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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빵/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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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구성3. 흥행4. 사건 사고5. 당시의 포켓몬 팬들에게 지니는 의미6. 관련 문서

1. 개요


포켓몬스터의 초판 포켓몬빵띠부띠부씰에 대한 문서.

2. 구성

3. 흥행

1999년 SBS에서 포켓몬스터 애니메이션이 방영한 후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유명해지자, 당시 한국 판권사인 대원동화가 지나월드, 롯데제과, 대상 등 관련 업계와 손을 잡아 포켓몬스터와 관련된 여러가지 미디어 믹스 상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1990년대 후반 당시의 어린이들에게 유행했던 콜렉터들을 열광시킨 아이템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띠부띠부씰이었다. 포켓몬빵에 이 띠부띠부씰을 부록으로 끼워넣자 포켓몬스터의 세계적인 인기와 함께 빵이 엄청나게 잘 팔렸으며 인기가 있는 빵은 쉽게 매진되곤 했는데 심지어 한 달에 무려 500만개가 넘게 팔렸다고 한다.

이처럼, 띠부띠부씰은 그야말로 초대박급의 수집품이었고, 1999년에서 2001년 당시에 초등학생들은 띠부띠부씰을 모으지 않는 아이들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초등학생 뿐만이 아닌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도 역시 띠부띠부씰을 모았다. 그래서 우스갯소리로, "스티커를 샀는데 빵이 공짜다" 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1999년부터 2001년 사이에 초등학생이던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초중반생들은 자신만의 스티커 수집 컬렉션을 자랑하거나 친구들끼리 중복되는 스티커를 서로 교환하면서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스티커를 수집하기도 했다.

2010년대 이후에야 스마트폰을 꾸미려면 케이스 외엔 별 거 없지만 스마트폰 이전 피처폰 시절에는 자판과 폴더 커버에 꾸밀 수 있는 공간이 많았기에 귀여운 포켓몬 스티커는 핸드폰 데코레이션 아이템 중 가장 쉽고 싸게 구할 수 있어 인기 아이템이기도 했다. 그래서 대학생을 비롯한 성인들도 스티커를 구하기 위해서 빵을 샀었던 것이다. 띠부띠부씰이 워낙에 인기를 끌자 다른 회사와 파트너쉽을 맺고 여러가지 바리에이션 상품을 판매하기도 했다. 2001년 말 경엔 칼라 찰흙을 구입하면 상당히 레어한 띠부띠부씰이 들어있던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빵의 맛과 질은 매우 좋지 못했던데다 스티커만 빼가고 빵은 버리는 문제점이 발생해서 포켓몬빵 띠부띠부씰 사건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나마 '로켓단의 초코롤' 이나 '벗겨먹는 고오스' 정도가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현재도 다른 빵은 다 사라지거나 모양이 변한 것에 비해서 이 두 종류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2]

띠부띠부씰의 인기는 한국의 서브컬처에도 큰 영향을 받았는데, 포켓몬스터 빵이 처음 출시될 당시에는 인기가 말 그대로 하늘을 찌를 수준이었고, 스티커를 모은 파일을 잃어버린 것을 소재로 쓴 포켓몬스터 스티커 사건이라는 책까지 나왔었다. 1998년에 방송한 SBS 일일시트콤 순풍산부인과에서는 박영규의 딸 미달이가 포켓몬빵을 구입해서 포켓몬 스티커를 수집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3] 미달이가 빵 7개를 구입하고 7연속 모두 피카츄만 나와서 짜증을 내는 장면이 압권이다.[4]

4. 사건 사고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당시 사건을 풍자한 순풍산부인과 (1999) [5]

