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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기사단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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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기사단국
Deutschordensstaat
Staat des Deutschen Ordens
폴란드 왕국의 봉신국(1466 ~ 1525)
파일:튜튼 기사단 깃발.svg 파일:튜튼 기사단 문장.svg
국기 국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4px-Ordensland1410.png
[1]
1230년 ~ 1525년
위치 <colbgcolor=#fff,#191919>발트 지역
수도 마리엔부르크[2](1230 ~ 1454) →
쾨니히스베르크(1454 ~ 1525)
정치체제 군정
국가원수 기사단장(호흐마이스터)
언어 저지 독일어, 고대 프로이센어,
라틴어
종교 가톨릭
종족 프로이센 독일인, 발트계 프로이센인, 에스토니아인
통화 마르크
성립 이전 튜튼 기사단
에스토니아 공국
프루사[3]
멸망 이후 프로이센 공국, 왕령 프로이센
현재 국가 라트비아, 러시아, 리투아니아,
스웨덴, 에스토니아, 폴란드

1. 개요2. 역사
2.1. 기사단국 건국 이전2.2. 기사단국 건국과 발전2.3. 쇠퇴와 해체
3. 기사단장의 통치4. 조직과 이념5. 여담6. 참고 문헌7. 관련 문서

언어별 명칭
저지 독일어 Ordensstaat / Prüßen
독일어 Staat des Deutschen Ordens
/ Ordensstaat / Preußen
라틴어 Civitas Ordinis Theutonici
/ Borussia / Prussia
폴란드어 Państwo zakonu krzyżackiego / Prusy
영어 State of the Teutonic Order

[clearfix]

1. 개요

1230년부터 1525년까지 발트 지역에 존재했던 튜튼 기사단의 국가. 독일에서 '기사단국가'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독일 기사단국을 가리킨다.

2. 역사

1편, 2편

2.1. 기사단국 건국 이전

튜튼 기사단1190년 예루살렘에서 십자군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기사 수도회로 처음 세워졌고, 1198년 이교도와 싸우는 기사단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1209년 헤르만 폰 잘차(Hermann von Salza)가 4번째 기사단장이 되자 튜튼 기사단은 신성 로마 제국황제이자 시칠리아 왕국 국왕 프리드리히 2세와 협력 관계을 맺으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예루살렘 왕국에서 벗어나 기사단 만의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 헤르만 폰 잘차는 1211년 헝가리 왕국크로아티아 왕국의 국왕 언드라시 2세(András II)의 구호 요청을 받아들여 에르데이 지역으로 군대를 옮겼다. 그리고 기사단은 헝가리를 쿠만족으로부터 방어해주는 조건으로 버르처사그(Barczaság)[4] 지역을 하사받았다. 이후 기사단은 독일 이주민을 이주시키고 도시를 지었다. 하지만 기사단을 시기와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던 헝가리 귀족들은 때마침 5차 십자군에 참가했다가 참담한 실패를 겪은 후 고국으로 돌아온 언드라시 2세에게 기사단에게 하사한 영지를 회수할 것을 요구했다. 언드라시 2세는 처음에는 이 요구를 거절했으나 역시 기사단을 고깝게 본 언드라시의 장남인 에르데이 공작 벨러(Béla, 훗날의 벨러 4세(Béla IV))는 귀족들 편에 서 아버지와 갈등을 빚었고 헝가리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낀 기사단은 벨러가 왕위에 오르면 자신들과 갈등을 빚을거라 생각하고 교황 호노리오 3세에게 기사단을 헝가리 산하에서 독립시켜 교황청 직속으로 놓아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독립 시도는 곧바로 발각이 되었고 기사단의 배신에 격노한 언드라시 2세는 1225년 기사단을 에르데이에서 추방했다.

헝가리에서 쫓겨난 기사단은 1226년에 폴란드 왕국의 마조프셰[5]콘라트 1세(Konrad I Mazowiecki)와 새로운 계약을 맺었다. 콘라트는 기사단을 프루시족[6]으로부터 자신의 영지 방어 및 새로운 영토 팽창을 위한 군사로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기사단은 자신들이 프루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1230년 자신들을 후임하는 교황으로부터 프루시 지역에 대한 소유권을 확인받았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2세와 협정을 맺어 리미니의 금인칙서를 통해 소유권을 확약받았다. 기사단은 교황과 황제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쳤으며 그 사이에 폴란드 왕가와도 교류하였다.

