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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13:35

자마아티 이슬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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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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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적
91석 · 326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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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파키스탄 이슬람 회의 당기.png
جماعت اسلامی پاکستان
약칭 JI
한글명칭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
(자마아티 이슬라미)
창당일 1941년 8월 26일
당사 Multan Road, Mansoorah, 라호르
상징색
초록색
이념 이슬람주의
이슬람 보수주의
사회보수주의
사회주의
반자유주의
스펙트럼 극우
에미르 시라즈 울 하크
(سراج الحق)
청년 조직 청년 JI
노동 조직 전국노동조합
기관지 데일리 자사라트
상원 의석 수
1석 / 100석
하원 의석 수
0석 / 336석
공식 사이트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상세3. 무슬림 형제단과의 비교4. 한국에서5. 여담

[clearfix]

1. 개요

이슬람주의 정당으로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과 연계된 정당이다. 이슬람 근본주의 신학자 아불 알라 마우두디(Abul A'la Maududi)가 창건했는데 창건자 마우두디의 경우 원래 이슬람 모더니즘 계열 학자였으나 나중에 사이드 쿠틉과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이슬람주의 성향 학자가 되었다. 반자본주의, 반공주의, 반자유주의, 반사회주의를 표방하며 파키스탄의 세속화를 반대하는 입장이라고 한다. 영문 표기는 Jamaat-e-Islami

해당 정당은 1941년에 당시 영국령 인도 제국 도시이였 라호르에서 출범했으며 1947년 인도 분단 과정에서 인도 지부와 파키스탄 지부가 갈라졌는데 이 중 파키스탄 지부는 파키스탄의 과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 무함마드 압두스 살람아흐마디야 신도라는 이유만으로 기록말살형을 주도했다. 당의 창립자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초창기에는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인도의 무슬림들과 힌두교도들이 협업하여 통일 국가로 독립하는 방안을 지지하였으나 파키스탄 독립 이후에는 이슬람의 정화라는 미명하에 힌두교인 및 시크교도와의 모든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 연계를 끊기를 요구했는데 이는 소수자를 박해하면서 내부의 불만을 약자에게로 돌리는 군부독재 포퓰리즘에 정확히 부합했다. 덕분에 파키스탄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들은 무함마드 알리 진나 사후에는 서서히 법적으로 여러 차별을 받으면서 2등 시민으로 강등되었다.

이슬람 교리에 입각하여 금융업에 반대한다고 하지만 이 정당에서 갈라져나온[1] 방글라데시 이슬람 회의는 고리대금업으로 고통받던 서민들을 구제해 주던 그라민 은행이 "샤리아에 입각한 금융"이 아닌 불신자들의 은행이라며 공격해서 망하게 만든 적이 있었다.

2. 상세

마우두디는 인도국민회의파와 인도무슬림연맹 양측 모두에 비판적이었다. 그는 두 집단 모두 세속적이라고 보았으며 이들을 가리켜 '불신자들의 무리'라고 불렀다. 인도 무슬림연맹이 샤리아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그 어떠한 논의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우두디는 파키스탄의 미래를 개탄하면서 '무슬림들이 사는 신앙심 없는 국가'가 될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마우두디는 1941년 이슬람주의 정당인 자마아티 이슬라미를 설립한다. 1947년 인도 분할 이후 자마아티 이슬라미는 인도계 정당과 파키스탄계 정당으로 나뉜다. 마우두디는 385명의 당원들과 함께 파키스탄계 정당을 선택하긴 했으나, 그의 최종적인 목적은 이른바 진정한 이슬람 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었다.
이븐 와라크

