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FFB6C1> 라이닝겐 후작부인 &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부인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빅토리아 공녀 Prinzessin Victoire von Sachsen-Coburg-Saalfeld | ||
<colcolor=#000000> 이름 | 독일어 | 마리 루이제 빅토리아 (Marie Louise Victoire) |
영어 | 메리 루이즈 빅토리아 (Mary Louise Victoria) | |
출생 | 1786년 8월 17일 | |
신성 로마 제국 작센코부르크잘펠트 코부르크 | ||
사망 | 1861년 3월 16일 (향년 74세) | |
영국 윈저 버크셔 프로그모어 하우스 | ||
배우자 | 제2대 라이닝겐 후작 에미히 카를 (1803년 결혼 / 1814년 사망) | |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1818년 결혼 / 1820년 사망) | ||
자녀 | 카를, 페오도라[1], 빅토리아 여왕 | |
아버지 |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 | |
어머니 |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여백작 | |
형제 | 조피, 안토이네테, 율리아네[2], 에른스트 1세, 페르디난트[3], 레오폴드 1세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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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작센코부르크잘펠트의 공녀이자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 페르난두 2세, 에른스트 2세, 앨버트 공, 레오폴드 2세, 멕시코의 황후 카를로타의 고모이다.2. 생애
작센코부르크잘펠트 공작 프란츠와 로이스에베르스도르프의 아우구스테 여백작의 3남 4녀 중 4녀로 태어났다. 오빠 에른스트 1세는 사위 앨버트 공의 아버지이고, 남동생 레오폴드 1세는 시조카 샬럿 어거스타 공주의 남편이자 벨기에의 초대 국왕이다.1803년 이모부인[4] 제 2대 라이닝겐 후작 에미히 카를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낳는다. 1814년 남편이 사망한 후 어린 아들을 대신하여 섭정했다.
4년 뒤인 1818년 조지 3세의 4남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와 재혼한다. 결혼 직후 가진 아이가 바로 빅토리아 여왕인데, 당시 왕위를 계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왕자의 형 조지 4세, 윌리엄 4세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차기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빅토리아 공주를 낳은 이후 남편 에드워드 왕자는 채 1년이 되기도 전에 사망한다.
영국에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던 빅토리아는 남편의 시종인 존 콘로이 경에게 의지하게 되고, 장차 여왕이 될 빅토리아 공주를 압박했다. 결국 빅토리아 공주는 어머니를 싫어하게 되었고, 1837년 왕위에 올랐을 때는 그 갈등이 극에 달해 있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좋아지기 시작한 것은 빅토리아 여왕이 1840년 11월 21일에 첫 딸 프린세스 로열 빅토리아를 낳은 이후라고 한다.
한편 윌리엄 4세와도 관계가 나빴는데, 윌리엄은 마리 루이제 빅토리아가 너무 노골적으로 빅토리아 공주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간섭하는 모습을 불편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윌리엄 4세와 애들레이드 왕비는 빅토리아 공주를 친딸처럼 매우 아꼈는데, 마리 루이제는 빅토리아가 다른 왕족들과 만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윌리엄 4세 부부와도 잘 만나게 하지 않았다. 결국 윌리엄의 생일 만찬 때 이 반감이 폭발해서 윌리엄 4세는 "나는 빅토리아 공주가 성인이 될 때까지 살 테니까 당신들(빅토리아와 존 콘로이)은 섭정 따위는 꿈도 꾸지 마시오!"라고 일갈했을 지경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실제로 윌리엄 4세는 빅토리아 공주가 법적 성인인 만 18세가 된 지 26일 뒤 사망했다.
1861년 3월 16일 딸 빅토리아 여왕의 옆에서 눈을 감았다. 여왕은 생전 어머니를 미워하기도 했으나 그녀가 사망한 후 슬퍼했다고 한다.
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제2대 라이닝겐 후작 에미히 카를 (Emich Karl, 2rd Prince of Leiningen) | ||||
1남 | 제3대 라이닝겐 후작 카를 (Carl, 3rd Prince of Leiningen) | 1804년 9월 12일 | 1856년 11월 13일 | 마리아 클레벨스부르크 백작부인 슬하 2남 |
1녀 |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비 페오도라 (Feodora, Princess of Hohenlohe-Langenburg) | 1807년 12월 7일 | 1872년 9월 23일 | 호엔로에랑엔부르크 공 에른스트 1세 슬하 3남 3녀[5] |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Duke of Kent and Strathearn) | ||||
2녀 | 빅토리아 여왕 (Queen Victoria) | 1819년 5월 24일 | 1901년 1월 22일 |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알베르트 공자 슬하 4남 5녀[6] |
[1] 빌헬름 2세의 황후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부인 카롤리네 마틸데의 외조모이다. 따라서 페오도라는 콘스탄티노스 2세, 펠리페 6세, 칼 16세 구스타프의 모계 조상이 된다. 페오도라의 외손녀 아우구스테 빅토리아의 외손녀 프리데리케의 친아들이 콘스탄티노스 2세이고 외손자가 펠리페 6세이며, 또 다른 외손녀인 카롤리네 마틸데의 딸 빅토리아 아델하이트(카를 에두아르트의 아내)의 외손자가 칼 16세 구스타프이기 때문.[2] 콘스탄틴 대공(파벨 1세의 차남)의 아내였지만 1820년에 이혼했다.[3] 포르투갈 국왕 페르난두 2세의 아버지이자, 불가리아 왕국의 차르 페르디난트 1세의 할아버지이다.[4] 에미히 카를의 전처 헨리에테가 빅토리아의 이모이다. 전처 소생의 외아들 프리드리히는 요절했기에, 라이닝겐 후작 자리는 빅토리아 소생의 아들인 카를이 이어받있다.[5] 그 중 차녀 아델하이트가 독일 제국의 황후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부인 카롤리네 마틸데의 어머니이다.[6] 독일 제국의 황후 빅토리아, 에드워드 7세, 헤센의 대공비 알리체,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알프레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크리스티안 공자비 헬레나, 코넛과 스트래선 공작 아서 왕자, 아가일 공작부인 루이즈, 올버니 공작 레오폴드 왕자, 바텐베르크의 하인리히 공자비 베아트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