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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2 08:43:38

디를레방어 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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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무장척탄병사단
36. Waffen-Grenadier-Division
36th Waffen Grenadier Divi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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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창설일 1940년 6월 14일
해체일 1945년 5월 1일
소속 슈츠슈타펠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1. 개요2. 연혁3. 편제4. 출신 인물5. 기타
5.1. 미디어

[clearfix]

1. 개요

파일:main-qimg-2da003cdf35d88a399558a3668f8eaf4-lq.jpg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당시 투입된 디를레방어 여단 대원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존재했던 나치 독일의 친위대 상급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상급대령 오스카 디를레방어전쟁범죄로 악명높은 부대이다.

2. 연혁

출처1 출처2

1940년 5월부터 법무부[1]를 통하여 작센 강제수용소(KZ Sachsenhausen)에서 총기사용을 통한 불법사냥으로 법적처벌을 받은 밀렵꾼들 80여명을 대상으로 오스카 디를레방어를 통하여 부대를 창설한 것이 시초이다. SS에서 최초로 범죄자들로만 구성된 부대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때 명칭은 오라니엔부르크 밀렵부대(Wilddiebkommando Oranienburg)(Oranienburg Poacher's Unit)로 사실상 엽병부대 형태로 시작하려고 했다. 이들을 선발한 이유는 나치의 게르만주의에 입각하여 순수한 원시 독일 남성들에 의한 전통적인 독일 정예 엽병 목적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부대를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지원한 건 디를레방어의 유일한 친구인 고틀로프 베르거와 친위대 국가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였다. 선발된 80여명 중 2개월 간의 군사훈련을 통하여 55명이 선발되었고 나머지 탈락자들은 다시 수용소로 보내졌다. 문제는 이 부대 구성원이 지휘관부터 선발된 인력들까지 죄다 범죄자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창설될 때부터 무장친위대부터 시작해서 슈츠슈타펠 전체가 이 부대에 대해서 반발[2]이 심했지만 그 반발은 무위로 끝날 수 밖에 없었다. 히틀러가 승인했고 힘러가 적극적으로 주도하는데 따지고 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1940년 6월 14일에 오라니엔부르크 밀렵부대(Wilddiebkommando Oranienburg)(Oranienburg Poacher's Unit)는 55명의 밀렵혐의 범죄자들과 디를레방어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게 된다. 이 부대가 창설되자마자 하인리히 힘러는 부대 구성을 위하여 '징계 경력이 있는' SS 부사관 4명과 병 20명을 추가로 증원해주면서 창설 초부터 SS의 범죄자 부대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즉 시작부터 질나쁜 범법자들의 집합소였던 것이다. 그리고 9월까지 반사회적인 중범죄자들과 강간범 및 정신병자, 동성애, 사상범들이 추가로 이 부대로 증원배치되면서 총 300여명의 대대급으로 신속하게 증편되게 된다. 이 시점에서 디를레방어 대대가 운용되게 된다.[3]