다양한 캐릭터의 띠부띠부씰이 들어있는 포켓몬빵이 처음 출시되었을 당시 일부 학생들은 이 씰만 가지고 빵을 버려서 한 때 뉴스에까지 오를 만큼 사회적 문제가 되었다. 특히 90년대 끝자락인 1999년 당시는 IMF 외환위기에서 완전히 졸업한 상태도 아닌 불경기였으며,[7] 당시의 부모 세대인 1950~60년대 초반생의 베이비부머 세대만 해도 성장기에 보릿고개를 실감할 정도로 잘 먹지 못하던 세대였다 보니, 아이들이 멀쩡한 먹거리를 버린다는 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였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런 사태가 벌어진 이유는 빵이 아까워서 그냥 먹으려고 해도 너무나도 심각할 정도로 맛이 없는 것이 원인이기도 했기 때문에 무조건 어린이들에게 잘못을 했다고 탓할 수는 없었다. 애초에 구워지고 난 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맛이 없어지는 빵의 특성상 공산품 빵은 동네에 하나씩 있기 마련인 빵집의 빵보다 품질이 열악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었던데다, 유통 비용의 문제로 출시 당시에는 아이들이 먹기에는 가성비가 심하게 떨어지는 편이었다.

애초에 이 빵을 만들었던 당시의 삼립식품은 IMF때 무리한 문어발 사업을 벌였다 폭망해서 회사가 없어질뻔 했다가 겨우 살아난 상태라 제대로 된 품질의 빵을 만들 수 있을리도 만무했다. 만약 이시기 삼립식품이 포켓몬빵 하나만 성공했다면 오히려 저 포켓몬빵 문제+높은 로열티로 회사가 다시 없어질수도 있었는데 거의 같은시기 나왔던 당대 최고의 개그맨 김국진 모델 효과로 국찐이빵이 대박을 치지 못했다면, 회사가 지금처럼 부활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당시 포켓몬빵과 같은 값(500원)이었던 초코 다이제가 2022년 기준 2,500원인 것을 보면, 1999년 당시 초등생(1987~1992년생)들의 체감 물가로는 빵 하나 값 = 가까스로 받아낸 용돈을 다 털어야 하나를 겨우 사는 느낌이었을 것이고, 때문에 이 빵을 스티커를 얻을 목적으로 마음껏 사기에는 부담이 컸을 것이다. 실제로도 1999년 당시 최저임금 1,525원으로는 당시 빵(500원) 3개를 겨우 살 수 있을 정도로 싸지 않은 편이었고, 이는 2022년 현재 최저임금 9,160원으로는 신 버전 빵(1,500원)을 6개 살 수 있다는 점과 비교해 봐도 뒷받침 된다. 그 당시 초등학생의 경험담 만화.

1999년 당시 초등학교 저학년의 일주일 용돈이 대부분 1000원이어서 500원짜리 빵을 구매하기에는 부담이 있었다는 경험담이 나와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카드가 들어있는 포켓몬 껌은 가격이 300원이었고, 흑백 만화책은 대여비가 300원이었다고 한다. 만화방 대여비는 대개 책값의 10%였기에 3000원짜리 흑백 만화책은 그 시기에 보통 300원에 대여되었다.

다만 2010년대 이전 최저임금 기반 계산법은 정확하지 못하다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IMF 사태 이후라는걸 감안해도 1999년 기준 대졸자 평균 임금은 130만원 정도 되었고, 고졸 중소기업 생산직 기준으로는 대졸자의 60~70%수준인 90~100만원 쯤 되었다. 당시에는 일부 외국계 기업을 제외하면 토요휴업제도 적용되지 않아 주 6일 근로하였고, IMF 때문에 오히려 기업에서 실제 근로시간을 낮추려고 노력하는 등, 임금체계가 최저임금 기반으로 돌아가지는 않았다. 1997년 전체 산업의 월평균 근로시간은 203.0시간이었다.[8] 주휴수당을 쳐도 월급산정 기준 근로시간은 240시간 정도 되었을 것이다. 월급 130만원을 받는 대졸 초봉 기준으로는 시급이 5,400원 정도 되었던 것이고, 월급 90만원을 받는 고졸 중소기업 초봉 기준으로는 시급이 3,700원 정도 되었다. 정말 못 받는 고졸 중소기업 초봉 기준으로도 당시 최저임금의 두 배 이상이다. 최저임금 1,525원 기준으로 하면, 주휴 포함한 240시간으로도 366,000원이다. 부업이라면 몰라도, 이런 돈 받고 직장 다닐 사람은 IMF 당시에도 거의 없었다. 하물며 1999년에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을 감안하면 실질구매력에 기반한 포켓몬빵의 가격 수준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는 않으며, 포켓몬 빵만 기준으로 한다면, 오히려 당시의 실질구매력이 더 높아보이는 측면도 있다. 2022년 포켓몬 빵 값은 1,500원이고, 1999년 빵 값은 500원이다. 2022년 최저임금은 9,160원이니, 포켓몬 빵을 6개 살 수 있다. 하지만 당시 고졸 중소기업의 최저 임금 기준으로 500원 짜리 빵을 7개 살 수 있다. 다만 품질은 2022년 나오는 빵의 품질이 훨씬 더 좋다.

