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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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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Greatest Greeks
※ 2009년 그리스 Skai TV 방송이 그리스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그리스인 100명'을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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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그리스어: Γεώργιος Γεμιστός Πλήθων[1]
라틴어: Georgius Gemistus Pletho
영어: Georgios Gemistos Plethon
출생 1355년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사망 1452년 6월 26일
동로마 제국 모레아 전제군주국 미스트라스
직업 정치가, 철학자
학파 신플라톤주의

1. 개요2. 생애3. 영향4.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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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학자이자 그리스 학자로 후기 동로마 제국의 가장 유명한 철학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서유럽에서 그리스 학문 부흥의 주요 선구자였다. 그는 중세 시대 사람이었지만 고대 헬레니즘 시대의 신플라톤주의를 신봉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플레톤이라는 이름도 플라톤을 매우 존경했기 때문에 자칭한 것이다.

플레톤은 또한 동로마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마적 정체성을 거부하고 '우리는 헬라인(그리스인)'이라고 주장하는 등. 그리스인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로도 유명하다. 그의 정치적 구상은 오래전에 유명무실화된 동로마 제국을 폐기하고 모레아 전제군주국의 미스트라스를 중심으로 한 유토피아적인 플라톤 식 그리스 정부 체제로 동로마 제국을 재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최초의 근대 그리스인'(the first modern Greek)이라고도 불린다.

2. 생애

콘스탄티노폴리스 출신으로 부유하고 교양있는 기독교 가정에서 1355년에 출생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에디르네에서 공부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철학 교사로 일했다.

1380년경에 그는 당시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 무라트 1세의 수도였던 에디르네로 유학하기로 결정했고, 이곳에서 세속주의, 다신교, 이교주의 및 기타 동로마 제국에선 논란이 되는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1365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트 1세에 의해 아드리아노폴리스가 점령된 후 오스만 제국의 수도였던 아드리아노폴리스(에디르네)는 오스만 제국의 학문적 중심지가 되었는데 플레톤은 그 곳에서 공부하면서 동방과 서방의 고전기 학문을 습득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조로아스터교다신교의 추종자였던 것으로 보이는 이들과 함께 공부했다.

그는 기독교를 거부하면서 동로마의 국가 조직이 매우 문제가 많고 비효율적인 교회 행정이 술탄 바예지트 1세와 오스만 제국에 대응할 수 없는 원인이라는 의견을 개진했다. 플레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 자신의 아이디어를 공개적으로 공식 장소에서 발표하여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단 혐의로 고발당한 그가 1393년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청과 기독교계의 표적이 되자 친구인 마누일 2세는 그를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부 모레아 전제군주국에 있는 미스트라스로 보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그는 원로원 의원이었으며, 판사와 같은 다양한 공직을 계속 수행했었기에, 마누일 2세의 아들들인 모레아의 통치자들에게도 신뢰를 받았고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자문위원으로써 자문을 해주었으며 사회, 정부 개혁안을 작성했다.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에 의해 모레아의 최고 행정관이 되었기도 했으며 코린토스의 성벽인 헥사밀리온의 재축조를 주장했다. 사상 자체가 반기독교라 교회의 이단 혐의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황제와 모레아의 통치자들로부터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미스트라스에서 전혀 문제 없이 활동할 수 있었다. 미스트라스에서 그는 학교를 세워 철학, 천문학, 역사, 지리학을 가르치고 책을 저술했으며 많은 고전 작가들의 요약본을 편찬했고 모레아국의 주요 정치가로써 통치자들을 도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플레톤은 콘스탄티노스 11세와도 친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신학과 철학과 같은 학문적인 분야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으나 미스트라스에선 플레톤과 친하게 지냈고 미스트라스의 궁정에서 황제로 즉위한 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도 플레톤의 자손들의 세례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그는 요안니스 8세를 따라 1437년부터 1439년까지 있었던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하면서 이탈리아에 머물렀는데 플라톤의 사상을 서유럽에 다시 소개했지만, 동서 분열을 화해시키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모레아로 돌아온 그는 저술과 학문 연구에 매진했으며 틈틈히 그에게 매료된 이탈리아 지식인들의 방문을 받기도 했다. 이 시기 플레톤은 《법률》[3]을 썼는데, 여기서 그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 문화를 모델로 하고 신플라톤주의, 스토아주의, 이슬람 운명론, 황제 숭배의 요소들을 통합하는 사회적, 정치적 유토피아를 제시했다. 플레톤은 또한 조로아스터교, 천문학, 음악, 역사, 수사학 및 다양한 신학적 주제에 대한 연설과 에세이를 썼다. 그의 거의 모든 글은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문화에 대한 열정적인 헌신과 고대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을 보인다.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끝에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직전인 1452년 6월 26일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며[4] 생몰년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거의 100세 가까이 살아 장수하면서 동로마의 몰락을 지켜보았다. 그의 묘소는 그리스에 없고 이탈리아 리미니에 있는데 1465년에 이탈리아인 추종자들이 그리스에 있던 그의 묘소에서 시신을 탈취해서 그곳에 묻었다고 한다. 자식으로는 디미트리오스와 안드로니코스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또 그의 제자 중에는 베사리온과 게오르기 스콜라리우스[5]가 있었다.

