔려와 유럽에 온 한국인이 그와 같은 벼슬아치 복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임을 지적한다. 그보다는 일본에서 일했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무역사무소 소장 자크 스펙스(Jacques Specx; 1585 ~ 1652)가 고용했던 한국인 수종(隨從)이 1615년경 로마가 아닌 네덜란드에 온 것을 스케치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그 외에 다른 가설로는 명나라나 일본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가 보내온 선교 보고서에 조선인의 그림이 실렸고 루벤스는 이를 묘사한 것이라는 설과, 아예 이 옷이 한복이 아니라 명나라에서 돌아온 선교사의 명나라 복식을 보고 드로잉한 그림이라는 설도 존재한다.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주장으로는 루벤스가 외교관을 했다는 이력을 들어 그가 아시아 지역의 외교를 다녀오고 난 후 아시아 의상에 깊은 감명을 얻어 자신의 그림에 아시아적 요소를 넣기 시작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위의 드로잉을 전시하고 있는 미국의 전시관에서 큐레이터는 작품을 소개할 때 이러한 주장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자신의 아시아 외교의 성과를 축하하기 위해, 기념으로 아시아 의상을 입힌 유럽의 제사장 및 해외 대사를 그렸다는 것이다. 다른 드로잉 작품으로는 중국 의상을 입힌 작품이 있는데 당시 유럽의 제사장 모습과 비슷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는 평소 루벤스가 해외 문화에 큰 관심이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3. 진실: 명나라 남자를 그린 그림
최근 관련 학계에서는 이 그림의 주인공이 1600년 네덜란드를 방문했던 '흥포(興浦)'라는 명나라 상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기사, 논문) 한복과 명나라 시대 한푸의 유사성 때문에 약 80여년간 모두 착각하고 있었던 셈. 그림의 주인공이 네덜란드를 직접 방문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어떻게 동양 복식을 루벤스가 알고 그릴 수 있었냐에 대한 미스터리도 이것으로 해결되었다.또 한 가지 증거를 뽑자면 남자가 입은 의관에 비치는 상투의 모양이 조선의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조선식 상투는 청대 이전 한족처럼 머리를 묶어 고정하는 형태이기는 하나 상투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정수리 숱을 쳐서(이걸 "배코친다"고 한다) 그 위에 상투를 틀었기 때문에[3] 크기가 저렇게 크게 나오지 않는다. 청나라 이후 한족들은 만주족의 강요로 변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청대 이전의 상투 트는 법이 실전되긴 했으나 저 남자의 상투크기는 조선시대 인물화나 풍속화에 나오는 상투와 비교했을 때 지나치게 크다.
4. 또다른 작품?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1618년. |
복식에 나타난 망건과 끈을 맨 신발, 도포의 구체적인 묘사를 보건대, 어찌되었건 루벤스가 최소한 한복을 입은 인물을 직간접적으로 보기는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많다. 동시대 중국 등 아시아권의 복장을 뭉뚱그려 표현했다고만 볼 수는 없는 것이, 이미 아시아권도 나라별로 복식과 장식 등이 특징에 따라 분류되던 시기이다. 그림의 중심인물인 하비에르의 행적상 세계 여러나라 인종들을 묘사하고 있는데, 저 인물의 바로 옆에 있는 남미 멕시코계 인물 또한 그러한 작가의 의도에서 그려졌다 볼 수 있다.
성 프란시스코 하비에르의 기적. 모델로 |
5. 대중 매체
5.1. 소설
작가 이상훈[5]에 의해 2014년 동명의 소설로 출판되었다.해당 작품은 장영실의 실종 이후의 행적을 한복 입은 남자와 연결시킨 것이 특징.
웹소설 명군이 되어보세! 에서는 광해군이 역사가 개변되는 과정에서 견서사로 유럽을 방문했다가 가톨릭에 귀의하여 후일 추기경까지 오르는데 노년의 광해군이 루벤스를 불러다 그리게 한 그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