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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사키 아유미/활동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하마사키 아유미
1. 개요2. 활동
2.1. 1993년~1997년2.2. 1998년~2000년2.3. 2001년~2004년2.4. 2005년~2008년2.5. 2009년~2011년2.6. 2012년~2014년2.7. 2015년~2019년2.8. 2020년~현재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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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사키 아유미의 활동을 서술한 문서.

2. 활동

2.1. 1993년~1997년

7살부터 하마사키 쿠루미라는 가명으로 고향 후쿠오카에서 지역 모델로 활동하였다. 1993년 중학교 2학년 때 선뮤직 오디션 합격 후 도쿄로 상경하면서 〈트윈즈 교사〉 출연을 통해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저예산 드라마, 용호의 권 애니판 유리 사카자키의 성우를 맡는 등 무명 생활을 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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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호리코시 고등학교에 입학 후 그라비아 아이돌로 활동한다. 이 시기부터 하마사키 아유미로 활동하게 되었고, 노지마 신지 각본에 소리마치 타카시, 카토리 싱고 주연의 TBS 드라마 〈미성년〉에도 출연하였다. 배우 생활이 아무런 성과도 없는 줄 아는 팬들도 많은데 〈미성년〉은 비록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평균 시청률 20%의 히트작이었다. 하마사키 본인이 회고하기로도, 당시 스케줄이 많았고 가난했지만 이 시기 재정적인 상황도 보통 정도로 올라올 정도였다고 한다.

1995년에는 DOHZI-T가 프로듀스한 앨범을 발매하지만 소속사가 시키는 대로 녹음하고 내놓았을 뿐 좋은 성적을 얻지 못한다. 같은 해 〈해변의 신밧드〉라는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해 평론가들로부터 연기에도 호평을 받고 배우로서도 가능성을 보여줬지만 독립 퀴어 영화라서 크게 주목받진 못했다. 이 시기 코무로 테츠야의 방송인 TK MUSIC CLAMP에 출연하여 나카야마 미호의 〈JINGI・愛してもらいます〉를 부른 적이 있다. 영상

잦은 결석으로 1995년 호리코시 고등학교를 자퇴한 하마사키는 자신을 쓸모 없는 잡동사니라고 생각하면서 시부야 거리를 방황했다. 그러던 어느 겨울 에이벡스가 경영하던 클럽 벨파레의 단골이 되어 VIP룸에서 에이벡스 프로듀서인 맥스 마츠우라를 만나 가까워진다. 때마침 아유가 선뮤직 프로덕션과 계약이 만료되자 마츠우라는 아유에게 "넌 노래도 할 수 있고 작사도 할 수 있어" 라며 영입을 제안, 가수 데뷔를 제의받는다. 이후 1997년 뉴욕으로 가서 3개월간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다. 보컬 트레이닝을 완수하자 마츠우라는 정식 계약을 제안했고 빠른 속도로 4월 8일 데뷔를 확정지었다.

준비 과정에서 마츠우라는 아유의 작사 실력이 뛰어다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 불릴 모든 곡에 아유가 가삿말을 붙이기를 요구했다. 아유도 승낙하여 열심히 가사를 작사하며 데뷔 준비가 착착 진행되던 시점에, 아유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정신적으로 무너질 뻔 했지만 그녀의 곁을 마츠우라가 지키며 가수 데뷔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3]

2.2. 1998년~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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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4월 8일 싱글 〈poker face〉로 하마사키는 가수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본래는 3~4인조로 꾸려지는 밴드의 보컬로 데뷔할 예정이었으나 아유 본인 성격상 솔로 데뷔를 원했고 프로듀서가 이를 받아들여 솔로로 데뷔하게 된 것이다.

초기 싱글 〈poker face〉와 〈YOU〉는 오리콘 차트 20위로 부진을 면치 못했으나 에이벡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YOU〉로 처음 뮤직스테이션에 출연해 이름을 알리고, 3번째 싱글 〈Trust〉가 유명 화장품 회사 비세의 CM송으로 타이업이 되면서 점점 유명세를 탔다. 5번째 싱글인 〈Depend on you〉가 라디오 방송에 꾸준히 리퀘스트되면서 본격적인 상승세는 시작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싱글 〈Trust〉가 9위에 오르자 축하 파티를 할 정도로 소박한 출발이었다. 당시 주변 음악 관계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아유미는 절대 팔리지 않을 거야"라고 단언했고 본인조차 슈퍼스타가 될 거라는 생각조차 못 했던 상황이지만 에이벡스는 싱글을 2개월 간격으로 발표했고, 하마사키가 직접 쓴 가사 역시 좋은 평가를 받으며 빠른 속도로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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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ars' (1999)

