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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란체스코 크리스피(Francesco Crispi)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가이자 이탈리아 왕국의 11대 총리이다. 1887년~1891년과 1893년~1896년 동안 총리로 재임했으며[1], 이탈리아사 뿐만 아니라 유럽 국제 외교사에서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윌리엄 글래드스턴 등과 엮여 자주 등장하는 이름이다.2. 생애
프란체스코 크리스피는 양시칠리아 왕국 팔레르모 인근 알바니아인 공동체[2]인 팔라초 아드리아노에서 태어난 알바니아계 시칠리아인이다. 팔레르모에서 공부를 하며 자유주의와 리소르지멘토 사상을 습득했고 1848 혁명과 연동된 1차 통일 전쟁때 팔레르모 봉기에 참여해 혁명 시칠리아 의회의 일원으로 참석하나 양시칠리아군이 다시 시칠리아를 점령하자 프랑스를 거쳐 사르데냐 왕국의 토리노로 망명한다. 토리노에서 주세페 마치니와 친분을 쌓고 마치니의 혁명운동에 연루되어 피에몬테에서도 추방당해 런던과 파리를 전전한다.1859년 주세페 가리발디의 붉은셔츠단 원정에 합류해 가리발디의 측근으로 현지 세력과의 정치적 협상을 담당한다. 크리스피는 농민들에겐 혁명과 억압 철폐를, 혁명가들에겐 통일을, 지주와 중간농들에겐 사유재산 보호를 보장하겠다 주장하며 교묘하게 모든 계층을 가리발디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정치술을 보인다. 크리스피는 가리발디 정권 하에서 장관을 맡으며 사르데냐 왕국에의 복속과 카밀로 카보우르에 격렬히 반대하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지자 사임하고 가리발디는 남부를 사르데냐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에게 헌납해[3] 통일 이탈리아는 왕국이 된다.
크리스피는 1861년 통일 하원에서 역사적 좌파(Sinistra storica)의 의원으로 선출되어 정계 은퇴까지 하원의원 직을 유지한다. 크리스피는 원래 마치니, 가리발디와 친밀한 급진 공화주의자였지만 이미 기정사실이 된 왕정 지지로 선회, 이후에는 통일 이탈리아 왕국의 정치인으로서 행동한다. 1877년 역사적 좌파의 첫 총리인 아고스티노 데프레티스 내각에서 내무부 장관을 맡기도 하며 정치활동을 벌이다 데프레티스 사망 후 당의 지도자가 되어 1887년 최초의 남부 출신 총리가 된다.
1기 크리스피 내각은 토지 재분배 시도, 선거권 확대 등의 진보적인 국내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나 권위주의적 태도로 악명을 떨치는 면모도 보인다.[4] 크리스피는 대외적으론 팽창주의와 식민지 확대를 추구해 에티오피아 제국의 메넬리크 2세와 1889년 우찰레 조약을 체결해 이탈리아의 에리트레아 영유를 인정받고 에티오피아의 외교권 박탈을 시도한다.[5] 또, 자신의 알바니아계 혈통을 이용해 오스만령 알바니아에 영향력을 끼치려 시도했다. 또 이탈리아 통일이 끝난 이후 민족주의 열기가 식어버렸다는 점을 의식하며 전통적으로 이탈리아의 걸림돌이었던 프랑스와의 성전으로 민족 의식을 고취하고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 강대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일환으로 그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친밀히 지내며 프랑스와 전쟁을 하자고 부추기고 보호무역 관세전쟁을 통해 프랑스와 싸우려 한다. 하지만 이는 농업국가 이탈리아의 농산물 수출에 치명타로 작용해 경제는 침체되었고[6] 비스마르크는 필요하지도 않은 프랑스와의 전쟁에 미온적이었다. 보호무역이 당시 세계 추세였고 크리스피의 정책이 후일 공업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으나 그의 인기는 떨어졌고 결국 우찰레 조약을 둘러싼 에티오피아의 갈등과 정부 적자 문제로 1891년 총리직에서 사임한다.
그러던 중 1892년 말 로마 은행 스캔들이 터진다. 크리스피 또한 스캔들에 엮여 이미지에 타격을 입으나[7] 스캔들로 사임한 조반니 졸리티를 대신해 다시 1893년 총리 자리에 앉아 졸리티를 로마 은행과 연루된 비리로 공격한다. 한편 1889년부터 그의 고향 시칠리아에서 보호무역으로 인한 경제 침체 등으로 인해 파시(Fasci)라는 풀뿌리 사회주의 자치 운동이 일어난다.[8] 시칠리아 각자의 170여개 파시 조직은 지주와 광산 자본가들에게 임금 정상화, 공유지 재분배, 지방세 인하 등을 요구한다. 대다수가 지주인 남부 출신 의원들은 총리 자리에 다시 앉은 크리스피에게 강경 진압을 요구하며 압박했고 1894년 크리스피 내각은 시칠리아에 4만여명의 병력을 투입해 파시 운동을 잔혹하게 진압한다.
1894년 크리스피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암살 시도가 있었고 이와 함께 의회의 반대로 인한 개혁 정책 실패가 겹쳐 크리스피는 의희제에 회의감을 느끼며 권위주의적 반대파 탄압, 법률보단 왕실 훈령에 의한 통치, 대통령제 검토 등을 일삼으며 권위주의 독재 우려를 낳는다.[9] 같은 시기, 로마 은행 스캔들 연루로 궁지에 몰린 조반니 졸리티가 법정에 크리스피와 로마 은행의 관계를 담은 증거물을 제출하며 그에게 타격을 입히고 화려하게 부활하나 이것이 정권 지지율에 영향을 주진 않는다. 하지만 에티오피아 식민화를 추구하며 일으킨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이 아도와 전투로 처참히 패전하며 1896년 결국 총리직을 사임한다. 총리 사직 이후로도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다 1901년 건강 악화로 사망한다.
[1] 이탈리아 왕국은 총리 임기를 셀 때 1인 1대로 세어 한 사람이 두번 재임했어도 대수를 한번만 센다.[2] 시칠리아를 비롯한 남이탈리아에는 알바니아인 공동체 뿐만 아니라 카탈루냐인 공동체, 그리스인 공동체 등 주류 이탈리아 라틴계 문화와 동떨어진 문화의 공동체들이 점조직으로 존재했다.[3] 이를 테아노의 악수라고 부른다.[4] 젊은시절 크리스피가 급진 공화주의, 자유주의자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인 부분.[5] 이 우찰레 조약이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의 원인이 된다.[6] 특히 그의 고향인 남부의 과일 수출에 타격을 입혔다.[7] 크리스피 내각기에 로마 은행의 문제를 담은 보고서가 발간되나 크리스피 총리와 조반니 졸리티 당시 재무장관은 이를 묻는다. 본인들이 불법 무이자 대출에 엮인건 덤.[8] 20여년 뒤 등장한 파시즘의 어원이 되는 운동이다.[9] 역사학자들 중에는 크리스피의 권위주의적 행보룰 두고 베니토 무솔리니의 전임자라고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