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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09:47:10

추수폭동

추수기의에서 넘어옴
秋收暴動
Autumn Harvest Uprising

1. 개요2. 배경3. 전개
3.1. 마오쩌둥의 소비에트 수립과 토지분배 주장3.2. 계획3.3. 봉기의 실패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인물6.2. 사건
6.2.1. 국민혁명6.2.2. 1차 국공내전

1. 개요

1927년 9월, 중국공산당이 호북, 호남, 광동, 강서 4개성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으킨 폭동. 농민과 노동자들을 조직하여 혁명의 고조화를 노렸으나 압도적인 국민혁명군의 반격과 노동자, 농민의 호응 부재로 인해 실패로 돌아갔다. 추수기의(秋收起義), 추수봉기 등의 표현도 사용한다.

제일 유명한 것은 마오쩌둥이 1927년 9월 9일 호남성에서 일으킨 호남 추수폭동이며 본 문서도 대부분 호남의 추수폭동을 다루고 있다.

2. 배경

1927년 1월 마오쩌둥은 <호남 농민운동 고찰보고>를 제출하며 농민들의 '혁명적 열기'가 폭발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농민혁명을 비롯한 급진적 개혁과 폭동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가 있었다.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국민당이 우한과 난징으로 분열되고 국공합작을 표방했던 우한과 공산당의 결렬도 가시화되자 1927년 7월 12일, 코민테른은 지령을 내려 총서기 천두슈를 실각시키고 지도부를 개편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장궈타오, 리리싼, 저우언라이, 리웨이한, 장타이레이로 구성된 중국 공산당 중앙임시정치국 상무위원회가 조직되었고 천두슈는 사직서를 내고 잠적했다. 중앙임시정치국 상무위원회는 3가지 사항을 결의했다.

1927년 7월 13일, 중국 공산당은 우한 국민정부에 항의하는 의미로 국민정부 탈퇴를 선언하고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를 설립하여 국민당의 명의로 혁명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우한 국민정부는 이틀 후인 7월 15일 코민테른의 5월 지시를 폭로하고 국공결렬을 결정하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은 사실상 전쟁 상태로 돌입했다.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새로운 대표 비사리온 로미나제는 중국 공산당이 지금껏 천두슈의 지도 아래에 기회주의적인 노선으로 일관하고 있었다고 가혹하게 비판하고 1927년 8월 7일 8.7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취추바이를 새로운 총서기로 추대하고 강경한 혁명노선을 주문했다. 이에 취추바이는 취추바이 노선이라 불리는 강경한 폭동, 파업 사주 노선을 강행하였고 기존에 결정한 추수폭동의 실행 역시 재확인했다. 9월이 폭동의 고조기로 뽑힌 이유는, 9월 중추절 기간 동안 고리대를 갚아야 하기 때문에 농부와 지주 사이의 갈등이 최고조에 치닫기 때문에 농민들의 분노를 자극하여 폭동을 교사하기에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중추절 폭동이라고 한다.

3. 전개

3.1. 마오쩌둥의 소비에트 수립과 토지분배 주장

8.7 긴급회의가 끝난 후 취추바이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준 마오쩌둥은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상하이의 당중앙에서 일하는 것을 제안받았지만 이를 거절하고 최전선에 보내달라고 요청하며 최소한 5개 현에서 폭동을 일으키겠다고 제안했다. 이에 취추바이는 1927년 8월 9일 마오쩌둥을 중앙위원회 특별 대표로 삼아 정치국 후보위원 펑공다와 함께 호남에 파견하여 폭동을 준비하였다. 폭동을 위해 중국공산당 호남위원회가 개편되었다.

8월 12일 마오쩌둥이 장사에 도착했을 때, 장사는 허극상의 반공 숙청으로 인하여 기존에 3천명에 달하던 당원 중 100명만이 겨우 살아남은 상태였다. 마오쩌둥은 장사 주재 소련 영사이자 코민테른 지역대표인 블라디미르 쿠추모프와 함께 '농민혁명과 반동정권 전복'을 위해 폭동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그는 호남위원회 서기 이리롱을 만나 8월 15일 소련 영사관에서 지역위원회 모임을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가족들을 보기로 잠시 양카이후이와 자식들이 살고 있던 반창으로 내려가는 바람에 회의는 연기되었지만 8월 16일의 회의에서도 마오쩌둥은 나타나지 않았다. 8월 18일 가족들을 데리고 장사로 돌아온 마오쩌둥은 그의 부재를 질타하는 동지들에게 농민들의 형편을 조사했다고 변명했다. 마오쩌둥은 8월 20일 중앙위원회에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국민당은 이제 더 이상 대중에게 호소하는 데 효과적 방편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우리는 더 이상 국민당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실패하게 될 것입니다. (...) 이제는 이미 흑기에 지나지 않는 국민당 깃발은 그들이 지키도록 내버려두고, 우리는 지체없이, 그리고 결연히 붉은 깃발을 들어야 합니다. (...) 호남 농민들은 토지 문제에 관한 완전한 해결을 절대적으로 원하고 있습니다. (...) 소지주와 자경농을 포함해 모든 토지를 몰수하고 공유화하고 농민협회가 '공작능력'과 '소비량', 두가지 표준에 따라 토지를 얻고자 하는 모든 향촌민에게 공평하게 분배해야 합니다.