해가 지나 1999년 1월 1일 첫 정규앨범 〈A Song for XX〉가 발매된다. 리드곡 〈A Song for XX〉의 가사가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어 인기를 끌었고 에이벡스도 이 앨범을 열띠게 홍보한 결과, 결국 신인 가수로서는 이례적으로 오리콘 차트 5주 1위[4] 및 밀리언을 달성하면서 진정한 스타 대열에 올라서게 된다.[5] 데뷔 앨범의 성공으로 31회 유선대상부문 신인상과 골드디스크 신인상을 받게 되면서 전성기의 막이 열린다.

층쿠가 작곡한 7집 싱글 〈LOVE ~Destiny~〉가 드라마 주제곡으로 쓰이면서 첫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하였다. 7월 14일 발매된 〈Boys & Girls〉는 당시 대세였던 스즈키 아미와 동시발매를 해서 관심이 쏠렸으나 밀리언을 돌파하였고[6] 노래 자체도 대히트를 치면서 NHK 홍백가합전에 첫 진출을 하게 된다. 한달 후 발매된 4A면 싱글 〈A〉는 16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면서 그녀의 싱글들 중 최고 판매량을 기록한 싱글이 되었다. 전작의 〈Boys & Girls〉부터 〈A〉까지 여성 솔로로서는 매우 오랜만에 오리콘 싱글 차트에서 5주 연속 1위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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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RREAL' (2000)

11월 10일에는 2집 앨범 〈LOVEppears〉와 30만장 한정 싱글 〈appears〉가 동시 발매되었다. 머리카락으로 가슴을 가린 자켓도 화제가 되었다. 〈LOVEppears〉는 더블 밀리언을 달성하였고, 이 무렵부터 뛰어난 패션 스타일과 섬세한 가사로 여고생들에게 추앙받으며 '패션 리더', '네일아트의 여왕' 이라는 다양한 호칭이 생겨났다. 광고계에서는 이 현상을 통칭 '아유 효과' 라고 하였는데 비세 마스카라가 2일만에 50만개나 팔려나갔다고 한다. 3집 〈Duty〉의 재킷에서 입었던 표범 무늬도 유행시켰으며 〈evolution〉 PV에 달고 온 여우 꼬리는 500만 개 이상이나 팔리는 등 대중의 기호를 이끌어내었다.

일본 가요계에 잊지 못할 사건인 우타다 히카루의 정규앨범과 하마사키 아유미의 〈A BEST〉 동시 발매 대결에서도 하마사키는 앨범 초동 역대 2위, 여가수&베스트 앨범으로서는 역대 1위, 총 판매량 429만 장을 세우면서 역대 판매량 6위를 하는 등 전성기의 절정을 찍었다.

여가수로서는 최초로 개최한 돔 투어와 스타디움 투어도 성황리에 완수해냈지만 돔 투어 개최 전부터 왼쪽 귀 청력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2.3. 2001년~2004년

2000년 연말 발매한 싱글 〈M〉에서는 하마사키가 처음 작곡을 맡았다. 발매 당초에는 하마사키 아유미가 작곡하였다는 사실을 은폐하고 'CREA'[7]라는 가명으로 발표하였다. 이 싱글이 13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면서 하마사키 아유미는 아티스트의 반열에 들어선다.

이후 2002년 1월 1일에 발매된 4집 앨범 〈I am...〉은 그녀의 커리어에 있어서 전환점으로 작용하였다. 하마사키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앨범 수록곡들에 집중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I am...'은 인간의 고독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전작들과는 다르게 더욱 넓은 주제들을 본인의 세계관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점에 있어서 유독 의미있는 앨범이다. 이 앨범의 가사들은 대부분 평화와 신념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인데, 이는 9.11 테러에서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을 옅볼 수 있는 노래는 대표적으로 'A Song is Born'. 전곡 작곡의 성과도 걸맞게 4집은 더블 밀리언을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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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volution' (2001)

01-02 카운트다운 악성 루머 사건과 갑작스레 얻은 인기에 대한 부정적 영향으로 안티가 증가하긴 했으나 2002년 3월에는 싱가포르에서 콘서트를 개최하고 7월 24일 발매한 싱글 〈H〉는 2002년 발매된 싱글 중 유일하게 밀리언을 기록하는 등 여전히 하마사키는 슈퍼스타로 군림했다. 11월에는 독일의 'Drizzly'라는 레이블에서 '아유'라는 명의로 독일의 DJ 페리 코스텐이 작곡한 싱글 〈Connected〉를 발매했다.