2.2. 기사단국 건국과 발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52px-Teutonic_Order_1260.png
1230년 5월 16일 기사단은 콘라트 1세와 크루슈비츠 조약(Vertrag von Kruschwitz)을 맺었다. 조약 체결로 독일 기사단국이 건국되었다. 기사단은 프루시 원정 동안 해안 지역을 장악한 후 내륙 지방까지 손을 뻗었다. 정복한 지역에는 기사단의 성들이 지어졌으며, 이 성들은 훗날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리고 기사단에 정복된 지역에는 기독교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도시는 마리엔베르더,[7] 프라우엔베르크[8] 등이 있다.

1237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Schwertbrüderorden)이 튜튼 기사단에 병합되었다. 1240년에는 훗날 블라디미르-수즈달의 대공이 되는 알렉산드르 넵스키네바 강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참패를 당했다. 당시 기사단은 바투 칸수부타이가 이끄는 몽골 제국군의 침공을 받고 쇠약해졌던 러시아 동북지역을 침공하였다.[9] 1240년 기사단은 프스코프를 함락시켰고 이에 1242년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노브고로드 공국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다. 이 페이푸스 호 전투에서 기사단은 대패하면서 기사단은 루스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단념하게 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52px-Teutonic_Order_1410.png
기사단은 고개를 돌려 즈무쥐 지역과 리투아니아 지역을 공략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러나 강대해진 리투아니아의 반격으로 기사단의 계획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렵싸리 즈무쥐 지역을 폴란드의 양도라는 형식으로 손에 넣고 1283년까지 프루시 정복을 완료하였다. 1291년에는 리투아니아 지역을 침공하여 상당한 영토를 확보했다.

1343년 폴란드 왕국카지미에시 3세는 독일 기사단국과 영토 조약을 체결하였다. 독일 기사단국은 폴란드 왕국에게 쿠야비, 도브진 지역을 반환하는 대신, 헤움과 그단스크 지역을 카지미에시 3세로부터 하사받는 형식으로 자국에 편입시켰다.

1346년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는 19,000 쾰른 마르크에 에스토니아 공국을 기사단에게 매각하였다.[10] 이로써 기사단은 핀란드만까지 영토를 넓혔다. 기사단은 단원들을 주기적으로 보충하고자 주교구와 함께 정복 지역을 하사하는 방법을 사용하여 독일 본토로부터 기사들을 끌어들였다. 이 시기 기사단국은 국력이 신장하였고 구성 도시들 역시 발전하였다.

2.3. 쇠퇴와 해체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52px-Teutonic_Order_1466.png
그러나 15세기 이후 기사단국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동유럽에서는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혼인을 통해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11]을 결성하였다. 이 인적 연합(Unia Personalna)의 구성 이유 중 하나가 튜튼 기사단을 견제하는 것이었으므로 독일 기사단국의 몰락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12] 실제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결성은 독일 기사단국에게 크나큰 위협으로 다가왔고 결국 양국 사이에 전쟁이 불가피해졌다.

양국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튜튼 기사단은 서유럽 기사단으로부터 원조를 받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보헤미아 왕관령의 용병대와, 타타르 군대까지 포섭하였다. 결국 1410년 튜튼 기사단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 사이에서 그룬발트 전투가 벌어졌다. 1410년 7월 15일 양국의 군대가 그룬발트에서 모여 대격전을 펼쳤다. 이 전투에는 약 2만 명이 참가했다고 추정된다. 그룬발트 전투는 기사단의 대패로 종결되었다. 한때 수도인 마리엔부르크까지 위협받았던 기사단국은 1411년 제1차 토룬 조약을 맺고 기사단국이 영유하고 있던 즈무치 지역을 할양했다.[13]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이자 폴란드 국왕이었던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는 기사단을 여러번 공격했으며 결국 1454년~1466년 벌어진 13년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제2차 토룬 조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결과 기사단은 왕령 프로이센이라고 불리는 서프로이센 지역과 동프로이센 서부 지역인 에름란트(Ermalnd)[14]를 할양하였으며 이후 기사단장은 폴란드 국왕의 봉신이 되고 기사단국은 폴란드 왕국의 제후국으로 전락했다.

그러나 독일 기사단국은 끊임없이 폴란드로부터 독립을 시도했다. 이에 폴란드는 1519년부터 1521년까지 2년 동안 기사단국과 전쟁을 벌였다. 기사단에 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무관심 속에 폴란드에게 완패한 기사단은 결국 37대 기사단장인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루터교회로 개종하고 세속화했다. 1522년 뉘른베르크 신교도 회의와 비텐베르크에서의 마르틴 루터와의 만남이 계기였다. 1525년 4월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폴란드의 제후국인 프로이센 공국을 수립했다. 이 시기 독일 기사단국 일대에도 한창 루터교회가 퍼져나가는 상황이었고, 이미 기사단원 중 상당수가 루터교회로 개종한 상태였다. 덕분에 기사단국의 세속화 조치는 주민들이나 기사단원들의 별다른 반발없이 순조롭게 이어졌으며 독일 기사단국은 해체되었다.