대대로 증편되는 시점인 1940년 8월 1일부터 폴란드루블린에 배치되어서 경비 임무를 맡았으나, 결국은 범죄자 조직인지라 독일 국방군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슈츠슈타펠에서는 이들에게 개인화기 무기를 지급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을 경계하다 못해 매우 부적절한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다.[4] 이 때문에 경봉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걸 하고도 폴란드에서 경비 임무조차도 제대로 못 하고 주둔 지역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이 부대에 대해서 즉각 해산을 요청하는 일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독일 국방군뿐만 아니라 무장친위대와 슈츠슈타펠에서는 종전될 때까지 이 상황이 반복되는데 이걸 전부 다 고틀로프 베르거와 하인리히 힘러가 묵살했을 정도다. 그냥 개판 정도가 아니라 아예 대놓고 약탈-강간-살인을 마음대로 저지를 정도였다. 유대인 여성들을 아예 성노예[5] 삼아 데리고 다녔을 정도였고 지휘관인 디를레방어는 유일하게 독일군 및 SS에서 즉결처분권의 특권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범죄행위들을 방조했다. 오히려 자기가 마음에 드는 진리품을 휘하 부대원이 마음대로 취했을 경우 그 즉결처분권을 남용할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레벤스라움 계획에 의거하여 폴란드의 루블린 지역의 가옥 철거 임무에 투입되었는데, 단순 철거현장 지원에서도 갖은 살육과 강간 및 범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독일 국방군은 물론이거니와 무장친위대와 일반 슈츠슈타펠, 심지어 나치당에서도 경악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런 수준의 부대이니 부대 내에서의 병영문화나 군기는 그야말로 개판이었다. 그래서 이 개판을 통제하는 디를레방어는 즉결처분권[6]이라는 걸 이용해서 철저할 정도로 이 부대원들을 공포로 통제했다. 진짜 마음에 안 들거나 자기 훈련을 통과 못하면 정말 그 자리에서 죽였다고 한다. 게다가 디를레방어 자체가 중증 알콜중독자라 제정신이 아닌 상태인 경우가 많았으니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의외로 디를레방어는 전투 시에는 진두지휘를 할 정도였고 휘하 병사들과 평시에는 반말로 얘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범죄자들끼리 동병상련이라도 느꼈는지는 몰라도 전형적으로 범죄자들을 스톡홀름 증후군 형태로 길들였다고 한다. 문제는 그러한 공포와 스톡홀름 증후군 식으로 부대원들이 디를레방어에게 복종은 하지만 부대원들끼리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서로 사보타주와 집단린치를 하며 파벌로 나뉘어져 있었기에, 사실상 교도소 그 자체였다. 부대 내부가 이 모양이니 부대 주둔지 주변은 강간과 중범죄가 난무하는 그야말로 북두의 권 현실판이었다. 이 부대 존재는 아인자츠그루펜보다 더한 족속이었고, 나치즘으로 세뇌되어 있던 독일 내에서도 이 부대는 정말 혐오받아 치욕스럽고 수치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었기에 나치스의 간부들조차 어떻게 해서든지 해산시키려고 안달복달들이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거와 힘러가 뒷배를 봐줬기에 이들의 존속은 계속되었다. 부대도 그 모양이긴 했지만 디를레방어는 해당 문서에서도 상세히 나와 있듯이 부대원들이 하도 문제를 일으켰기에 고소고발을 수도 없이 당하고 있었다. 위아래가 그냥 막장 그 자체였으니 디를레방어식의 통제 말고는 답도 없었다.
파일:main-qimg-e8510381366821f0786496c5ea50070b-lq.jpg
벨라루스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디를레방어 대대 대원들
파일:ETtMlbDX0AE4eLd.jpg
디를레방어 대대가 파괴한 벨라루스 마을
루블린에서의 화려한 공적(?)으로 1941년 디를레방어 특별대대(Sonderkommando Dirlewanger(Special Unit Dirlewanger)(SS-Sonderbataillon Dirlewanger))로 강제수용소를 관리하는 부대로 잠시 있다가 독립부대로서의 역할을 시작하게 된다. 독소전의 시작으로 이들도 당연하게 소련의 벨라루스로 보내져서 빨치산 토벌 및 소련군 잔당 토벌에 투입되었다. 후방정리나 하던 이 악귀들에게는 행운스럽게도,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을 지시하는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의 지휘 아래 있었고, 벨라루스에는 지옥이 열리게 된다. 즉, 이들은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에 투입된 것이다.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에서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마냥 난동을 부려댔다. 특히 디를레방어는 헛간에 민간인들을 몰아넣고 불태우면서 불을 피해 나오는 민간인들을 기관총으로 죽이는 방법을 자주 썼는데 이들은 그것을 즐겨했다고 한다. 당연히 앞서 말한 강간 및 약탈은 기본이었다. 벨라루스 초토화 작전에서 이들에게 죽은 민간인만 3~12만명이 넘는다.