9월 26일에는 싱글 〈Voyage〉가 발매되었고, 싱글 발매와 동시에 촬영된 단편 영화 〈달에 지다(月に沈む)〉가 시부야에 위치한 소극장에서 상영되었다. 동년 12월에는 정규 5집 〈RAINBOW〉가 발매되었다. 〈RAINBOW〉는 하마사키가 최초로 영어로 작사한 앨범인데, 이는 그녀가 2002년 MTV Asia Music Awards 공연 이후 세계적으로 본인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내린 결정이라고.

2002년 10월 12일에는 자신의 이름을 건 심야 방송 〈<AYU READY?(아유레디?)〉의 MC가 되었는데 심야 시간대에 방영했는데도 불구하고 보아, 나카모리 아키나, 카고 아이 등이 출연하며 시청률과 반응이 좋았다. 하지만 약 2년 후인 2004년 3월 22일, 본인의 스케줄 문제로 이 프로그램은 종영되었다.

이후 BOUNCEBACK나 유쿠미 테츠야 등 새로운 작곡가들과 작업한 미니 앨범 〈Memorial address〉, 6집 앨범 〈MY STORY〉가 연속으로 밀리언을 기록하였다. 2003년 12월 발매된 미니 1집 〈Memorial address〉는 일본 여가수 최초로 미니 앨범 밀리언 인증을 받으며 성공가도를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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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name's WOMEN' (2004)

이 기간 동안 하마사키는 2001년 〈Dearest〉, 2002년 〈Voyage〉, 2003년 〈No way to say〉로 일본 레코드 대상 3연패를 달성하는 등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웠다.[8] 레코대 시상 사회자를 수십년 동안 맡았던 방송인 사카이 마사아키는 후에 레코대 60주년 특집 방송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수상자로 하마사키를 거론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시기부터 하마사키 아유미는 본인을 하나의 상품으로 취급하는 소속사와 '을'의 입지에 놓여있는 자신에 대하여 굉장한 회의감을 느꼈다. 〈A BEST〉 이후 정규 4집, 5집 모두가 그녀를 재촉해서 나온 결과물이었기에 정작 본인은 아티스트로서의 만족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하마사키의 의견이 반영된 정규 6집 〈MY STORY〉는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MY STORY〉는 정해진 주제 없이 만들어진 앨범이기 때문에 대중들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전작들과는 달리 남들에게도 쉽사리 인정받을 수 있는 가사가 아니라 커리어를 회상하거나 개인적인 감정을 토로하는 자전적 가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가사뿐만이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본인이 좋아했던 록 음악을 심도있게 파고들면서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앨범을 제작하였다. 〈MY STORY〉 앨범은 하마사키 아유미가 최초로 만족감을 느낀 결과물이라고 한다.

2.4. 2005년~2008년

7집 앨범 〈missunderstood〉는 Sweetbox와의 공동 작업으로 화제를 모았지만 스타일의 변화와 에이벡스의 삽질로 인해 앨범 연속 밀리언 기록이 깨지고 말았다. 선행 싱글이었던 〈HEAVEN〉과 〈STEP you〉 등 곡은 오히려 예전보다 인기가 더 좋았으나 콜라보곡 〈Bold & Delicious〉가 반응이 좋지 않았던 것. 이 싱글의 부정적인 반응은 7집 앨범의 실패를 이끌었다.[9]HEAVEN〉이 하마사키의 명곡 라인업에 빠지지 않는 곡임을 고려해보면 7집 발매 전략이 정말 아쉬웠음을 알 수 있다.[10]

2007년에는 지병으로 왼쪽 귀 청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사실을 발표하며 팬들에게 '오른쪽 귀가 멀 때까지 열심히 하겠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전에도 성대결절로 인해 수술을 했지만, 이 즈음 매년 라이브를 진행하는 등 너무 무리하게 활동한 나머지 목 상태가 심하게 안 좋아졌다.