다만 독일 기사단국이라는 국가가 사라졌을 뿐, 그 모체인 튜튼 기사단 자체는 리보니아 지부와 독일 지부로 나뉘어 계속 살아 있었다. 리보니아 지부는 모스크바 대공국이반 4세에 의해 멸망당했고[15], 독일 지부는 1808년까지 이어지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면서 영지가 몰수된 관계로 잠시 해체되었다가 1834년 합스부르크 왕조의 후원으로 재건되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가톨릭 봉사단체로서 남아있다.

3. 기사단장의 통치

국가를 통치하는 기사단장[16]은 세습제가 아니라 선출직이었다.

독일 기사단국의 선출 체제는 교황 선출 방식과 유사한 면이 있다. 이는 기사단의 종교적 성격과 군사적 성격이 결합된 매우 독특한 통치 형태라고 할 수 있었다.

4. 조직과 이념

조직과 이념 1편, 조직과 이념 2편

5. 여담

독일 기사단국의 국기는 오늘날 스웨덴이나 덴마크북유럽 국가들이 쓰는 국기들과 다소 유사한 형태이다. 실제로도 북방 십자군 전쟁과 관련이 있다.[18] 이후 독일도 1919년과 1948년에 각각 북유럽식 십자가 도안으로 된 국기를 도입하려 했다가 무산된 역사가 있다.(#)

단, 철십자가는 프로이센 왕국에서 독일 제국나치 독일을 거쳐 현대 독일군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6. 참고 문헌

7. 관련 문서


[1] 지도의 군청색 영역. 중간에 비어있는 부분의 대부분은 주교령(로마 가톨릭 교회의 세속 영지)이다.[2] 현 폴란드 말보르크(Malbork). 기사단의 성채가 위치해있다[3] Prūsa. 발트족 계열의 선주민들이 살던 프로이센[4] 독일어로 부르젠란트(Burzenland), 당시 쿠만족이 활동하던 왈라키아와 인접한 에르데이 남동부 지역이다.[5]폴란드 마조비에츠키에로 수도 바르샤바가 있는 지역.[6] 과거 프로이센 일대에서 살던 발트계 민족이다. 프로이센이란 지명은 여기서 왔다.[7] Marienwerder, 오늘날 폴란드 크비진.[8] Frauenberg, 오늘날 폴란드 프롬보르크.[9] 참고로, 원래 기사단이 받았다가 회수당한 봉토였던 헝가리 동부 에르데이는 바투 칸의 헝가리 침공 과정에서 처참하게 파괴되었다.[10] 부왕 크리스토페르 2세와 큰아버지 에리크 6세가 말아먹은 덴마크를 재건하기 바빴던 발데마르 4세에게 멀리 있어서 관리도 안되고 돈먹는 하마였던 에스토니아는 사치에 불과했다.[11] 동군연합일 뿐 아직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12] 본격적으로 쇠퇴일로를 걷게 된 것은 1410년 그룬발트 전투의 패배 이후.[13] 그러나 즈무치 지역은 폴란드 왕국에게 영구적으로 할양되는 것이 아니라 브와디스와프 2세 서거 이후에는 다시 반환되기로 합의되었다. 토룬 조약에서 폴란드는 거액의 배상금을 기사단으로부터 받았으나, 그 대신 전쟁 중 폴란드가 점령한 여러 성들은 독일 기사단국에게 반환되었다. 즉 타넨베르크 전투는 명실상부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승리였지만 연합은 그 승리를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다만 이 전쟁의 결과 튜튼 기사단의 군사력이 확실히 와해되었다. - 정병권, '폴란드사 (세계각국사 23)', 1997, 64p[14] 폴란드어: 바르미아(Warmia). 현재의 바르미아마주리주 엘블롱크 일대.[15] 정작 리보니아 영토는 폴란드-리투아니아스웨덴, 덴마크가 나누어가졌고 모스크바 대공국은 아무 영토를 얻지 못했다.[16] Hochmeister 또는 Grand Master라고 불렸다.[17] 프로이센 부터는 지도자가 선출직이 아닌 세습제(왕족)로 바뀌고 대대로 물려주게 됨.[18] 덴마크 국기는 발데마르 2세에스토니아 십자군 과정에서, 스웨덴 국기는 에리크 9세핀란드 십자군 과정에서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