호남 농민들이 전면적인 토지개혁을 요구한다는 것은 마오쩌둥의 비약이었지만 볼셰비키 혁명의 고조기가 다다랐다고 여긴 마오쩌둥은 급진적 주장을 계속했다. 마오쩌둥은 또한 회의석상에서 농민들이 호응하지 않을 가능성을 대비해 이런 주장도 했다.
"만약 우리가 이번 폭동을 조직하고 촉발시키려면 오로지 농민들에게만 의존해서는 안됩니다. 군사적 지원이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한두개 연대의 도움이 있어야 폭동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 만약 정권을 탈취하는 데 군사력의 도움 없이 하고자 한다면 이는 자기기만에 불과할 것입니다. 우리 당이 이전까지 저질렀던 과오는 군사를 무시한 데서 나왔습니다. 이제 우리의 힘 가운데 60%를 군사 운동에 집중해야 합니다."

호남위원회 대부분이 마오쩌둥을 지지했지만 이리롱은 마오쩌둥의 급진적 주장에 반대했다.
"만약 우리가 소지주들의 땅을 몰수한다면 그들은 혁명을 반대하는 대지주들의 진영에 설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들의 땅을 몰수할 시기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리롱의 말은 무시되었다. 마오쩌둥과 펑공다는 소비에트를 수립하고 위로부터 혁명을 추구할 것을 주장했다. 마오쩌둥의 이러한 급진적 주장에 로미나제의 임시정치국은 호남으로 긴급서한을 보내 마오쩌둥의 견해를 군사 모험주의로 지칭하며 반대했고 소비에트 정부 수립, 전면적인 토지 재분배 등을 묵살했다.

3.2. 계획

"지역 반동분자를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며, 그들의 가옥을 불태우고 교통과 통신망을 파괴한다."
추수폭동의 구호.

8월 말, 호남 당위원회는 장사 동부에 준둔한 농군과 국민혁명군 4군단 2방면군 총지휘부 경위단, 한양의 안위안 탄광의 광부들을 규합하여 5천명 규모의 1개 사단을 조직하고 호남 중심부를 타격하기로 했다. 이들은 노농군[1] 1군 1사로 명명되었고 1연대는 경위단, 2연대는 농군과 광부들, 3연대는 평강과 유양에서 온 노동자와 농민 지원자들과 호북의 농민 의용대, 4연대는 반공을 요구한 하두인 휘하의 병력으로 조직하였다.

봉기계획에 따르면, 우익인 1연대와 4연대가 북동쪽으로부터 호남성의 성도 장사로 진격하고 좌익인 2연대가 장사 남서쪽 안원에서 진격하여 평향과 예릉을 점령하고 유양에 집결하며 중앙종대인 3연대는 장사 동북쪽의 동문을 공격해 9월 21일 즈음에 2연대와 합동으로 유양을 점령하고 그 다음에 4개 연대가 모두 집결하여 장사 내부의 노동자와 농민의 호응을 얻어 장사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도시에 근거지를 마련하자는 전형적인 러시아 혁명식 봉기 계획이었는데, 유격전을 중시한 마오쩌둥은 이런 중심도시 공격 계획에 대해 사실 회의적이었지만[2] 중심도시를 공격하라는 것이 당중앙의 명령이었으므로 거부할 수는 없었다. 마오쩌둥은 군사문제를 담당할 전적위원회와 지구당의 책임을 감독할 행동위원회를 조직했다. 마오쩌둥이 전적위원회 서기를 맡았고 이리롱이 행동위원회 서기를 맡았다. 마오쩌둥은 마지막으로 양카이후이와 아이들을 만난 후 그들을 반창으로 보냈다.