이듬해 12월에는 정규 8집 〈Secret〉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원래 미니 앨범으로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갑작스럽게 영감이 떠오르면서 5곡이 더 추가되었다고 한다. 앨범이 발매되기 전에 수록곡 〈1 LOVE〉와 〈JEWEL〉이 2A 싱글로 발매될 예정이었으나 취소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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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WEL' (2006)

이 중 〈JEWEL〉은 하마사키가 2006년 연말 엠스테에서만 네 번이나 불렀고 NHK 홍백가합전도 나왔을 정도라 대중들에게 반응이 정말 좋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Secret〉은 더욱 대중적인 접근방식을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작의 부진함을 만회하지 못했다.

2007년 6년만의 베스트앨범인 〈A BEST 2〉를 블랙, 화이트의 두 가지 버전으로 발매하였는데, 〈A BEST 2 ~WHITE~〉와 〈A BEST 2 ~BLACK~〉이 각각 1,2위를 나란히 기록하면서 36년 반만에 여성 아티스트로써 두 번째로 차트 1,2위를 독점하는 기록을 갖게 되었다. 또한 동시 릴리즈로 인한 1,2위 독점은 사상 최초의 쾌거였다.

4월부터는 8집 앨범의 투어이자, 자신의 첫 아시아 투어인 〈ayumi hamasaki ASIA TOUR 2007 ~Tour of Secret~〉 투어를 진행해 성공적으로 마쳤다. 2007년 7월에는 41번째 싱글 〈glitter/fated〉가 발매되었다. 이 싱글의 뮤직비디오는 〈距愛 ~Distance Love~〉라는 제목의 단편 영화 형식으로 제작되었으며, 홍콩의 유명 배우 여문락이 출연하여 화제가 되었다. 42번째 싱글 〈talkin' 2 myself〉을 시작으로 음악 스타일을 락 노선으로 변경해 발라드에 열광하던 팬들에게 충격을 주기도 했다.

앨범에서 마지막으로 발매된 싱글이자 첫 번째 디지털 싱글이기도 한 〈Together When...〉은 착신 다운로드 300만건 이상이라는 성과를 거둬 그 해 NHK 홍백가합전 출전곡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11] 9집 〈GUILTY〉에서는 코부쿠로의 〈5296〉 앨범에 밀려 99년부터 이어져 오던 연속 1위 기록이 무너졌다. 10집 〈NEXT LEVEL〉로 다시 1위를 되찾았지만 앨범은 판매량 37만장으로 저조한 판매량을 기록했다. 다만 아유치고 부진한 판매량일 뿐 1집부터 히트했던 데뷔 10년차 가수임을 감안하면 아주 선방한 편.

이 시기에 접어들어 코다 쿠미오오츠카 아이, 나카시마 미카 등의 후배 여가수들이 자리를 잡으며 하마사키는 원탑의 위치는 아니게 되었지만 꾸준히 탑가수의 입지를 유지했다. 매년 〈BLUE BIRD〉, 〈Together When...〉, 〈Days〉, 〈You were...〉 등의 히트곡을 배출했고 2007년부터 2009년 사이의 기간에는 발매하는 싱글마다 디지털 다운로드 플래티넘(25만 건 이상)을 기록하는 등 대중들의 관심도 지속되었다. 최전성기는 지났어도 꾸준히 수요가 많은 "믿고 듣는 가수"가 된 것.[12]

2008년에는 데뷔 10주년을 맞아 홍콩, 상하이, 대만을 순회하는 아시아 투어 공연을 열었다.

2.5. 2009년~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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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dy Dynamite' (2010)

2010년에는 〈Rock'n'Roll Circus〉과 〈Love songs〉 두 앨범을 발매했다. 2010년대에 접어들자 플래티넘 인증을 받은 곡은 2011년 발매한 〈FIVE〉의 타이틀 〈progress〉가 전부인 등 대중들의 관심이 다소 떨어지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Love songs〉 앨범의 타이틀 트랙 〈Love song〉은 싱글로 발매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10만 다운로드를 인증받으며 본인의 네임밸류가 여전함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한편 이 앨범은 코무로 테츠야의 복귀작이기도 했는데, 한국 팬들 사이에서는 호불호가 갈렸다.