오늘날에는 점점 세력이 약해져 가는 정당으로 과거 대한민국의 자유당은 이 정당에 비하면 양반 of 양반이다. 해당 정당의 당수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1953년 파키스탄의 소수종파 아흐마디야 신도가 외무부 장관에 임명되자[2] 여기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아흐마디야 신도들에 대한 제노사이드를 주장하다가 수감된 적이 있었으며 이후 쿠데타로 파키스탄이 군사독재자들의 손아귀에 들어가자 "이슬람의 발전은 바라지만 서구화는 반대한다.", "타락한 서구 문화와 여성 해방이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는 미명하에 군사독재 정권의 우민화 정책을 지지했다.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원래는 이슬람 모더니즘 성향의 온건파 학자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와 함께 인도 통일 운동을 전개하고 무함마드 이크발로부터 총애를 받는 등 존경을 받던 학자였기 때문에 그가 "타락한 서구 문화와 여성 해방이 혼동되어서는 안 된다.", "이슬람의 발전은 바라지만 서구화는 반대한다."는 말을 하자 파키스탄의 개혁주의자들은 발언권을 상당 부분 상실할 수 밖에 없었다. 해당 발언들은 당시 파키스탄의 상황에서 봤을 때 반서방 포퓰리즘에 영합했다고 해석해도 문제 없는 발언이다.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슬림 지식인 사이에 퍼진 서구 문화와 사상의 맥을 끊는 일이며, 이슬람 고유의 샤리아가 서구 문명이 제시하는 그 무엇보다도 훌륭한 것이라는 사실을 무슬림 지식인들에게 알려야 한다. 그들이 문화와 문명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이들에게 빌려와야만 했던 잘못된 개념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 아불 알라 마우두디

아불 알라 마우두디가 말한 샤리아는 서구 문명이 제시하는 그 무엇보다도 고리대금업자들의 기득권 사수에 있어서 훌륭한 것이라는 사실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이슬람에서는 고리대금을 원칙적으로 금지하지만 예외 없는 규칙은 없다고 샤리아법상 보통은 상환 날짜를 말도 안 되게 짧게 잡은 후 막대한 액수의 벌금을 채무자에게 뒤집어씌우는 방식으로 이자 소득 창출이 이루어진다. 물론 채무자가 산수에 약해야 이자 소득을 늘리기 더 쉬운 점을 감안해서 보통 이렇게 샤리아를 등에 업은 고리대금업자 집단들은 문맹 퇴치 운동 등에 갖가지 핑계를 대며 반대하는 편이기도 하다.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직접 학교를 짓지 말라고 한 적은 없지만 대신 파키스탄이 당장 인도와 전쟁을 벌여 인도의 무슬림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주장으로 사람들을 선동하였다. 1959년부로 파키스탄은 미국에 페샤와르 공군 기지를 임대해 주는 조건으로 상당한 액수의 원조금을 받았는데 파키스탄 정부는 어용 신학자들이 자신들을 커버쳐 주는 사이에 이 돈을 학교나 발전소를 짓는 대신에 국방비에 투자하였다. 이렇게 국방비로 투자된 돈은 파키스탄 장성들의 부패와 방산비리, 군납비리를 통해 대부분 해외로 빠져나갔음은 물론이다.

1978년 지아울하크 정권이 들어서면서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는 전례 없는 성공과 정치적 영향력을 누렸는데 당원들은 내각 장관직을 포함하여 정부 고위 관직을 차지했으며 이 정당의 견해는 당시 파키스탄 정부 계획에 반영되었다. 이들은 국가 정책을 실현하는 데도 직접적인 영향을 담당했으며 특히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정책이나 지방 민족 문제에 적극 개입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파슈툰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것을 계기로 결국 아프가니스탄에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세력이 힘을 얻고 이후 이를 흡수한 탈레반이 들어섰다.

1979년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와 지아울하크 정권은 후두드 법이라는 악법을 도입하였다. 후두드 법에 의하면 성폭행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법의학과 정황 증거 대신에 남자 증인 4명을 내세워야 하는데 대가족 중심의 파키스탄 사회 특성상 강간 사건의 증인을 잘못 자처하면 가족 전체가 다시 피의 보복을 받을 우려로 쉽게 증인을 구할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성폭행을 당하고도 오히려 간통죄로 내몰리는 것으로 악명 높았던 법이다.

