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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코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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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 결혼으로 인한 황적이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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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히토 친왕비 키코
文仁親王妃紀子
파일:文仁親王妃紀子.jpg
<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정식 칭호 후미히토 친왕비 키코
(文仁親王妃紀子)[1]
출생 1966년 9월 11일 ([age(1966-09-11)]세)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 스루가구
오시루시[2] 부채붓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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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학력 아메리카 인터내셔널 스쿨 인 비엔나 (수료)[3]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졸업)[4]
가쿠슈인 여자고등과 (졸업)
가쿠슈인대학 문학부 (심리학과 / 학사)
가쿠슈인대학 대학원 (심리학과 / 석사)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대학원 (인문과학 / 박사[5])
종교 신토
부모 부친 가와시마 다쓰히코(川嶋 辰彦)[6]
모친 가와시마 가즈요(川嶋 和代)
형제 남동생 가와시마 슈(川嶋 舟)[7]
배우자 황사 후미히토 친왕
자녀 장녀 코무로 마코
차녀 카코 내친왕
장남 히사히토 친왕
}}}}}}}}} ||
파일:키코 비 쥬니히토에.jpg
코우치기(小袿)를 입은 키코 비

1. 개요2. 생애3. 논란
3.1. 친정 문제

[clearfix]

1. 개요

일본 상황 아키히토의 작은아들인 후미히토 친왕의 아내(친왕비). 아키히토미치코 상황후의 작은며느리이며, 코무로 마코·카코 공주·히사히토 친왕의 어머니이다. 결혼생활 16년 만에 일본 황실에서 유일한 아들을 낳았다.

2. 생애

2.1. 결혼 전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키코 비/결혼 전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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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키코 비/kawashima3.jpg
가쿠슈인 여자고등과 시절의 모습

친가인 가와시마 가문은 대대로 학자, 교수, 의사 등이 많이 나온 학구적인 집안이었다고 한다. 미국유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귀국자녀이다. 귀국 후에는 가쿠슈인편입학했다. 학창 시절에는 밝고 명랑한 성격에, 부지런한 노력파로 성적도 우수했으며, 청순한 외모로 남학생들에게 인기도 많았다고 한다.

남편 후미히토 친왕과는 가쿠슈인대학 시절 캠퍼스 커플로 만나 교제하다가 1989년 약혼, 1990년 결혼했다.

2.2. 결혼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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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iko1.jpg
1990년 6월 29일, 시집가는 날 아침의 키코 (당시 만 23세).

시어머니 미치코 상황후나 형님 마사코 황후와는 다르게, 스스로 원하여 일본 황실로 시집왔다고 한다. 황실에 잘 적응하여 살면서 공무도 열심히 하고, 황실 가족들에게도 사근사근 상냥하게 잘 하고,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어 금방 두 공주를 낳았으며, 특히 41년 동안 후계자(남성)가 없던 황실에서 아들 히사히토를 낳아 황실과 국민들로부터 환호를 받았으며, 황실에서의 입지를 굳혔다.

5월에 시아주버니인 나루히토 황태자가 황위에 오르며 히사히토는 황위계승 서열 2위가 되었다.

그러나 갑질 논란으로 일본 여론이 점점 안 좋아지면서 남편아들의 승계가 위험해지게 되었다. 여기에 손윗동서인 마사코 황후의 병 회복을 방해했다는 말까지 있어서 점점 일본 국민들의 키코 비의 이미지가 막장으로 가는 데다, 그 편 들어주던 궁내청도 키코 비의 시종이 되는 것을 꺼리는 등 큰딸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이 더 커짐에 따라 국민 밉상이 되었다.

마코 공주 사건이후 황위 계승권 2위인 자신의 아들 히사히토에게 희망을 걸기 시작하면서 황족찬스를 사용해가며 실력도 없는 히사히토를 도쿄대에 넣으려는 스펙업 행동에 일본 국민들은 더이상 황족찬스는 불공정하다며 황실에 대한 비판이 강해지고 있다.