하지만 1999년 사람들보다는 2022년 사람들이 더 포켓몬빵을 부담없이 구입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것은 가정의 실질구매력 차이는 물론, 사람들의 인식 차이 때문이기도 하다. 일단 1990년대에는 맞벌이 개념이 보편화되지 않았고,[9] 이미 20대에 결혼하고 아이도 있어 돈을 아껴 써야 했다. 또한 이 당시는 1997년 IMF 구제 금융기 2년째를 맞이하던 시절이라 경제난에 불황기까지 겹친 시절이어서 과소비를 추방하고 사치와 낭비하는 풍조를 매우 좋지 않게 보았던 시절이었던데다가 IMF 구제기에 따른 국산품 애용 운동이 일어나기도 하여서 포켓몬빵을 사는 사람조차 그리 좋지 않게 보았던 경우도 많았으며 온 국민이 절제를 강조하였던 시절이었다. 반면 2022년에는 맞벌이 가정이 상당히 늘었을 뿐더러, 애당초 20대는 물론이거니와 30대에도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상당하기에[10] 굳이 빵 몇 개 살 돈까지 아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적다.

또한 꽤 최근까지만 해도 만화, 만화영화(애니메이션), 장난감, 게임은 초등학생 이하 아이들의 전유물이었다. 사회 전반에 개인주의가 더욱 강화되고 개인의 개성이 중시되며, 소위 한류라는 이름으로 컨텐츠산업의 중요성이 부각된 2010년대 중후반에는 이런 문화매체를 즐기고 향유하는 어른들은 키덜트라 불리며, 나름 존중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만화영화나 보고 장난감 좋아하는 어른은 어른 취급도 안 해주던 것이 1990년대 감성이다. 하지만 요즘은 30대 어른이 자가용끌고 편의점 배달차량 추적하면서 포켓몬빵을 산다. 20세기 말에 누비라, 구아방 몰고 이런 짓 했으면 상당히 이상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또한 이 시기에는 지금과는 달리 TV 뉴스에서도 포켓몬 빵에 대한 언급이나 보도는 나오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하였는데 당시는 포켓몬빵의 구매자들이 모두 미취학 아동 및 초등학생, 못해도 중학생의 아동~청소년층이었고 뉴스에서 부모님이나 어른들에 비해서 그리 비중을 두는 세대도 아닌데다가 일부 당시 아이들이 빵을 먹지 않고 버린다는 문제의 보도를 제외하고 당시에는 당대 부모-자녀간의 개인 사정이었다. 하지만 2022년 현재는 그 어린애들이 성인이 되고 고졸 및 대졸자에 군필자에 결혼을 하는 등의 입장으로 바뀌면서 TV 뉴스에서도 포켓몬 빵에 대한 언급이나 보도를 하면서 그 때와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뉴스 시청층이 그 당시 어린애들이 성인이 되면서 뉴스를 보거나 뉴스 기자 등이 되면서 비중이 높아짐에 따라 위상도 달라지게 된 것이다.