1942년 1월부터 반공성향인 러시아인들과 우크라이나인들의 모병이 허용됨과 동시에 힘러의 동의 하에 무장친위대 자원병 조직으로 승격(?)되었다.[7] 덕분에 반공성향의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 300여명을 지원받아서 병력이 증강되었고 그해 8월에 정식으로 연대로의 확장이 승인되었다. 이때부터 디를레방어 특별연대(Sonderregiment Dirlewanger)로 확장되는데, 정식으로 병력증강이 된 건 1943년 2월부터다. 기존 병력들은 1대대를 구성하고, 2대대는 700여 명의 군사훈련을 이수한 범죄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5월부터는 중범죄자들 한정이 아닌 모든 범죄자들로 자원병 모집 기준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 해 5월에 범죄자들 중 차출되어서 군사훈련을 통과한 500여 명이 증편되면서 3대대를 구성하게 하면서 1/2/3대대로 구성된 디를레방어 특별연대(Sonderregiment Dirlewanger)가 1943년 8월 17일 최종적으로 구성되었다. 이때부터 디를레방어는 이 부대의 부대마크와 상징으로 막대형 수류탄 두 개를 겹쳐 놓은 모양의 앰블럼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된다.

그렇게 벨라루스에서 학살을 벌이던 이 부대는 1943년 11월부터 중부집단군에 소속되어서 소련군의 공세에 저지하는 예비대로 투입되었는데, 전쟁 범죄에만 미쳐 있을 뿐 개판인 조직력을 갖고 있는 이 부대가 제대로 된 전투를 수행할 리가 없으니 당연히 전투부적합 판정을 받았다. 원체 개판인 부대인데도 디를레방어는 1943년 12월 5일 독일 십자훈장 금장을 받을 정도로 베르거와 힘러의 비호를 받았다. 하지만 44년 1월까지 이들 부대는 259명으로 줄어있었다. 천 명이 좀 넘던 부대가 벌써 1/4로 박살이 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44년 2월까지 다시 범죄자들을 교도소에서 징집하여 대거 투입시켜서 병력을 충원받아서 원상복귀되었다. 이 시점에 들어선 "러시아인들을 믿을 수 없다"는 판정 하에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 반공성향 인력이나 범죄자들은 배제되었다. 엄청난 뒷배들 덕에 이 부대는 병력이 부족할 일도 없었고 무슨 중범죄를 저질러도 무법인 부대였다. 그 시점에서 국방군이나 무장친위대와 슈츠슈타펠도 각종 전쟁범죄들과 강간범죄들을 저질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디를레방어 특별연대는 그중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고, 같이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국방군이나 무장친위대와 슈츠슈타펠에게조차 혐오받아 수도 없이 고소고발을 당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군기문제가 지적될 정도로 이 부대는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공격받는, 다른 의미로 대단한 부대였다.

1944년 8월 1일 바르샤바 봉기가 일어나자 하인츠 라이네파르트(Heinz Reinefarth)가 이끄는 전투단에 일부 병력이 파견되어서 싸우면서 본격적인 독일군 진압작전에 연대 전체가 투입되었다. 카민스키 여단, 아제르바이잔 보병 연대 등과 함께 저지른 잔혹행위로 인해 국방군과 다른 무장친위대마저 기겁할 정도였다. 이들이 이렇게 기겁한 이유는 학살의 정도도 그렇지만 정작 전투에선 허약했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장교 16명을 포함하여 초기 병력은 범죄자들을 재차 증원받아 복원한 병력 881명이었지만, 시가전에서 대차게 갈려나가고 이후 2천 5백에 이르는 병력[8]을 추가로 증원받으면서 싸워 봉기가 끝날 즈음에는 손실이 2,733명에 이르렀다. 초기 병력의 무려 315%(...). 심지어 진격로에 보드카 양조장이 있어 중간에 멈춘 카민스키 여단보다도 손실률이 컸다. 연대장인 디를레방어는 봉기 진압 후 보직해임당했다. 이 때 다운폴에서 자주 언급되어 알려진 헤르만 페겔라인이 히틀러에게 직언하여 디를레방어의 보직해임과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의 암살이 이루어지게 된다.