2011년 1월 1일, 싱글 〈L〉의 수록곡인 〈Virgin Road〉의 PV 촬영을 계기로 알게 된 오스트리아 출신 배우 마뉴엘 슈바르츠와 결혼했다. 하마사키는 "결혼 이후에도 가수 활동은 계속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11년 3월 도호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트위터에 긴급대피법을 올리기도 했으며 음반 수익금을 난민들을 위해 기부하였다.

매년 2장 이상의 싱글과 1장의 정규 앨범을 발매하던 것에 비해 2011년에는 미니 앨범인 〈FIVE〉 1장만을 발매하였다. 비록 공연과 잡지 화보 등 외부 활동은 활발했지만 이전에 비하면 소극적인 행보였다. 〈FIVE〉 앨범은 팬들로부터는 좋은 평을 받았지만 대중들로부터는 큰 관심을 받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이 시기 출연이 예정되었던 뮤직 스테이션에 갑자기 출연을 취소하는 등[13] 음악 프로그램 출연도 끊겨 제대로 된 홍보도 진행하지 못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하마사키는 2013년 슈퍼 라이브까지 2년간 엠스테에 출연하지 못했다. 그와는 별개로 앨범의 프로모션 트랙인 〈progress〉는 비디오 게임 테일즈 오브 엑실리아의 테마송으로 사용되어 2주 동안 오리콘 차트 1위를 지켰고 앨범 역시 최종적으로 22만장을 팔아 일본 레코드 협회로부터 골드 인증을 받았다.

이렇게 조금씩 하락세를 타기는 했지만, 하마사키 아유미는 여전히 J-POP 대표 여가수였다. 방송 출연 등의 대접도 좋았고 대중들의 이미지도 크게 나쁘지 않았다. 오리콘 차트에서도 계속 1위였으며 음반 총 판매량에서도 사잔 올 스타즈를 누르고 3위에 올랐다. 50번째로 발매한 싱글 〈L〉이 오리콘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하면서 마츠다 세이코가 〈여행은 프리지아〉로 세웠던 여성 아티스트 24작 연속 1위 기록을 깨뜨리는 등 기록 갱신을 이어갔다.[14]

2.6. 2012년~2014년

2012년 1월 16일, 하마사키는 남편 마뉴엘 슈바르츠와 결혼 1년만에 이혼을 발표하였다. 언론에 공개된 바로는 하마사키 측에서 이혼을 요구했다고 알려졌으며 정확한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각자의 활동으로 인해 결혼 직후부터 이어진 긴 별거생활이 원인으로 추측되고 있다.[15]

이혼 이후인 2012년 11월 댄서 우치야마 마로카와 열애설이 났다. 그러나 당시 우치야마는 아내와의 이혼 재판 중이었고 다른 여자와의 사이에 사생아가 있는 것이 발각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해 하마사키와는 연애가 알려지고 나서 약 3개월 만에 파국했다.

2012년 8월 8일, 베스트 앨범 〈A SUMMER BEST〉가 발매되었다. 이 베스트 앨범의 발매로 하마사키의 음반 총 매출 매수가 5000만 장을 돌파했다. B'z, Mr. Children에 이어 5년 5개월 만의 세 번째 기록 갱신이며 매출 매수가 5000만장을 넘은 것은 솔로 여성 아티스트로서 사상 최초의 쾌거였다.

2013년 12월에는 미국인 의대생 타이슨 보드킨(Tyson Bodkin)과 약혼한 것이 알려졌는데, 2년간의 버라이어티한 사생활을 지켜본 대중들의 시선은 싱글 발매 전의 화제 조성으로 보는 등 차가웠다. 보드킨과는 2014년 결혼해 2016년 9월 이혼을 발표했다.

이전의 하마사키는 굉장히 사생활 관리가 투철한 이미지로 이성 관계도 나가세 토모야와의 연애 정도가 고작이었기에 갑작스러운 연속 사생활 스캔들은 더욱 비난받게 되었다. 음악적인 면과 자기관리적 면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운 모습이 이어졌기 때문에 대중의 눈초리도 이전에 비해 차가워진 것.

이 시기 3장의 음반을 발매하였으나 EDM과 재즈를 시도한 〈Party Queen〉은 본인의 창법과 맞지 않는 EDM으로 팬들을 충격으로 몰고 갔다. 13집 〈LOVE again〉은 이 실패를 지나치게 의식한 듯 전형적인 J팝 스타일로 후퇴해버렸지만, 14집 〈Colours〉는 다시 구미권 EDM 프로듀서들을 불러와서 작업하는 등 음악적으로 갈피를 못 잡는 행보를 보였다. 무엇보다 음악적으로 호평을 받은 곡이 한 곡도 나오지 않았고 음반 판매량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떨어져갔다. 음원에서도 2013년 이후 발매한 곡들은 골드 인증(10만 건 DL)조차도 못 받을 정도로 대중들의 반응이 차가웠다.