그의 사후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 마르실리오 피치노[6]는 그를 "제2의 플라톤"이라고 불렀다.

3. 영향

동로마 제국의 학자들은 라틴 제국 시대부터 서유럽의 학자들과 교류를 나누었는데 서유럽은 가톨릭 교회와 무슬림을 통해 고대 그리스 철학에 어느 정도 접근할 수 있었지만, 동로마 제국은 서구인들이 이전에 본 적이 없는 많은 문서와 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요안니스 8세와 함께 1437년과 1439년 사이에 피렌체 공의회에 참석했을때 몇몇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의 초대로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점을 강의하기 위해 임시 학교를 세웠다. 플라톤의 저작들 중 그 당시 라틴 서구에서 연구된 것은 거의 없었는데 그는 본질적으로 플라톤의 많은 부분을 서구 세계에 재도입하여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세 후기에 서유럽 사상에 대해 행사하게 된 지배권을 흔들었다. 플레톤은 로마 교회의 신학이 주요 근거로 삼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대해 플라톤적 신학이 우월함을 역설하여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나 기적 등의 교의도 부정했다. 그의 저서들에서 드러나는 플라톤식 이상국가론은 토머스 모어캄파넬라 등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종교적인 문제보다는 신플라톤 철학의 발전에 더 관심을 가졌던 플레톤은 페라라-피렌체 공의회에서 피렌체 인문주의자들에게 그의 논문 "아리스토리스토와 플라톤의 차이에 대하여"를 써서 전달했다 이 작품은 플라톤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이탈리아 인본주의자들을 고양시켰으며 스콜라 철학의 기초를 약화시켰다. 플레톤은 또한 스트라본 지리학을 서양에 소개했고, 프톨레마이오스의 잘못된 지리학 이론을 타도하는 길을 열었다. 따라서 그는 지구의 구성에 대한 르네상스의 개념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의 주요 권위자들 중에 스트라보를 인용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에 간접적으로나마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이탈리아에 있을 동안 많은 이탈리아 학자들과 정치인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에게 피렌체 플라톤 아카데미의 설립 계획에 영감을 주었다. 플레톤과의 대화는 코시모 데 메디치를 매료시켰고 그가 플라톤과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그리스어 필사본을 보존하는 것에 영향을 주었다. 코시모는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이후 그리스 문화 유산의 보존과 현대 세계로의 전승을 촉진했다. 따라서 플레톤은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힌다. 이런 동로마 학문이 서구에게 준 충격은 후일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동로마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망명하면서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불러 일으킨 주요 원동력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그가 보기엔 이상적인 사회는 플라톤의 '공화국' 적인 이상화된 그리스 사회를 구축하는것에 있었다. 모레아인들이 고대 그리스인들의 직계 후손이라고 믿었던 플레톤은 그리스의 전성기헬레니즘 문명을 재창조하기 위해 로마식 보편제국에 대한 생각을 거부했다.