그러나 디를레방어의 보직해임은 유야무야되었는지 오히려 기사십자 철십자장이 수여되었고 상급지도자로 승진하게 된다. 1944년 10월 3일 바르샤바 봉기 진압이 끝나고 나서 연대는 드디어 본격적으로 여단으로 확장되게 된다. 이때가 흔히 아는 디를레방어 특별 여단(SS Special Brigade Dirlewanger)(SS-Sonderbrigade Dirlewanger)디를레방어 여단(Dirlewanger Brigade)이라고 불리게 되는 시점이다.[9] 이 시점에서 여단 병력은 총 4000여명으로 증편되었다. 물론 여단 증편 작업과 동시에 디를레방어 여단은 슬로베니아헝가리에서 좌익계열 빨치산 토벌에 투입되었고 1944년 10~12월까지 당연할 정도의 대규모 손실을 보여주게 됨으로써 1945년 1월에 병력손실에 의한 부대 재편성을 목적으로 다시 슬로베니아로 이동조치된다.[10]

1945년 2월부터 슬로베니아에서 디를레방어 여단은 본격적으로 사단으로 증편명령이 떨어졌고 오데르-나이세 전선(Oder–Neisse line)에 투입되게 된다. 동시에 이 시점에서 2월 17일에 디를레방어는 오델 강에서 총탄을 맞아 후송을 가면서 부대를 떠나게 되고 동시에 1945년 2월 14일에 SS 제36 무장척탄병사단(36. Waffen-Grenadier-Division der SS)으로 최종적으로 승인받게 된다. 4000여명의 범죄자부대였으나 사단 증편에 따르는 부대 확장에서 범죄자들만 존재할 수는 없었고 이 때문에 국방군 육군의 공병여단, 척탄병연대, 구축전차대대가 사단 직할로 추가되었으나 당시 독일의 전황이 어려웠으니 병력증편은 사실상 거의 없었기에 여단급보다는 병력이 많지만 사단급 정원은 채우지 못했다.[11] 결국 사단으로 확장되었고 디를레방어는 사단장으로 유지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디를레방어가 앞서 말한 부상으로 부대를 떠나면서 2월 17일 이후부터는 프리츠 슈메데스(Fritz Schmedes) 여단지도자가 맡아서 부대 증편 및 초대 사단장이 되었다.

독일 측에서는 사단으로 확장되는 시점에서부터 디를레방어 여단 혹은 사단이라는 표현이 사실상 사라지고 그냥 일반 무장친위대 사단화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사실 이 사단 증편과 디를레방어가 떠난 시점에서 디를레방어 이름을 단 부대명칭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이 부대는 계속해서 징계경력 및 범죄경력이 있는 전과자들 위주의 부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12]
파일:z9i5yzru313d1.jpg
1945년, 다른 국방군 및 친위대원과 함께 미군에게 항복한 디를레방어 여단 대원들.[13]
사단으로 증편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은 1945년 4월 16일,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면서 맥없이 밀려났다. 그 전부터 부대는 더 개판으로 돌아갔으니 소련군을 막을 리도 없었고 2차대전 내내 전투 부적합부대로 평가받았던 그들은 독일의 패망이 가속화된 시점에서는 사단 편제 유지가 어려울 정도로 탈영과 약탈이 극심했다고 한다. 얼마나 심각했냐면 당시 사단 예하 73SS연대의 연대장 에발트 엘러스(Ewald Ehlers)대령[14]이 탈영병들을 잡아다가 집단으로 교수형에 처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단은 5월 1일 소련군에 의하여 간신히 유지하던 사단의 잔여병력이 쓸려버렸으며, 잔존 생존자 700여명은 엘베 강을 건너 미군에 항복했다.

3. 편제

이 부대는 계속 범죄자들로 구성되어서 확장되었다. 대대로 처음 구성되었을때도 3개 중대로 구성되었으며 연대로 확장되는 시점에서도 1/2/3대대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확장 증편되는 여단-사단에서부터는 규모가 커지는 관계로 달라지게 된다.