게다가, 초판 포켓몬빵의 품질은 좋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물론 로켓단의 초코롤이니 벗겨먹는 고오스같이, 당시에도 제법 맛있다는 소리를 듣던 빵이 없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두가지를 빼면 죄다 악평만 받았던 것이 문제이고, 그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았던 빵이 '지우의 몬스터볼' 이다. 중앙에 싸구려 젤리[11] 하나만 콕 박혀있을 뿐이고 그냥 별다른 맛도 안 나는 평범한 슈크림빵이였다.

그래서, 띠부띠부씰이 없었으면 동네 빵집으로 가서 훨씬 질 좋은 슈크림빵이나 베이비슈를 사먹었을 것이다. 결국 남들이 모으지 못한 스티커 하나를 팔아서 새로운 빵을 사거나, 아니면 스티커와 새로운 빵 하나를 물물교환까지 해버리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차피 빵은 장식이고 스티커가 메인이기 때문이다.

사실, 과자와 빵을 밥먹는 것보다도 더 좋아하는 주된 타깃층인 어린이들의 입맛조차 제대로 공략하지 못한 제품을 버젓이 판매했다는 것 자체가 논란거리였다. 조금이라도 맛이 없으면 먹지 않는 것은 어린 아이들은 물론이고 어른들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띠부띠부씰을 다른 브랜드의 맛있는 과자나 빵에다 같이 끼워서 팔았다면 그 맛이 없는 빵과 거기에 들어있는 띠부띠부씰은 아무도 안 샀을 것이라는 반응도 있었다.

다만 그것이 꼭 회사의 손해는 아니었다. 상술한대로, 당시 삼립은 회사가 절단나기 직전에서 겨우 회생한거라 애초에 제대로된 공장빵을 기대하는 사람은 삼립 내부에서도 없었고 소비자들도 그랬다. 사실 그때 사람들에게 빵, 그것도 빵집이 아닌 슈퍼에서 파는 공장빵에 대한 인식은 지금보다도 훨씬 나빠서 정말 마지못해 먹는 식사대용이었고 우유랑 같이 먹지 않으면 넘어가지도 않던 덩어리였다. 그러니 띠부띠부씰만 빼고 버려도 차라리 그빵을 대신 먹던가 하지 부모입장에서 애들을 뭐라할 수 없는 측면도 있었던 것.

물론 캐릭터 빵은 상표권 이용료를 지불해야 해서 같은 가격의 일반 빵보다 마진이 적을 수밖에 없긴 하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타깃이니 가격을 올릴 순 없었을 테고 결국 맛을 희생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김국진퍼블리시티권 비용을 받지 않아 원가 절감이 가능했던 국찌니빵은 당시 포켓몬빵에 비해서 더 품질이 좋은 편이었다. 아무튼 당시의 포켓몬 스티커의 인기는 굉장했고, 당시의 초딩들은 가격을 올렸어도 띠부띠부씰을 샀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12] 왜 빵을 맛없게 만드냐는 비판을 절대로 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초반에는 빵에 든 스티커를 확인하려고 포장도 뜯지 않고 빵을 훼손하면서 스티커를 보이는 쪽으로 미는 사례와, 빵 봉지만 뜯어내고 스티커만 훔쳐가는 일이 빈번하게 생기자 가게의 카운터에 보이는 곳으로 샤니, 삼립 빵 코너를 옮기는 일이 잦았다. 결국 나중에는 스티커가 아예 안 보이도록 빵 봉지의 재질을 바꾸기까지 했다. 회사에서는 햇빛에 의한 빵의 변질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포장을 바꾸었다고 표면적인 이유를 내걸었지만, 그걸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빵이 맛이라도 있었다면 빵을 좋아하는 주변인한테 줘버리는 식으로 최소한 빵이 그냥 버려지는 일은 막았을 것이다. 과거에도 따조와 같은 수집형 아이템을 동봉해서 히트한 사례는 분명히 있었다. 동 시기에도 치토스, 고래밥같은 과자는 맛의 퀄리티가 보장되었고, 스티커나 미니 장난감을 동봉 판매하는 마케팅은 흔했다.