이게 얼마나 쓰레기같은 악법인가 하면 중세 이슬람 왕국들도 남자 증인 4명을 요구한다는 점은 똑같았지만 적어도 기소한 피해자가 증인 4명을 못 찾았다고 오히려 간통죄로 처벌하는 경우는 없었다. 간통죄로 처벌하려면 역시 증인 4명이 필요한데 오히려 강간을 신고한 피해 여성을 간통죄로 처벌할 때만 증인이 필요없고 그저 증인을 못 찾았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하는 악마의 증명을 도입한 것이 바로 후두드 법의 특징이다. 한때는 파키스탄 감옥의 여성 수감자 70~80%가 후두드 법 때문에 오히려 간통죄를 뒤집어 쓴 강간 피해자였을 정도였다.#

상류층 여성 이외의 서민층, 빈민층 강간 피해자의 신고를 원천 차단할 목적으로 악용되던 악법인 후두드 법은 자마아티 이슬라미가 몰락한 2006년에야 마침내 폐지되었는데 당시 자마아티 이슬라미 당원들은 샤리아 대신 법의학과 정황 증거라는 타락한 서구 법을 도입하면 성문란을 조장하고 쿠란의 근간을 뒤흔들 것이라며 발악하였다.# 어째서인지 양구군 악덕 상인들이 국군 병사들의 휴대전화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억지부리며 발악하던 일이 떠오른다. 자마아티 이슬라미가 몰락한 후에야 한 때 파키스탄 국가 예산의 60% 이상에 달하던 국방비 비중도 정상적인 비중으로 돌아갔다.#

참고로 파키스탄 무슬림 동맹이나 정의 파키스탄 운동 같은 중도~중도우파 정당, 온건 세속적 이슬람 민주주의 정당과는 구별된다. 오늘날에는 다행히 활동 범위가 크게 축소되어 파키스탄 북서부의 파슈툰족 거주지 근처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데 제 버릇 개 못준다고 해당 단체 회원들의 주도로 갖가지 황당한 이유로 투석형을 집행해서 사람을 잡는 등 엽기적인 일들이 일어난다. 창건자 아불 알라 마우두디가 사이드 쿠틉과 친했던 점과 희대의 개막장 집단 아프가니스탄 탈레반과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와의 커넥션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다.

원래부터 우민화에 관심이 많았던 파키스탄 군부 정권과 아불 알라 마우두디 및 그 추종자들의 합작품으로 파키스탄은 20세기 후반에 문맹률 80%를 달성하고[3] 오늘날에도 여성 인권 탄압국으로 오명을 쓰게 되었다. 마우두디는 산아제한 및 가족계획을 반대하였는데 산아제한을 찬성하는 측에서 가족계획을 통해 파키스탄 아동들의 영양실조 문제를 해결하고 취학률을 높일 수 있다고 지적하자 역경과 빈곤이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고 주장하면서 여기에 반박하였다. 정작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지주층 가문에서 성장한 데다 천재라고 소문이 나서 이런저런 지원을 받고 공부했기 때문에 돈 문제로 고생했던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비교하자면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마수가 뻗지 않았던 이스마일파 주민들이 거주하는 훈자 마을의 30세 이하의 문맹률은 사실상 0%에 가깝고 후사이나바드라는 마을에는 한 가구당 석사 학위 소지자가 한 명씩 있을 정도다.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파키스탄을 이슬람 현대주의에 입각한 국가로 발전시키려고 했으나 이슬람주의 정당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가 이를 허물어 버린 셈이다.

3. 무슬림 형제단과의 비교

무슬림 형제단과 연계되어 있는 단체치고는 특이하게도 친사우디 성향이 있다. 보통 무슬림 형제단은 사우디랑 사이가 좋지 않다. 사우디 학자들이 사이드 쿠틉의 쿠란 해석이 이단이라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의외일 수도 있으나 해당 정당은 아흐마디야 신도에게 여권을 따로 발급하는 법을 통과시켜 사실상 메카메디나로의 성지순례를 금지시켰기 때문에 사우디아라비아 정부의 호감을 샀다.

이집트에서 대중화된 무슬림 형제단과 달리 인도와 파키스탄의 자마아티 이슬라미는 처음부터 엘리트 지도부를 육성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좋게 말하자면 "좋은 교육을 받고 이슬람에 헌신하는 핵심 지도자들을 육성한다."가 목적이지만 실질적으로 해당 전략은 상술한 우민화 정책과 연결되어 있다.