디를레방어 대대(SS-Sonderbataillon Dirlewanger)(1943년 6월 기준)
디를레방어 여단(SS-Sturmbrigade "Dirlewanger")(1944년 10월 기준)
SS 제36 무장척탄병사단(36.Waffen-Grenadier-Division der SS)(1945년 3월 기준)
편제상으로는 사단편제화이나 인적자원수는 최대 6천명을 넘은 적이 없었다.[15]

4. 출신 인물

5. 기타

파일:디를레방어여단 칼라장.jpg
디를레방어 여단 전용 칼라장
제3SS기갑사단이 백골이 그려진 칼라장을 채택한 것과 마찬가지로, 디를레방어 여단도 SS를 상징하는 시겔 룬 문자 대신 독자적인 칼라장을 채택했다. 이들이 초기에는 엽병부대로 시작한 것을 상징하듯, 엽총이 십자로 교차되어있으며 그 밑에는 막대형 수류탄이 그려져 있었다.
파일:2ojydn97lp131.jpg
전쟁 말기, 안면 마스크를 착용한 디를레방어 여단 대원들
바르샤바 봉기 진압 이후에는 안면 마스크를 착용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위장이 목적이 아니라 연합군의 체포에 대비해 자신의 신변을 가리기 위해서였다.[17] 물론 이들은 소련군의 포화 앞에서 무참히 찢겨나갔으므로 사실상 무의미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이 부대는 아인자츠그루펜처럼 유대인들에게 독극물인 스트리크닌을 주사하여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대원도 있었다. 개개인 범죄자들에게 사실상 살인할 수 있는 임무병과가 있었다. 이런 임무를 부여받은 인력들이 있는 이유는 단순하게 처형목적으로만 있는 아인자츠그루펜과 같은 것뿐만 아니라 이 부대가 왜 그렇게 아군-적군 가릴것 없이 욕을 먹고 심지어 그 막장인 SS에서조차도 여러차례 이들을 구속기소하고 부대해체 및 처벌을 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이유는 단순히 두명의 빽들 덕분이 아니라 이 부대의 목적에서도 부합하기 때문이다. 즉 이 부대가 없어지지 않은 이유는 나치가 규정한 범죄자 및 제거대상들의 저항을 진압함과 동시에 그 저항자들이 도주시 추적하며 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잠재적 지원자들인 현지민간인들에게 엄청난 공포를 심어주는 것에 대해 성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 부대의 힘은 잘 훈련된 군인들이 아니라, 일말의 공감이나 도덕적 인식 자체가 결여된 존재들인 것이다. 실제로 첫 구성을 계획하는 단계에서부터 범죄자들을 이용하자는 입장에서 출발한 것이나 부대를 구성하고 첫 임무부터가 레벤스라움 계획에 의한 용역업무나 그 용역깡패질이 시작이었던것이나 계속해서 지역내 현지주민들을 못살게 만들어버리는 반사회적 행동들을 다발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등을 고려해보면 디를레방어 부대의 임무는 나치 지배하의 동유럽 전역을 현지인들이 살 수 없는 지역으로 만들어버리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었던 것으로 그 과정에서 현지인과 함께 소멸하는게 그들의 임무이자 존재가치였던 것이다. 어차피 통제불가능한 강력범죄자들이기에 이런 더러운 일에 쓰다버리면 그만인 부대였던 것.

바꿔말하자면 만약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 계획이 실현되었다고 가정해도 이들은 같은 나치들이 보기에도 경악할 수준의 각종 범죄행위로 인한 책임을 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 나치 정권에 의해 토사구팽당할 존재였다는 것이었다.

5.1. 미디어

쉰들러 리스트바르샤바 1944에도 이 여단 소속 인물들이 등장한다.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서러시아 전쟁 시기 독일에서 친위대 쿠데타에 협조했다가 실패해 도주하여 남우랄의 오르스크에 자리를 잡았다. 플레이 가능한 세력이며, 도적단으로 변질되었다보니 광범위한 약탈이 가능하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단 특유의 디를레방어에만 의지하는 특성 때문에 디를레방어가 죽으면 아예 점령지대가 무정부 상태로 변하고, 무기 하나 연구하는데도 2년 넘게 걸린다.


