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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09:35:53

카밀로 카보우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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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밀로 카보우르
Camillo Cavour
파일:Camillo_Benso_Cavour_di_Ciseri.jpg
본명 카밀로 파올로 필리포 줄리오 벤소
Camillo Paolo Filippo Giulio Benso
작위 카보우르·첼라렝고·이솔라벨라 백작
Conte di Cavour, di Cellarengo e di Isolabella
출생 1810년 8월 10일
프랑스 제1제국 토리노
사망 1861년 6월 6일 (향년 50세)
이탈리아 왕국 토리노
국적 파일:이탈리아 왕국 국기.svg 이탈리아 왕국
직업 정치인, 외교관
정당 왕당파, 역사적 우파
서명 파일:카밀로 카보우르 서명.svg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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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 왕국정치가.

본명은 카밀로 파올로 필리포 줄리오 벤소(Camillo Paolo Filippo Giulio Benso)로, 카보우르피에몬테에 위치한 도시이자, 그의 작위를 상징하는 영지(領地)이다. 주세페 마치니, 주세페 가리발디와 함께 이탈리아 건국 3걸로 꼽히며, 이탈리아 통일의 실질적인 주역이었다.[1]

카보우르가 태어난 토리노피에몬테어 사용 지역으로서 o가 /u/ 발음이라 Cavor로 쓰고 [kaˈʋʊr](카부르)로 읽는다. 이탈리아어로도 프랑스어처럼 Cavour로 쓰고 [kaˈvur](카부르)로 발음하는 예외적 사례인데, 외래어 표기법이 만들어질 때 이런 예외를 인지하지 못해 표기가 '카보우르'가 되어버렸다. 과거 자료를 보면 카부르라 적힌 걸 확인할 수 있으며, 1980년대 말에 나온 계몽사 학습만화《세계사》[2]에서도 '카밀로 카부르'라 표기했다.

2. 생애

나폴레옹 치하 프랑스 제1제국[3]의 토리노에서 미켈레 벤소 제5대 카보우르 후작(Michele Benso, V marchese di Cavour)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아델라이드 드 셀롱(Adélaïde de Sellon)은 제네바 출신의 프랑스인이었으며, 게다가 대부모(代父母)가 무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동생 폴린(Pauline)과 그의 남편 카밀로 보르게세(Camillo Borghese)였다. 그의 이름인 카밀로도 대부의 이름을 따 온 것이다.

10살 때 토리노 사관학교에 입학했고, 1824년 6월에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왕 카를로 알베르토의 시종이라는 칭호를 수여받았다. 강한 고집으로 사관학교의 규율에 잘 적응하지 못했으며, 한 번은 사관학교 내에서 금서로 지정된 을 열람해 하나와 만으로 삼일을 버티도록 처벌받은 적도 있었다.
1827년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공병 장교로 임관하여, 1831년 11월까지 군에서 복무했다. 제대한 후에는 가족영지였던 그린차네(Grinzane)를 경영하였다. 그는 정치적인 변화에 앞서 경제적인 변화가 선행된다고 믿었기 때문에 철도, 운하등의 기반 시설과 농업 기술에 대한 투자에 적극적이었다. 증기 기관의 열성적인 후원자였으며, 이탈리아인 지주로서는 최초로 화학 비료를 도입하기도 했다.[4]

1847년리소르지멘토》지를 발간하여 사보이아 왕가를 중심으로 하는 이탈리아의 통일을 제창하였다.

크림 전쟁에 참전하여 훗날의 통일전쟁 수행에 있어 강대국영국프랑스의 도움을 받고자 했으며, 결국 이러한 외교전략은 성공을 거두어 나폴레옹 3세로부터 이탈리아 통일을 지원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롬바르디아베네치아를 차지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왕가를 몰아내기 위해 1859년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을 일으켜 프랑스군의 지원을 받으며 대(對) 오스트리아 전쟁에 나섰다. 사르데냐-프랑스 연합군은 오스트리아 제국군을 완파하고 전면적 승리를 거두기 직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프랑스군이 빌라프란카[5] 강화 조약을 맺어 전쟁터에서 일제히 발을 빼는 배신을 행함과 동시에 나폴레옹 3세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에게 여태까지 얻은 성과로 만족하고 전쟁을 멈추라는 권고를 했다. 프랑스의 배신에 격분한 카보우르는 단독으로라도 대 오스트리아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지금까지 얻은 성과조차 모두 날리고 프랑스까지 적대할 수는 없다는 판단에 나폴레옹 3세의 권유를 받아들여 전쟁을 멈추고 북이탈리아 일대에서 오스트리아 세력을 축출하는 데에 만족했다. 그러나 여전히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피렌체, 로마[6] 등의 중부 이탈리아는 병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년 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토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중부 이탈리아를 병합하는 조건으로 니차(Nizza)[7]왕실의 발원지인 사보이아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1860년, 로마와 북부지방의 일부를 제외한 지역에서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중-북부 이탈리아를 장악한 대(大)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건설했다. 또한 양시칠리아 왕국을 전복시키려는 주세페 가리발디의 원정을 지원하였고[8], 원정이 대성공으로 끝난 1861년 양시칠리아 왕국까지 사르네댜-피에몬테 왕국으로 합병되면서 로마와 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전 지역이 통일되었다. 카보우르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초대 총리로 임명되었으나 신생 통일국가에 산적한 문제들을 해결하고 아직 회복하지 못 한 로마베네치아를 수복해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격무에 시달리던 중 말라리아에 걸려 총리가 된 지 3달 만인 1861년 6월 6일 사망했다.

3. 기타



[1] 오스트리아 제국 산하에 있던 롬바르디아 탈환과 중부의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파르마 공국 병합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하였으며, 가리발디를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가도록 회유한 장본인이다.[2] 박흥용 그림, 이원복 감수[3] 이 무렵 사보이아 왕조는 본토인 피에몬테를 프랑스에게 뺏기고 사르데냐로 피난가 있었다.[4] 의외로 화학 비료 자체는 19세기부터 어느정도 도입되었고 본격화된 것은 프리츠 하버의 질소 고정법.[5] 현재 프랑스 알프마리팀 빌프랑슈쉬르메르.[6] 이 당시 로마는 교황령이었다.[7] 현 프랑스 니스[8] 그러나 가리발디는 카보우르를 굉장히 싫어했다. 통일을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고 하지만 자신의 고향인 니차를 프랑스에 양도했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