마오쩌둥이 8월 31일 새벽, 장사를 떠나 하남과 강서 접경지대인 주저우로 이동했다. 주저우에서 마오쩌둥은 지역공산주의자들과 의논하여 국민당의 눈을 돌리기 위해 샹장강 철교를 폭파시키기로 결정했고 장자완에서 열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안위안으로 이동했다. 마오쩌둥은 이때 시를 지었다.
노동자 농민의 군대라 부르세.
도끼[3]와 낫으로 장식된 우리의 깃발.
루산 산에서 멈추지 않고
샤오장 강, 샹장 강까지 곧바로 전진하리라.
지주의 모진 억압, 농민들 모두 원소 여기나니.
추수 때 이르러 가을 구름 짙어지니
우레처럼 폭동의 함성 들리리라.
서강월 추수기의, 마오쩌둥

황당하게도 마오쩌둥은 이동 중에 지역 민병대에게 잠시 체포되었다. 만약 마오쩌둥의 정체가 드러났다가는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겠지만 마오쩌둥은 기지를 발휘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마오쩌둥은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를 에드거 스노우에게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민단 본부로 나를 끌고 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는데, 그곳에 가면 죽을 게 분명했어요. 한 동지에게 수십 위안을 빌려 나를 풀어달라고 호위병에게 뇌물을 주었습니다. 일반 병사들은 용병이라서 나를 죽이는 데 별다른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나를 풀어 주기로 했지요. 책임을 맡고 있는 하급 장교는 풀어주기를 거부했어요. 그래서 도망치기로 마음 먹었지만 좀처럼 기회를 잡을 수 없었어요. 그러다가 마침내 민단 본부를 약 200미터 남겨 둔 곳에서 기회를 얻어 그대로 들판으로 내달았지요. 나는 주위에 풀이 제법 자란 호수 위 높은 곳에 이르러 해가 질때까지 숨어 있었습니다. 병사들이 나를 추적했는데, 나중에는 농민들까지 강제로 동원하여 찾도록 했지요. 그들은 여러 차례 내 바로 옆까지 다가왔고, 한두번은 거의 몸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접근했지요. 이제는 잡히나 보다 싶어서 대여섯 차례나 희망을 포기하기도 했지만 용케 발각되지 않았어요. 날이 어두워지자 그들도 결국 수색을 포기했어요. 나는 즉시 산을 넘어 밤새워 걸었지요. 신발도 신지 않았기 때문에 두 발은 상처투성이가 되고 말았어요. 실을 걷다가 한 우호적인 농민을 만났는데, 그가 나에게 은신처를 제공하고 나중에 가까운 현으로 안내해 주었지요. 나는 수중에 있던 7위안으로 신발과 우산, 그리고 먹을 것을 샀어요. 마침내 농민보위대에 안전하게 도착했습니다. 그때 내 호주머니에는 겨우 동전 두닢밖에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3.3. 봉기의 실패

준비가 끝났다고 판단한 마오쩌둥은 9월 9일 중앙의 지시 없이 폭동 실행을 결심했다. 공산당의 지령에 따라 철도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키면서 철로 운행이 중단되어 장사로 향하는 어떤 기차도 도착하지 못했다. 9월 10일, 2연대가 안원에서 계획대로 봉기하여 평향을 공격했고 12일 예릉을 점령하여 혁명위원회를 구성하여 대지주의 토지 몰수, 노동조합과 농민협회 복원을 선언했다. 하지만 국민혁명군의 반격에 2연대는 곧 예릉에서 철수했다. 9월 15일 2연대는 유양을 공격했다가 병력의 삼분의 이를 잃는 참담한 패배를 당했다. 1연대와 4연대는 평강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4연대가 도로 국민혁명군에 투항하여 1연대를 공격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1연대는 많은 희생자를 내고 패주해야 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노농군 1군 사령관 여주도가 국민혁명군에 투항했고 탈영병이 끊이지 않았다.

농민들의 호응은 시원치 않았고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3연대는 계획대로 동문을 점령했지만 나머지 연대들이 궤멸된 상태에서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9월 14일 마오쩌둥은 잔여 병력에게 자신에게 모이라는 지시를 내렸다. 9월 15일 마오쩌둥은 장사 공격을 포기하고 철수하기로 결정하여 영도로 퇴각했다. 마오쩌둥은 영도에서 병력을 재편성하고 잔류한 천여명의 봉기군을 모아놓고 물었다.
"혁명을 계속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포기하고 말 것인가?"

이에 남은 병사들이 모두 외쳤다.
"혁명의 길로!"

이에 마오쩌둥은 봉기군을 인솔하여 장사에서 동쪽으로 100킬로미터 떨어진 문가로 퇴각했고 그곳에서 정강산으로 들어갈 것을 선언했다. 9월 21일 봉기군은 정강산으로의 고된 여정을 시작했다. 쿠추모프는 격노하여 마오쩌둥이 '가장 경멸할 만한 속임수요 비겁한 행동'을 했다고 비난했고 마오쩌둥과 펑공다가 중국식 속물주의의 실체를 드러냈다고 했다. 모스크바에서도 추수폭동이 웃음거리가 된 봉기라고 날뛰었지만 이는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장융은 마오쩌둥이 애초에 추수폭동을 일으킨 이유가 난창 폭동 이후 광동으로 남하하던 봉기군을 자신의 휘하로 끌어들이려는 속임수였다고 주장하는데 비슷한 주장을 하는 다른 권위있는 연구들은 보이지 않는다.

