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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이름을 딴 전남 순천시의 종합병원에 대한 내용은 성가롤로병원 문서 참고하십시오.출생 | <colbgcolor=#ffffff,#191919>1538년 10월 2일 |
밀라노 공국 아로나 궁전 | |
사망 | 1584년 11월 3일 (향년 46세) |
밀라노 공국 밀라노 | |
국적 | 이탈리아 |
종교 | 가톨릭 |
직책 | 교황청 국무원장 프란치스코회 지도 사제 가르멜회 지도 사제 구호기사단 지도 사제 밀라노 대교구장 트리엔트 공의회 교리서 편찬 위원회장 그리스도인 교리 신심회 설립자 성 암브로시오의 헌신회(현재 성 가롤로의 헌신회) 설립자 |
성인명 | 성 가롤로 보로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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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복 | 1602년 5월 12일 (교황 클레멘스 8세) |
시성 | 1610년 11월 1일 (교황 바오로 5세) |
축일 | 11월 4일 |
수호 | 주교, 교리 교사, 복부 질환 및 궤양 환자, 정신적 지도자, 신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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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성인이자 가톨릭 추기경이다. 가톨릭 개혁 시대를 주도한 인물 중 하나로서 그는 일생 동안 교회의 발전을 위해서 언제나 분주히 일하고 과감한 개혁들을 단행했으며, 그에 따른 상당한 성과들을 달성했다. 보로메오는 또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제도적 지원책을 마련해 도와주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봉사까지 하여 이들을 보살피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다.2. 생애
2.1. 유년 및 청소년 시기
명망 있는 가문인 보로메오 가문의 아로나 백작 지베르토 2세와 유서 깊은 귀족 가문 메디치 가문 출신인 마르게리타 데 메디치 사이에서 태어났다. 카를로 보로메오가 12세쯤 되었을 무렵,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봉사하고자 하는 열망이 커서 산 그라티니아노 수도원에 입회하여 삭발례[1]를 받았다. 그 후 카를로 보로메오는 자신의 삼촌 줄리오 체사레 보로메오로부터 수도원장 직책을 위임받았으며, 그는 수도원장으로서 번 수입을 전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사업에 사용하였다. 1552년, 그는 14세라는 어린 나이에 파비아 대학교에 입학해 민법과 교회법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1554년 16세일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형인 페데리코 백작과 같이 가족 부양의 책임을 떠맡게 되어 대학 공부를 잠시 그만두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학업에 몰두하였으며 1559년에 최종적으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하였다.2.2. 로마 시기
1559년 카를로 보로메오의 어머니 마르게리타의 오빠, 즉 카를로 보로메오의 외삼촌인 조반니 안젤로 메디치 추기경이 콘클라베에서 과반수의 득표를 얻어 교황 비오 4세로 선출되었다. 예부터 쭉 자신의 조카를 눈여겨보았던 비오 4세는 그를 로마로 불렀다. 이듬해 1560년에는 22세였던 카를로 보로메오를 추기경으로 임명한 뒤 교황청 국무원장과 국새상서직을 맡기는 파격적인 인선을 단행했다. 교황은 또한 그를 프란치스코회, 가르멜회, 그리고 구호기사단의 지도 사제로도 임명하였다. 매우 젊은 나이에 교회내 강력한 권력자의 위치에 오른 카를로 보로메오였지만, 항상 겸손한 자세로 성실히 업무를 수행해 교황은 물론 주변 원로들 사이에서도 좋은 평판을 얻었다.특히 1562년에서 1563년인 트리엔트 공의회 제3회기 동안 카를로 보로메오는 공의회 운영의 훌륭한 지도자로서 임무를 수행했고, 마지막 회기에서 공의회가 결정한 칙서들을 성문화하는 데에 이바지하여 가톨릭 내 종교 개혁과 쇄신의 기틀을 마련하는 큰 공로를 이루었다.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이룩한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교리서 편찬 위원회를 통해 트리엔트 교리문답을 초안 감수 및 발간한 것이다.
2.3. 밀라노 대교구장 시기
1565년 27세가 되던 무렵, 카를로 보로메오는 교황청의 강력한 신임을 얻었고, 곧이어 비오 4세는 그를 밀라노 대교구장에 임명하였다. 그는 학자들의 교육을 위해 학술협회를 세웠으며, 자신의 모교 파비아 대학교에 거액을 기부하였다. 아울러 그는 교회 차원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제도적 지원 방책을 마련하여 널리 보급하였다.1566년 삼촌 교황 비오 4세가 사망하자 카를로 보로메오는 콘클라베에 참석하였다. 당시 가톨릭 교회 내에서 교황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카를로 보로메오는 가장 유력한 차기 교황 후보로 떠올랐지만, 보로메오 자신은 교황직이 부담스럽다며 이를 거절하였다. 대신 그는 이단심문소의 대심문관인 안토니오 기슬리에리를 지원했고, 카를로 보로메오와 그의 추종자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안토니오 기슬리에리는 교황 비오 5세가 되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카를로 보로메오의 유능함을 높이 샀던 비오 5세는 그를 자신의 고문으로 삼고자 했지만, 카를로 보로메오는 교황에게 간청하여 고위직 제안을 마다하고 다시 밀라노 대교구로 돌아왔다. 밀라노 대교구는 오랜 기간 동안 교구장이 공석이었기 때문이다.