1416년 황제 마누일 2세에게 보낸 상세한 편지와 1423년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그는 일련의 선구적인 제안(농민의 소유가 되도록 땅을 복원하고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공식화했으며 생산뿐만 아니라 농업의 자극, 무역 강화, 행정 개편, 균형 잡힌 과세, 교육에 대한 더 많은 지출, 외국 용병 대신 군대 국유화, 고문 및 신체훼손형 폐지, 동성애자 및 강간범 등의 화형 등을 주장했다. 그는 중산층 교육을 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조언하는 강력한 중앙 집중식 군주제를 구축하고 군대는 납세자의 지원을 받는 전문 그리스 토박이 군인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토지는 공공의 소유가 되어야 하고 모든 생산물의 1/3은 국고에 납부하며 처녀지 경작에 대한 인센티브가 주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사랑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신성하기 때문에 사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플레톤은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그의 해석에 따라 동로마 제국의 구조와 철학을 근본적으로 바꿀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새로운 국교는 이성주의와 논리학과 같은 주제를 통합하여 당시 널리 퍼진 인본주의 사상에 기반을 둔 교리를 통한 그리스신들의 계층적인 판테온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인이나 민족이 그들의 마지막 희망을 잃도록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했던 많은 나라나 민족들이 부활했습니다. 위험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을 때 망설이는 태도는 절대로 허용될 수 없습니다. 폐하가 동의하신다면 이 국가 회복의 사업을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저는 그 일을 정말로 간절히 바랍니다. 특히 다른 사람은 감히 이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지 못한다는 것을 확신하므로 더욱 간절하게 청원 드리는 것입니다.
테오도로스 2세 팔레올로고스에게 올린 시무책 중 일부
물론 마누일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은 기독교의 반발을 염려하고 그의 정책이 너무 급진적이라고 생각해 이런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플레톤은 굉장히 급진주의적인 인물로 여겨졌다.
나는 그가 피렌체에서 머지 않아 세계는 하나의 마음, 하나의 지성으로 하나의 가르침, 하나의 종교를 받아들일 것이라 말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무함마드의 것인가요 그리스도의 것인가요?" 내가 묻자, "둘 다 아니오. 그것은 이교신앙과 그다지 다르지 않을게요." 나는 이 말에 놀라고 그 후로 그를 독사처럼 무서워하여 차마 그를 보거나 듣는 것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또한 그는 죽기 몇 년 전부터 공공연히 "무함마드와 예수는 모두 사멸할 것이며 이 지구에는 곧 하나의 진실한 진리만이 빛나게 되리라"고 말하고 다녔다 들었다. "사람들은 신성에 대해서 각자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이 설파한 가장 훌륭한 이론들을 배워왔고, 그 이론이 그 어느 것보다 정확하고 훌륭하기 때문에 민족적인 호응을 받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리스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 민족적 신학이 곧 철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우주가 제우스에서 비롯되었으며 포세이돈이 창조를 주관하고, 헤라는 존재를 번식시킨다고 설명하는 등 그의 주의는 기독교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스파르타 인근 미스트라스에 비밀 결사까지 만들어 플라톤주의를 가르쳤다.