상하이 임시정치국은 런비스를 취추바이의 전권대표로 파견하여 펑공다를 비서로 유임시키고 폭동을 재조직하려 했지만 이미 폭동을 조직하기에는 때가 너무 늦은 후였다.

4. 결과

마오쩌둥은 10월 정강산에 이르러 정강산을 점거하고 지역의 비적들과 연합하여 정강산 투쟁을 전개하였다. 타 지역에서도 국민당 혁명위원회의 명의로 폭동이 일어났으나 준비도 호응도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모두 실패로 끝났다. 9월 19일, 스탈린은 국민당 혁명위원회의 명의를 취소할 것을 지령했고 1927년 11월 7일부터 14일까지 상하이에서 개최된 확대회의에서 취추바이는 연속혁명론을 주장하면서 기존 노선이 옳았다고 주장, 추수폭동이 실패한 것은 혁명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낮았기 때문이 아니라 '광범위한 대중의 혁명적 고양을 예측하고 폭동을 조직하고 이를 무장폭동으로 발전시키도록 노력할 책임을 지고 있는' 당 간부들의 자각적 노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규정하고 폭동을 지휘했던 마오쩌둥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 때문에 마오쩌둥은 정치국 후보위원직을 박탈당했다.[4] 이 회의에서 채택된 <정치기율결의안>은 마오쩌둥을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호남 당위원회의 농민 폭동 지도는 완전히 중앙의 책략에 위배되는 것이다. 중앙은 호남 폭동이 농민 군중을 주력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러 차례 지시했다. 아울러 성위원회 서기 펑공다 동지에게 군사적 기회주의의 과오에 대해 직접 경고하고 성위원회가 이런 과오를 시정하여 폭력의 주력을 농민 군중으로 삼고 중앙의 양호 추수 폭동 계획에 따라 착실하게 준비할 것을 요구했다. 당시 반복적인 논쟁을 통해 결국 펑공다 동지가 이를 억지로 수용했으나 성위원회의 지도는 여전히 기존의 군사적 기회주의의 과오를 수정하지 않았다. (...) 임시중앙정치국 확대회의는 이상에 열거한 과오 정책을 집행한 당부 집행기관과 책임을 맡은 동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은 처벌을 결정했다. (...) 호남위원회 위원 펑공다, 마오쩌둥, 이리롱, 샤밍한은 성위원회 위원에서 제명되며, 펑공다 동지는 중앙정치국 후보 위원 자격을 박탈하되 당적을 유지하여 6개월 동안 관찰을 받게 한다. 마오쩌둥 동지는 8.7 긴급회의 이후 중앙이 호남에 파견하고 성 위원회를 재편하여 중앙의 추수폭동정책을 집행할 것을 지시한 특파원으로 사실상 호남 위원회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마오쩌둥 동지는 호남 위원회가 저지른 과오에 대해 엄중한 책임을 져야만 하기 때문에 중앙 임시정치국 후보위원 자격을 박탈한다.

취추바이는 지속적으로 폭동과 소비에트 수립을 교사하여 펑파이가 해륙풍 소비에트를 수립했고 1927년 12월에는 장타이레이광저우 폭동을 일으켜 광저우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했지만 모두 실패, 진압당하고 엄청난 희생자를 낳았다. 1927년 12월까지 공산당원들은 80%를 잃은 참혹한 피해를 입었고 결국 취추바이도 1928년 6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 6차 대회에서 좌경 모험주의 노선을 이끌었다고 비판받고 총서기에서 쫓겨났다.

호남에 잔류했던 양카이후이는 1930년 7월 리리싼창사 폭동을 사주하여 창사를 점령하자 8월 5일 창사를 탈환한 호남성 정부주석 허젠의 지시로 1930년 10월 24일 마오안잉과 함께 체포되었다. 허젠은 양카이후이에게 남편과 의절할 것을 요구했지만 듣지 않자 군사재판을 통해 사형을 언도하고 11월 14일 총살했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6.2.1. 국민혁명

6.2.2. 1차 국공내전



[1] 노동자농민혁명군, 노농혁명군, 공농혁명군.[2] 반대로 장융은 마오쩌둥이 장사 공격을 고집했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장융의 주장에 무리가 있다는 것은 감안해야 한다.[3] 마오쩌둥은 망치를 도끼로 오해했는데 당시로서는 흔한 오해였다고 한다.[4] 마오쩌둥은 이 소식을 1928년 3월에야 듣게 된다.[5] 현재의 군사편찬연구소다. 국방부 산하에서 다수의 전쟁사 관련 연구서적, 논문들을 제작하며, 계간 전쟁사 학술지인 <군사>를 출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