가창력 면에서도 이미 2009년 무렵부터 목 상태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으나, 이 시기에 다다라서는 목소리가 복구 불능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라이브의 질적 하락이 심했고[16] 무릎에 물이 차 정기적으로 물을 빼야 할 만큼 건강이 전반적으로 나빠져 사실상 활동은 콘서트 투어를 제외하고 줄어들었다.

2014년 자신의 트위터에서 NHK 홍백가합전의 졸업을 발표했다. 데뷔 이후 15년 연속으로 출전해 사상 최다인 6회 톱 타자를 맡은 프로그램 공로자였기 때문에 전형 누락을 사전에 연락받은 것. 하마사키 자신도 '하나의 끝'이라고 받아들이고 콘서트와 CD 활동에 더욱 매진하게 되었다.

2.7. 2015년~2019년

이 시기 이후 하마사키는 콘서트형 가수로 노선을 전환했다. 건재한 팬덤 덕분에 콘서트 표도 잘 팔리고 음반도 꽤 팔리는 편이며 콘서트도 꾸준히 아레나와 홀 사이즈를 병행해 진행하고 있다.

음반 판매량 역시 계속 하락세였지만 〈A ONE〉 앨범과 〈MADE IN J(A)PAN〉 앨범은 4~5만 장의 나쁘지 않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솔로 여가수 시장의 전반적 침체를 감안하면 선방한 편. 〈A ONE〉 앨범에서는 중화권을 노린 것인지 싱가포르의 가수 임준걸이 쓴 노래 〈The GIFT〉로 아시아 차트를 석권했다. 2011년 펑크 사건 이후 끊겼던 뮤직 스테이션 출연도 재개되어 신곡 프로모도 돌고 2016년 3월 졸업송 SP에서는 대표곡 〈A Song for XX〉를 불렀다. 2015년, 나카마 유키에 주연의 NHK 20부작 드라마 〈미녀와 남자〉 주제가로 타이업된 〈Step by step〉은 레코초쿠 디지털 차트 2위를 하는 등 나쁘지 않은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 여세를 몰아 그해 여름 발매한 미니앨범 〈sixxxxxx〉는 오랜만에 데일리 차트 1위로 데뷔하기도 했다.[17] 앨범에는 임준걸에 이어 대만 보이그룹인 Spexial과의 콜라보곡 〈Sayonara〉가 수록되어 중화권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한쪽 귀의 청력 상실 및 목 상태의 악화로 전성기와 대조되어 안타까운 모습이 비춰지고 있지만 투어 성적은 일본에서 손에 꼽힐 정도로 수익이 좋고, 관객들의 평가가 좋다는 점이 하마사키를 롱런하게 해주는 힘이 되었다. 많은 솔로 여가수들이 점점 콘서트 투어의 비중을 늘려가는 트렌드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다. 마침 아유는 이미 전성기 시절부터 투어에 대한 평가가 높아 일반인들도 '하마사키 콘서트는 한 번쯤 가볼 만 하다'는 말이 나오는 편이었다. 더군다나 하마사키의 코어팬은 여전히 많기에 음반수익보다는 콘서트 투어로 수익을 내는 것으로 마케팅을 바꾼 것이라고 보면 된다.

2015년에는 일본 국내 활동에 주력해 정규 앨범 〈A ONE〉의 수록곡들을 중심으로 콘서트 투어 〈Cirque de Minuit〉를 개최했다. 총 30곡 가까이 되는 곡으로 화려한 투어를 했으며 가을부터 12년만에 개최한 팬클럽 한정 라이브 투어를 하는 등 팬들에게도 많이 신경을 쓰는 모습.