르네상스 전성기 이탈리아 석학들도 신화를 기독교/도덕적 알레고리로 해석한 판에 아예 유일신교를 부정하고 인류의 지성과 진리만의 곧 인류의 유일한 종교가 될 것이라는 그의 주장은 당대 지식인들 가운데서도 단연 특이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이다.[7]

4. 기타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저서 모레아 기행에서 모레아의 옛 수도 미스트라스를 방문했을 때 플레톤을 높게 평가했다. 그가 보기에 플레톤은 동방의 혼탁한 과도함을 비난하고 절제와 중용, 수량이 아닌 질량을 강조했으며 인간의 열정을 침착하게 응시하는 강단철학자가 아니라 열정과 초조함으로 가득 찬 실천 철학자였다.

카잔차키스는 플레톤의 "전통은 존중되어야 하지만 당대 사람들이 그것을 맹목적으로 따라갈 의무는 없다. 신성, 선악, 정의와 불공정에 대한 인간의 사상은 영원 불변한 것이 아니다. 예언과 계시는 망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의 철학적 성찰만이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 이곳 지상에서의 인간을 자신의 삶은 적극적으로 영위하고 또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 지구는 아름다움 곳, 많은 즐거움을 수여하는 땅이다. 인간은 당연히 미덕과 절제를 발휘하는 가운데 그것을 즐겨야 한다"라는 주장을 인용하고 그의 개혁안을 높게 평가한 후 플레톤을 기리며 그리스 민족의 운명을 개척할 위대한 지도자의 꿈에 대해서 한탄한다.

[1]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은 고전식 발음이고, 중세 발음으로는 "예오르요스 예미스토스 플리손"이 맞다.[2] 베노초 고촐리(Benozzo Gozzoli, 1421~1497)가 이탈리아 피렌체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에 프레스코화로 1459년~1461년에 그린 초상화이다.[3] 플라톤의 저작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4] 일설에는 1454년에 죽었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그는 동로마 제국의 멸망을 보고 생을 마감한 셈이다.[5] 훗날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옌나디오스 2세(Γεννάδιος Β’)로 동로마 멸망 이후 최초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였다. 그는 기독교를 거부하고 아리스토텔레스 대신 플라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그의 옛 스승을 비난했다. 플레톤은 동로마 시민들에게 플라톤의 '국가'를 재건설하고 위대한 휴머니즘의 유토피아를 건설하자고 제안, 이후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던 반면 옌나디오스 2세의 아리스토텔레스 주의는 후에 정교회의 공식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 플라톤 철학을 토대로 하는 모든 교리의 관점에서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발전했다.[6] 플라톤을 깊게 연구해 플라토닉 러브라는 말을 재창조한 인물로 플레톤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가 이후 자신의 플라톤 아카데미에 양자 마르실리오 피치노를 수장으로 임명했다. 피치노는 플라톤의 모든 작품, 플로티누스의 엔네아데스, 그리고 다른 다양한 신플라톤주의 작품들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저명한 메디치가의 후원 아래 피렌체 아카데미를 이끌었으며, 플라톤과 주요 플라톤주의자들의 그리스 원전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해석함으로써 플라톤주의를 서구 유럽으로 귀환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중세 서구 유럽에서 플라톤 저작 가운데 라틴어로 번역된 것은 소수에 불과했다. 피치노는 장기간의 노고 끝에 1484년 마침내 플라톤 전작의 라틴어 번역을 출간했다. 그의 번역은 이후 300년 이상 플라톤 연구의 표준이 되었다. 피치노는 고대 후기의 신플라톤주의 관점에서 플라톤을 해석했기 때문에 신플라톤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는 플레톤과 달리 기독교를 신플라톤주의적 이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고 신플라톤주의를 신봉했다.#[7] 당장 그가 죽은지 100년 후에 태어난 이탈리아인 조르다노 브루노가 기독교를 딱히 거부한 것도 아니고 성경이랑 다른 과학이론을 제기했다는 죄로 로마 가톨릭 교황청으로부터 화형을 받은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그보다 백년도 전에 브루노 뺨치는 반기독교 사상을 견지한 플레톤을 보호하고 천수를 누리게 해준 마누일 2세와 그의 후계자들이 놀라울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