[1] 히틀러의 명령으로 1940년 3월 23일부터 사면령을 운운하면서 인력선발이 시작되었다.[2] 이때는 1942년 이후처럼 무작위로 외국인들까지 집어넣던 시기가 아니라 엄격하게 독일인에서도 가리고 가려서 뽑는 정예 엘리트들만 무장친위대와 슈츠슈타펠에 들어 갈 수 있었다. 그런 자부심으로 뭉쳐있는 그들이 같은 군복에 같은 소속으로 범죄자들하고 동류가 된다는것에 반발하는 건 당연했고 기본적인 인식도 범죄자들과 동류가 된다는 것에 부정적인 건 당연했다.[3] 사상범들이 들어가긴 했으나 사상범들은 극소수였다는 것이 중론이다. 잘못하면 반란이나 쿠데타 가능성도 있으니...[4] 당장 독일 육군에서도 범죄 전과로 징집 및 모병 자체가 불가능한 존재들로 구성되었으니 이들을 어떻게 봤을지는 안 봐도 뻔하다.[5] 지금이야 "성노예를 데리고 다닌" 행위 자체가 범죄 행위에 포함되지만, 당시 독일에서는 성노예든 아니든 "유대인과의 성관계"가 엄격하게 금지된 범죄행위였다. 왜냐하면 '우수한' 게르만족이 '더럽고 하등한' 유대인과 몸을 섞는 건 안 될 일이기 때문이었다. 비슷하게 독소전 당시에도 '열등한' 슬라브인, 즉 소련인들과의 성관계도 불법이었다.[6] 참고로 독일군이 즉결처분권이 가능해진 건 1943년 이후다. 즉 디를레방어는 어떤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지휘관들도 받지 못했던 특권을 부여받았던 것이다.[7] 말이 좋아 자원병 조직이고 중범죄자들 한정 자원병 조직이라고 볼 수 있었다.[8] 이들 대부분은 당연히 강제수용소를 포함한 형무소에서 중범죄를 받거나 탈영병들로 구성된 인력들이었다. 특히 이 2500여명 중 단치히-마츠카우(Danzig-Matzkau)의 SS수용소의 독일 죄수 1900여명이 주축이었다.[9] 정확하게는 12월에 SS-Sturmbrigade Dirlewanger 라는 명칭으로 무장친위대 전투여단이라는 형태로 재편성된다.[10] 사실 여단으로 확장되던 시점부터 이 부대의 탈영병들이 급증하기 시작하는데, 독일의 패망시기다 보니 범죄자들 특유의 이기적인 생존본능이 더욱 발현된 것으로 추측된다.[11] 최대 6천명까지 확장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12] 당장 연대장급부터가 부정부패등의 범죄로 좌천된 놈들 투성이고, 사단장인 프리츠 슈메데스(Fritz Schmedes)도 힘러에게 찍혀서 좌천성 인사를 당한 인물이었을 정도다. 사단장과 연대장들이 그 수준이면 아래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사단으로 증편된 시점에서 이 부대는 횡령은 기본이고 군기는 그 어떤 독일군보다 막장인 사상 최악의 교도소 집단이었을 뿐이었고, 여단으로 증편된 시점에서 급증했던 탈영병들은 사단으로 확장된 시점에서는 더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13] 면모를 쓰고 위장패턴이 그려진 우의를 입은 국방군 병사의 뒤에 있다. 칼라장이 다른 친위대와는 다르며 훈장도 착용하고 있다.[14] 수용소에서 물자 착복을 하다 걸려서 부패혐의로 처벌되어 이 부대로 온 범죄경력이 있는 놈이고 전쟁범죄 전과까지 추가된 상태였다.[15] 2차대전기 독일군의 보병사단 편제가 1만명이 정원기점이기 때문에 사단 정원이 40%나 미달이다.[16] 독일측 자료로는 제72SS연대였다고 함[17] 비슷한 예시로 전쟁 말기가 되면 SS 대원들은 독약을 소지하고 다녔다. 연합군이 체포하기 전에 자살하려고 했던 것이고 실제로도 적지 않은 SS 대원들이 체포되기 직전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하인리히 힘러도 이렇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