2017년 11월 19일 의사로부터 과로로 인한 급성 기관지염이라는 진단을 받아 콘서트가 급거 취소되었다. 공연 시작 20분 전에 콘서트 취소가 공지되어 이미 관객들이 모두 입장한 후라 논란이 있었다. # 난조였던 목 상태로 17년 5월부터 19년 2월까지 매달 라이브를 잡아 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2014년 싱가포르에서 한 인터뷰에서 "그만둘 것이라면 진작 그랬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을 볼 때 본인의 의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018년 8월 2년 2개월 만에 음반을 발표했다. 디지털 싱글 〈We are the QUEENS〉를 포함해 5곡이 수록되었다. 5곡만 들어있음에도 미니 앨범이 아닌 앨범이라고 홍보했는데, 사실 가격도 미니 앨범 가격이었으므로 논란이 될 소지는 없었다. 다만 5곡 중 2곡이 이미 1~2년 전에 발표된 곡이어서 노래보다는 콘서트 영상이 수록된 DVD 사양이 주가 되는 앨범. 그러니 사실상 2016년 〈MADE IN JAPAN〉 이후 음반 활동을 쉬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몇 년 전부터 판매량이 급감하다 보니 앨범으로는 수익 면에서 큰 기대를 하기 어렵다는 판단인 듯.

2019년 데뷔 20주년을 기념해 자신의 자전적 소설 〈M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를 발매하였다. 그런데 이 소설의 내용이 프로듀서 마츠우라와의 연애 스토리를 비롯해 이와 엮인 히트곡 가사의 비하인드 등이 담겨있어 또 한 번 논란이 되었다. 소설은 나온 직후인 2020년 초 드라마화되었는데, 주연으로 에이벡스가 밀고 있는 신인 안자이 카렌이 발탁되면서 사실 하마사키를 이용해서 안자이 카렌을 밀기 위한 에이벡스의 전략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2.8. 2020년~현재

2020년 1월 2일에는 비밀리에 2019년 11월 첫째 아들을 출산했다고 밝혔다. 아이의 아버지는 연하의 일반 남성이며 결혼은 하지 않는다고. 이로서 일본 헤이세이 시대를 풍미한 3대 디바[18] 모두 엄마가 되었다.

하마사키가 11월 출산 직후 바로 12월 투어에 올라 화제가 되자 한 일본 남성 트위터리안이 '애 낳고 저렇게 바로 활동할 수 있는데 여자들은 게으름을 피운다'는 개념상실 트윗을 써서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하마사키는 본인의 인스타그램에서 '나의 빠른 복귀는 헤어 코디 스탭들과 병원의 관리와 아이 돌봐주는 사람이 24시간 케어해주는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여자들의 출산은 매우 힘든 일이며 휴식이 필요하다'라고 일갈했다. #

2020년 7월 5일 싱글 〈オヒアの木 (오히아의 나무)〉가 발매되었다. 아유의 곡 중에서는 최초로 영어가 아닌 일본어 제목을 차용한 곡인데, 올해 1월 발표한 임신 소식과 관련되어 있어 본인과 팬들에게는 의미가 남다를 듯하다. 곡의 가사 또한 하와이의 전설인 오히아 꽃의 이야기를 차용하여 아들에게 보내는 메시지. 드라마 〈M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가 종영한 날에 발매되었고, 2년만에 발표하는 신곡이라 팬들에게는 걱정이 앞섰으나 반응은 이례적으로 좋다. 발매 하루만에 아이튠즈 일간 5위를 차지하고, 레코쵸쿠 데일리 차트에서는 1위를 차지하는 등 8년만에 히트곡을 배출할 기세. 오리콘 데일리 차트에서도 약 5,000여건의 판매량을 기록하여 1위를 차지하였다.

7월 30일 코무로 테츠야가 작곡한 〈Dreamed a Dream〉을 선보였다.

2017년부터 매달마다 이어왔던 콘서트 투어를 2020년에도 이어갈 예정이었지만, 2월부터 진행할 예정이었던 사이고노트러블 투어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전부 취소되었다. 이에 사이고노트러블 투어의 마지막 공연을 2020년 10월 2일 온라인 콘서트 형태로 개최했다. 2월부터 계속 공연을 쉬어 왔던 덕분인지 목 상태 역시 많이 회복되었다는 좋은 반응을 받았다. 2017년~2018년에는 후보정으로도 목 상태 악화가 가려지지 않았던 것과는 대비되는 대목.

콘서트 종료 직후 공식 팬클럽 사이트 등을 통해 둘째의 임신을 발표했다. 첫째에 이어 둘째 아이의 아버지 역시 같은 사람인 것으로 추정된다. #1 #2

2021년 1월 신곡 〈Pray For You〉가 카운트다운 콘서트 2020-2021에서 공개될 예정이었으나 콘서트 취소의 여파로 인하여 발매가 취소되었다.