2.2.1. 황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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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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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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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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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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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2.2.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배우자
1녀 코무로 마코
(小室眞子)
1991년 10월 23일 ([age(1991-10-23)]세) 코무로 케이
2녀 카코 내친왕
(佳子内親王)
1994년 12월 29일 ([age(1994-12-29)]세)
1남 히사히토 친왕
(悠仁親王)
2006년 9월 6일 ([age(2006-09-06)]세)

3.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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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친정 문제

파일:tatsuhiko.jpg
결혼 전, 아버지와 함께.
키코 비의 아버지 가와시마 다쓰히코 교수는 일본에서 괴짜로 유명했다. 외국 유학을 오래 한 영향인지 성격이 괄괄했다고 한다. 위에 나와 있다시피 딸의 결혼 문제로 황거에서 난리를 친 적도 있고, 사위 후미히토 친왕의 망나니 기질 때문에 아키히토 천황에게 직접 찾아가 담판지은 적도 있다고. 상대가 상대인 만큼 감히 화내진 못하고 완곡한 어조로 종용했다고는 하지만 일단 군주에게 담판 지으러 찾아갔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이다.

2021년 11월 4일에 타계했다.[8] 향년 81세.

어머니 가와시마 가즈요는 딸이 황실로 시집 가길 원해서, 황실 예법 등을 가르쳤다고 한다.

남동생 가와시마 슈는 아내의 간통으로 인해 이혼했다고 한다. 슈는 2006년 4월, 다시로 마사미(田代麻紗美)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이 결혼은 속도위반이라는 말도 있다고. 마사미는 소마 나카무라(相馬中村) 신사신관인 타시로 세이신(田代誠信)의 장녀이며 보조 신관이었는데, 수의사인 슈는 후쿠시마현 이와키시의 한 목장에서 일하다가 마사미를 만났다고 한다.

그러나 마사미는 도호쿠 대지진 구호 활동에서 알게 된 한 남성과 부적절한 관계가 되었고, 5살인 딸도 제대로 돌보지 않고 방임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결국 슈와 마사미는 이혼하고, 딸은 슈가 키우게 되었다고.

후쿠시마현 소마시는 지방의 좁은 지역 사회이며, 소마 나카무라 신사는 역사와 전통이 오래 된 신사. 게다가 마사미는 퍽 화려한 외모의 여성이라는 듯[9]하다. 때문에 마사미의 행동은 단번에 주목 받을 수밖에 없었고, 지역 주민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아 마사미는 신사의 제사에 일절 참가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2019년 보도에 의하면 가와시마 슈는 2017년부터 NPO 회장으로 있으면서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 복구 관련 업무를 수행했는데, 이 과정에서 누나의 이름을 팔아서 활동하다가 돈 문제로 결국 사임했다는 보도가 나온 바 있다.

2019년 5월 말 한 보도에 의하면 아버지 가와시마 다쓰히코 교수와 친분이 있는 일본 최초의 프렌차이즈 파칭코 회사를 세운 미쓰이 사장이 함께 한국에 비밀리에 방문했다는 것에 궁내청은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미쓰이 사장은 조총련 본부 매각에 관여한 의혹도 있는 데다 본인이 부인하긴 했지만 민단 니가타 지부에서 직원과 싸운 적도 있으며, 과거 도쿄 지방 검찰청 특수부로부터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압수수색을 당하는[10] 등 문제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

이러한 보도가 나가자마자 가뜩이나 키코 비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가 더 안 좋아지고 있다. 코무로 케이마코 공주결혼 문제와 맞물려서 키코 비의 친정 가족들이 황실을 팔아 자신의 사적 이득을 취하고 있는 것[11] 으로 보여 일본 국민들의 키코 비에 대한 안 좋은 이미지는 더 확대될 전망이다.

[1] 한국에서는 비공식적으로 '키코 왕자비' 혹은 '키코 왕자빈'이라고도 한다.[2] お印.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3] 공립초등학교에 다니다가 가쿠슈인 초등과에 편입학했다. 그러나 졸업하지는 못하고, 중간에 가족과 오스트리아로 떠났다.[4] 오스트리아에서 귀국하여 중간에 편입학.[5] 박사학위논문 : 結核予防の意識と行動について : 結核予防婦人会講習会参加者・女子大学生の調査より (2013). 보고번호(박사논문)가 을호(乙号)박사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논문박사이다.[6] 1940년 4월 20일 ~ 2021년 11월 4일(향년 81세)[7] 1973년생, [age(1973-01-01)]세. 수의학박사(학위논문). 현재 도쿄농공대학 준교수이다.[8] 부고 소식[9] 얼굴이 나온 2012년 신문 기사(링크)[10] 보통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로부터의 압수수색은 유럽 등에서 인권 탄압 등이라고 불릴 정도로 당사자의 장기간 구속을 위한 사전 작업임을 감안하면, 그는 압수수색 이후에도 구속되지는 않았기에 당시에도 이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말이 있었다고 한다[11] 혹자는 이를 두고 "키코 비도 일본 국민들의 지탄을 받고 있는 코무로 케이 일가와 하등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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