4. 한국에서

한국에서 과거 해당 단체의 분파인 이른바 "다와툴 이슬람 코리아"가 성립된 적이 있으나 2004년에 적발되어 공중분해되었다.# ##

당시 체포되어 추방당한 다와툴 코리아 회원들은 자신들이 이슬람 극단주의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4]

정작 해당 단체는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민병대를 조직하여 세속주의자 대학생 및 힌두교도들을 대상으로 집단 강간과 학살을 주도한 전력이 있었으며#1#2 방글라데시 독립 후에도 반성은커녕 정치 깡패 운영, 힌두교 사원 방화, 그라민 은행 폐쇄 등의 행각을 벌인 바 있었다.#1 #2 #3

5. 여담

아프가니스탄아흐마드 샤 마수드가 속했던 자아티 이슬라미와는 다른 정당이다. 아불 알라 마우두디와 그를 추종하는 데오반디파는 반수피 성향이고[5] 아흐마드 샤 마수드가 속했던 아프가니스탄 자미아티 이슬라미는 친수피즘 성향이다. 다만 부르하누딘 라바니가 해당 정당을 일정부분 벤치마킹하기는 했다. 해당 정당의 아프가니스탄 지부는 헤즈비 이슬람 그리고 탈레반이다.

파키스탄의 중도 성향 대규모 이슬람 단체 타블리기 자마트와는 대치 상태다. 자마아티 이슬라미 및 그 연계 단체인 이슬람 해방당은 타블리기 자마트가 활발하게 정치 참여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즉 이슬람주의 정치 이론을 따르지 않고 샤리아를 헌법으로 삼는 일에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이 단체를 공격한다. 참고로 타블리기 자마트는 온건파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자마아티 이슬라미 수준의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까지는 아니다.

초대 당수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극단주의에 빠져들기 전에는 천재로 촉망받던 인재였다. 비슷한 극단주의자 사이드 쿠틉이 신학에 관련하여 쓴 글들은 치졸한 개인 감정이 지나치게 많이 반영되었고 비논리적인 부분이 상당하지만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진짜로 글을 논리적으로 잘 썼다. 1990년대 기준으로 아불 알라 마우두디의 저서들은 우르두어로 출간 보급된 책 중에 가장 많이 보급된 책이었다고 한다. 아불 알라 마우두디 본인은 서구 사상 전체를 다 반대한다고 주장했으나 마르크스나 헤겔의 철학적 방법론에 대한 이해도도 높았고 그의 쿠란 주해서 《타프히물 쿠란》 역시 아랍어로 번역/편역되어 높은 평가를 받았을 정도였다. 기존 인도/파키스탄 사회의 지주, 기득권들 입장에서는 이미 주변에 신학자가 넘쳐나는 상황에서 어용 신학자를 고를 때 성격 더러운 사람을 고르는 대신 글도 논리적으로 잘 쓰고 재능 있는 사람을 고르는 게 맞는 일이었다.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개인적으로는 매우 신사적이고 명석한 사람이었지만 부패한 토후들의 입맛에 맞게 우민화 정책을 미화했으며 사우디아라비아의 오일머니를 노리고 파키스탄의 소수종파를 박해했다는 점에서 "위선자"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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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방글라데시는 한때 파키스탄의 영토였으나 독립 운동 끝에 오늘날 독립국이 되었다.[2] 무하마드 자파룰라 칸 문서 참조[3] 다행히 20세기 후반부터는 문맹률이 낮아져서 2018년 기준으로 문맹률이 32%로 떨어졌고 여성의 교육 여건도 개선되었지만 이 수치도 타 국가들에 비하면 높은 수준이다.[4] 방글라데시인에 대한 차별과 다르게 정작 다와툴 코리아의 모체 자마아티 이슬라미 방글라데시는 방글라데시에서 더 이상 벵골어를 국어로 하지 말고 마우두디가 사용했던 우르두어를 국어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부분의 방글라데시인들에게 이적단체로 눈 밖에 났다. 비슷하게 탈레반도 종교적인 이유로 우르두어 사용을 권장한다.[5]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수피 가문에서 태어났음에도 수피즘을 극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