카를로 보로메오는 더욱 분골쇄신하였다. 그는 교구 내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도 높은 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또한 개혁과 쇄신 운동의 하나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윤리와 생활 태도 개선을 위해 유익한 기준을 마련했으며, 성직자 교육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하고, 어린이들과 어른들의 종교 교육을 위한 '그리스도인 교리 신심회'를 조직했으며, 자신의 교구에서 활동하는 예수회와 카푸친 작은형제회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지원을 제도적으로 보완했고, 프랑스 북부 오드프랑스에 있는 두에 지역에 설립된 대학을 지원하는 데도 호의적이었으며, 자신의 재임 기간 동안 11차례의 교구 시노드(가톨릭 교회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모여 토론하고 결정하는 회의)와 여섯 번의 관구 공의회를 개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규칙적이고도 조직적인 사목 방문을 실시하고 여러 차례 전례를 집전하는 등 교구장으로서의 사목 활동에 전념하였다. 그중 북쪽, 사보이아 공국의 알프스 산골 지역은 그곳 신부들이 노력을 해 봐도 사목 활동에 진전이 없어 이미 포기 상태에 있었으나 그는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공작의 요청으로 그러한 곳까지 직접 방문하였다.
카를로 보로메오는 트리엔트 공의회의 정신을 바탕으로 주교좌 성당 안에 있던 화려한 무덤들과 부유한 장식품들, 깃발 등을 사치로 규정하여 철폐함으로써 성당 내부 장식을 간소화하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가문인 보로메오 일가 사람들의 기념비마저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당의 회중석을 두 구획으로 나누어 남녀가 따로 앉도록 하였다. 또한 훌륭한 사제 양성을 위해 성직자들의 교육을 위한 신학교와 사제직을 지망하는 후보자들을 위한 단체인 '성 암브로시오의 헌신회'를 설립하였고, 평신도들의 신앙심을 고취하고자 주일학교를 활성화시켰다. 이러한 과감한 개혁을 주도하여 카를로 보로메오는 밀라노 교구를 모범적인 주교좌로 만드는 큰 성과를 이루었다.
2.4. 말년
“주님, 제가 여기 대령했나이다”
카를로 보로메오의 유언
1576년에 밀라노에 흑사병이 창궐하고 기근이 불어닥치자 카를로 보로메오는 직접 병자들과 가난한 농민들을 돕고 시신을 매장하는 데 여러 가지 도움을 제공하였다. 그는 끝까지 밀라노에 남아 병자들을 일일이 찾아가 위로하며 병자성사를 주었고, 매일 3천여 명의 주민들에게 식량을 나누어주었으며, 예방법을 알려주었다.카를로 보로메오의 유언
흑사병이 잠잠해지자 카를로 보로메오는 영국 선교 길에 오르는 수많은 젊은 사제들을 접견하고 지원했으며, 밀라노 외에도 여러 교구를 방문해 개혁을 촉구하였다. 1583년에는 교황 사절로서 스위스까지 방문해 그 지역의 프로테스탄트들을 상대로 설교하기도 했다.
카를로 보로메오는 과로로 인해 점차 체력이 소모되어 건강이 급격히 안 좋아져 결국 은퇴했다. 1584년 10월에 그는 몬테 바랄로에서 피정과 휴식을 마치고 심한 고열을 앓아 밀라노로 돌아갔고, 같은 해 11월 3일 밤에 사망하였다.
3. 평가
가톨릭 개혁 운동을 주도해 결과적으로는 종교적인 개혁과 쇄신의 기틀을 공고히 다지는 데에 일조를 했지만, 그 과정 속에는 과감하고도 엄격한 방식으로 개혁을 밀어붙여 당시 만연했던 가톨릭교회의 체계에 익숙한 성직자들과 정치 관료들의 반발도 심했다. 하지만 서민적인 관점으로 볼 때 일반 신도 및 주민들에게는 부패와 불공정이 득세했던 가톨릭 교회와 막 부흥하고 있던 프로테스탄트로 인해 어수선했던 분위기를 바로잡는 그의 개혁이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그렇게 자신의 개혁적인 소신으로 인해 적을 두었지만, 신념적인 영역을 떠나서 카를로 보로메오의 인품에 대해서는 추종 세력이든 반대 세력이든 모두가 인정했다. 당대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권력까지 지니고 있었던 추기경의 권한을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 남용하지 않고 오로지 교회 발전과 가난하고 소외된 주민들의 복지를 위해서만 사용했으며, 높은 직책에 있더라도 항상 겸손하게 처신하고 근면성실한 자세로 업무를 수행했다. 그로 인해 개혁의 반대 진영에서조차도 카를로 보로메오의 개혁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인간 자체로서의 성품은 높이 산다고 입을 모았을 정도로 칭송을 받았다.
4. 여담
오스트리아 빈의 카를 교회(Karlskirche)는 그의 이름을 따 지어졌다.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난 1713년 빈에는 흑사병이 창궐하여 많은 시민들이 죽어갔는데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 카를 6세는 흑사병이 멈춘다면 역병의 수호성인인 그를 위해 헌정하는 교회를 짓겠다 기도를 올렸고, 실제로 흑사병이 잠잠해져서 그의 이름을 딴 교회를 지었다.[2]유명한 토리노의 수의가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옮겨간 계기를 제공하였다. 수의를 보고싶어 했던 그가 밀라노에서 샹베리까지 행차하려하자 평소 그를 존경한 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가 수의를 쉽게 관리할 겸[3] 그를 위해 샹베리 성 예배당에서 토리노 대성당으로 수의를 옮겼다고 전해진다.
대한민국 전라남도 순천시에 있는 종합병원이자 전남 동부 지역의 권역응급의료센터인 성가롤로병원이 이 사람의 이름에서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