당장에 치토스만 해도 미국 펩시코(프리토레이)와 제휴를 맺어서 생산하였고, 이미 미국에서 성공한 과자라 맛이 없을 수가 없었다. 치토스 정도면 그냥 알아서 본인이 먹었고, 입이 짧은 사람은 주변인에게 줘버리고 스티커, 따조 등의 장난감을 챙겼기에 과자가 버려지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포켓몬빵은 로켓단의 초코롤, 벗겨먹는 고오스 정도를 빼면 죄다 맛이 없었고, 주변인에게 먹으라고 주는 것도 민폐라서 그냥 버려졌다.

여담으로, 옆나라 일본에서도 캐릭터를 넣은 음식의 질이 떨어져서 버리는 사건이 오래 전부터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가면라이더 스낵 사건 참고.

5. 당시의 포켓몬 팬들에게 지니는 의미

Y2K 대란으로 국민 모두가 공포에 떨던 1999년, 포켓몬스터가 막 한국에 수입되고 이 빵이 출시된 당시, 한국에서 포켓몬스터라는 미디어 믹스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기회라곤 1999년 7월부터 SBS에서 방영개시한 초대 애니메이션 밖에 없었다. 1999년 11월에 되어서야 한국 최초로 포켓몬스터 금·은이 정발되었기 때문이다.[13] 게임과 애니로 동시에 포켓몬을 2년 전부터 즐기던 일본 어린이, 1년 전부터 즐기던 미국 어린이와 달리 당시 한국 어린이들은 용돈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받아서[14] 1세대 적녹청 피카츄와 호환되는 게임기 게임보이나 2세대 금은 크리스탈과 호환되는 게임보이 컬러 그리고 각 버전별 정발팩을 살 수 있는 소수가 아닌 한, SBS 만화를 보는 것 외에 그 띠부띠부씰이라도 모으는 것이 인생 최초의 포켓몬 수집인 셈이었다. 그런 심리적인 대리만족 덕에 당시 미디어의 비난포화에 비해 당사자들은 마냥 좋았고 추억으로 넘길만 했던 건 다 이유가 있던 것이다.

또한 1999년은 인터넷이 막 발달하기 시작한 극초창기 시절이라 인터넷 이미지 및 일러스트를 검색해서 보거나 불펌이나 이라고 불렸던 시절도 아니었고 다운로드받아서 보는 것이 지금처럼 보편적인 시절도 아니었으며 다시보기 서비스나 불법 다운로드라는 것은 물론 유튜브나 스마트폰 등도 아예 없던 시절인 데다, 노트북으로 인터넷을 하려면 휴대폰과 모뎀 케이블로 연결해야 했으며 이마저도 전화세와 배터리의 부담이 상당했었다. 모뎀으로 인터넷을 연결한 후 포켓몬 팬아트 몇 점 감상하면 통신 요금이 대단히 많이 청구되었으며 그마저도 이미지 로딩 속도도 느렸고, 엑스박스나 네이버 소년 등이 뜨는 등 이미지가 아예 뜨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ADSL, 메가패스 등의 회선을 연결한다고 해도 인터넷에서 원하는 정보를 2000년대 중반 이후와 같이 신속하게 검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휴대폰 무선인터넷(WAP 방식)이 LG텔레콤을 필두로 막 생겼어도 이용료가 비싸 널리 보급되지 않았던 때였다. 다른 아이템을 살펴보아도 문구점에서 개당(작은 것 기준) 200원 하는 고무로 된 포켓몬 모양 짱딱지 정도가 포켓몬 수집 콘텐츠 중 그나마 접근성이 좋은 것이었다. 그러나 짱딱지는 띠부씰과는 다르게 모든 포켓몬의 모습이 나오지는 않아 모으는 재미가 반감되는 면이 있었다. 더 나아가면 포켓몬 트레이딩 카드 정도가 있었으나, 카드는 당시에 정발이 되기는 했어도 유사품이 판치는 지경이어서 진정성에서 점수가 깎였다.