그리고 4월 8일, 데뷔 23주년을 기념하는 디지털 싱글 〈23rd Monster〉를 발표했다. 또한 2번째 발라드 베스트 앨범인 〈A BALLADS 2〉가 발매됐다. 전작인 〈A BALLADS〉 이후에 발매된 발라드 히트곡이 30곡 수록되었고, 2003년 음악 프로그램에서만 피로했던 〈春よ、来い〉가 2021년 버전으로 수록되었다.

2021년 5월 1일, 둘째 아이의 출산을 발표했다. 정확한 출산 시기 및 성별 등의 정보는 공개하지 않았다.

2022년 4월 22일에는 데뷔 24주년을 기념하는 디지털 싱글 〈Nonfiction〉이 발매되었다.

2022년 11월 나고야 콘서트 직후 과민성 쇼크를 일으켜 병원으로 긴급 이송, 일시적으로 의식 불명이 되었지만 이후 회복했다.

2023년 1월 25일, 6년 반만의 오리지널 앨범 〈Remember you〉'를 발매했다. 오리콘 차트 6위로 54번째로 탑10에 진입한 앨범이 되었으며, 앨범 통산 TOP10 진입 획득 작품 수는 역대 단독 1위가 되었다.

2023년 4월 8일, 국립 요요기 경기장에서 데뷔 25주년 라이브를 개최하는 한편 하마사키를 대표하는 장소인 시부야 109 외벽에도 25주년 기념 포스터가 약 1달간 게재되었다.


[1] 용호의 권 애니판 중 DVD로 나온 것은 권리 문제 때문에 하마사키 아유미가 아닌 다른 성우로 교체되었으며 하마사키는 이후 용호의 권 2 실사 CM에서도 유리 역을 연기했다.[2] 다만 CM상에서 등장하는 유리는 익숙한 에어로빅 도복+댕기머리가 아닌 사복 차림이다.[3] 자서전을 통해 알려진 바로는 이 무렵부터 마츠우라가 전 아내와 이혼하고 정식 교제를 시작한다.[4] 연속은 아님[5] 〈A Song for XX〉는 현재까지도 하마사키의 시그니처 곡으로 많은 팬들이 이 곡에 공감해 팬이 되었고, 〈A BEST〉 앨범에도 싱글 곡이 아님에도 재녹음되어 1번 트랙으로 수록될 만큼 상징적인 곡이다.[6] 1주차 스즈키 1위, 2주차부터 하마사키가 역전해 3주 연속 1위[7] 아유의 강아지 이름에서 따온 예명. 이 이름의 강아지는 죽고 없다.[8] 이 기록은 EXILE이 2008년, 2009년, 2010년 3연패로 타이기록을 세웠다.[9] 물론 87만장 이상을 판매해 상업적으로 실패한 앨범은 아니지만 2006년 당시에는 하마사키 아유미 정규 앨범 중 최초로 밀리언을 달성하지 못해 비관적인 여론이 형성되어 있었다.[10]Bold & Delicious〉는 당시 '보루데리 쇼크'라는 단어까지 생길 정도로 팬들과 대중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11] 사실상 이 싱글의 히트가 앨범 판매량을 책임졌다는 의견이 주도적이다.[12] 이 중 〈BLUE BIRD〉는 매년 일본에서 시청자들이 선호하는 여름 노래를 조사할 때마다 순위권 안에 들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사랑받는 대표 여름곡이다.[13] 비행기 시간을 못 맞추었다는 이유였지만 13년차 가수가 자기 관리를 철저히 못했다는 비판도 존재했다.[14] 참고로 남녀 아티스트를 모두 합치면 B'z가 2000년에 25작 연속 1위로 기록을 깼었다. 여성 아티스트로는 AKB48이 2015년 3월 Green Flash로 26작 연속 1위를 세워 하마사키의 기록을 깼다.[15] 하마사키는 도쿄, 슈바르츠는 LA에 거주하고 있었다.[16] 이는 단순히 휴식 부족 등의 문제가 아니라, 아유미의 창법 자체가 복식호흡 등의 보조가 없이 순수하게 성대를 혹사시키는 창법이기 때문이다.[17] 아쉽게도 위클리 1위는 DREAMS COME TRUE의 베스트 앨범.[18] 아무로 나미에, 하마사키 아유미, 우타다 히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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