그래서 지금에 비하면 많이 다르다보니 TV를 보는 것이 아니면 빵을 먹을 생각은 아니라도 포켓몬빵이라도 사서 포켓몬 캐릭터 띠부띠부씰이라도 모으는 것이 당시 어린이들의 풍습이기도 했다. TV로 볼 수 있어도 그 당시에는 IPTV가 활성화되기 한참전이기 때문에[15] 본방을 사수하지 않는 이상은 그 내용을 보는 것은 불가했으며 재방을 하거나 비디오테이프로 직접 녹화해서 다시보는 것 이외에는 방법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 포켓몬을 방송했던 SBS도 일부 광역시 지역을 중심으로 한 민영방송 체제로 들어섰지만 강원도, 전북, 제주 등 일부 지역은 유선 방송이 아닌 이상은 SBS를 지상파로 보기 어려웠던 시절이었고 그 지역들도 2001년에 가서야 각각 강원민방, 전주방송, 제주방송으로 개국하면서 SBS를 지상파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 지역 어린이들은 유선방송이 아니면 SBS를 보기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서울 등에서 볼 수 밖에 없었던 시절이기도 하였다.

6. 관련 문서



[1] 딸기롤은 님피아 포장으로 복각.[2] 그래서인지 2024년에 이 두가지의 대형 버전이 출시되었다.[3] 마침 애니메이션이 같은 방송국에서 방영되었기에 가능한 에피소드였다.[4] 그런데 사실은 2024년이 된 지금도 그렇긴 하지만, 초기 띠부띠부씰의 피카츄 스티커는 다른 스티커 2개 이상과 맞바꾼다고 할 정도로 가치가 매우 높은 스티커라 미달이가 그렇게까지 아쉬워할 일은 아니기 때문에 고증이 잘못된 것이다. 물론, 미달이의 입장에서는 피카츄 스티커 말고 다른 스티커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짜증을 내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뭐 어때? 어차피 피카츄 스티커 많이 있으니까 다른 스티커와 바꿔야지!" 정도로 괜찮다고 넘어가거나 오히려 좋아하는 반응이 나와야 되는데 피카츄 스티커는 선호도가 매우 높아서 다른 스티커와 교환이 매우 쉬웠기 때문인데, 다른 포켓몬과 다르게 피카츄는 다른 그림으로 5종류 이상의 씰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9년 당시의 현실고증을 제대로 하자면, 피카츄 스티커가 아니라 비교적 선호도가 떨어지는 다른 스티커가 중복으로 나와서 짜증을 내는 반응이 나와야 한다.[5] 순풍산부인과 1분 17초~[6] 같은 날 MBC 뉴스데스크에서도 비슷한 주제의 뉴스를 다뤘다.[7] 외환위기는 2001년 8월 말에 공식 종료된다.[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노동시간' 출처.[9] 일 가정 양립지표에 따르면 맞벌이가 상당히 보편화된 2020년대 기준으로도 50% 내외이다.[10] 동아일보 '초혼 연령 男36.7세·女33.6세…16년전보다 3세 늦어져 출처.[11] 옛날 빵집에서 생크림 케이크 위에 올려두었던 정체불명의 체리향 젤리를 생각하면 비슷하다. 2010년대 이후에는 동네 카페에서 티라미수 같은 맛있는 조각 케이크를 쉽게 구입할 수 있고, 빵집에서는 생크림 케이크에 진짜 딸기를 올리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90년대에는 그랬었다. '앵두형 제리'라고 검색하면 그때 그 젤리를 확인해 볼 수 있다.[12] 부모님에게 사달라고 조르든지, 아니면 용돈을 모아서라도 샀을 것이다.[13] 그나마 이것도 일본판 얘기였고, 한국어판 금은 버전은 이로부터 무려 2년 반이 지난 후에야 발매되었기에 일본어를 모르는 사람은 그동안 게임을 즐기기 매우 힘들었다.[14] 게임보이 본체가 당시 한국 매장에서 90,000원 정도 했었다.[15] IPTV는 포켓몬빵 열풍이 일어난지 10년 후인 2009년 이후에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어 쉽게 재방송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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