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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楚)나라 22대 왕 경양왕 頃襄王 | ||
성 | 미(羋) | |
씨 | 웅(熊) | |
휘 | 횡(橫) | |
아버지 | 초회왕(楚懷王) 웅괴(熊槐)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전 ???년 ~ 기원전 263년 |
재위 기간 | 음력 | 기원전 298년~ 기원전 26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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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나라의 38대 군주, 22대 왕. 초 회왕이 진 소양왕에게 억류되자 초나라 신하들의 도움으로 제나라에서 빠져나와 왕이 되었다. 시호는 '경양왕'(頃襄王)이지만 보통 줄여서 '양왕'(襄王)이라 불린다. 진나라의 잦은 침공에 시달렸으며 결국 수도 영이 진나라에게 점령당하자 진(陳)으로 천도한다.2. 재위 기간
초 회왕이 진(秦)나라에 억류되어 더 이상 왕위를 비울 수 없다고 판단한 초나라 신하들이 태자인 그를 제나라에서 데려와 왕으로 세운다.초 경양왕 원년(기원전 298년), 초 회왕을 억류해도 검중 땅을 얻을 수 없어서 분노한 진 소양왕은 병사들을 집결시켜 무관에서 초나라를 치니 초군 50,000명이 죽고, 진군은 석읍과 그 주변의 15개 성을 차지했다.
초 경양왕 6년(기원전 293년), 진나라가 무패의 명장 백기(白起)를 보내 한나라(韓)의 이궐 땅에서 한(韓)과 위(魏)의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고 이궐을 점령하고 24만 명을 참살한다.[1] 이후 진 소양왕은 초나라에게 압박을 가하고 초 경양왕은 국력이 진나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강화를 요청하였다.
초 경양왕 7년(기원전 292년), 경양왕은 진나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
초 경양왕 14년(기원전 285년), 경양왕은 소양왕과 완 땅에서 화친을 맺었다.
초 경양왕 15년(기원전 284년), 경양왕은 진(秦), 삼진(三晉)과 힘을 합쳐 제나라를 쳐서 회북[2] 땅을 얻는다.
초 경양왕 16년(기원전 283년), 진 소양왕은 언 땅에서 회맹을 가졌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양읍에서 다시 회맹을 한다.
초 경양왕 18년(기원전 281년), 한 명의 명궁이 있어 그 소식을 들은 경양왕이 그를 부르고는 말을 주고 받았는데 그가 경양왕을 자극하는 말을 한다. 경양왕이 그 의도를 알아보고 다시 부르니 그는 오자서의 전례를 들어 진나라에게 복수할 것을 진언한다. 그 진언에 따라 진나라에게 복수하기 위해 합종을 시도한다. 그러자 분노한 진 소양왕이 초나라를 공격한다. 그리고 경양왕은 주나라를 병탄할 마음을 품었으나 영윤 소자의 말을 듣고는 그 계획을 철회한다.
초 경양왕 19년(기원전 280년), 진나라의 침공을 받아 맞서 싸웠지만 패배한다. 결국 상용과 한수 이북 땅을 진나라에게 떼주고 화친한다.
초 경양왕 20년(기원전 279년), 진나라가 초나라의 서릉 땅을 빼앗았다.
초 경양왕 21년(기원전 278년), 진나라의 장수 백기가 초나라의 수도 영을 빼앗고 초나라 왕들이 묻힌 이릉 땅에 불을 질렀다. 초군이 궤멸하여 더 싸울 수 없었으므로 옛 진(陳)나라 땅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그곳을 '영'(郢)[3]이라고 불렀다.
같은 해에 진나라에서 검중과 무를 점령하고 군(郡)을 설치한다.
초 경양왕 23년(기원전 276년), 경양왕은 진(陳)으로 천도한 뒤 패잔병을 모아들이니 그 수가 10만명에 달했다. 그리고 진나라가 점령한 장강 연안의 15개 군현을 되찾았다.
초 경양왕 27년(기원전 272년), 삼진(三晉)과 함께 연나라를 공격한다. 그리고 진나라와 화친하며 태자를 인질로 보내고 황헐에게 그를 보좌하게 한다.
초 경양왕 36년(기원전 263년), 경양왕이 위독하자 태자가 황헐의 책략으로 빠져나왔다. 태자가 초나라로 와서 죽은 경양왕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고열왕이다.
3. 여담
《삼국지연의》에서는 초선을 칭찬하는 시에 등장하며 또한 조식의 시 낙신부에서도 등장한다.이는 무산지몽(巫山之夢)이라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초 양왕[4]이 꿈에서 무산의 신녀인 염제 신농(炎帝 神農)의 딸 요희(磘姬)와 만나 성관계를 가졌는데, 아침이 되어 헤어질 때 요희가 ”아침에는 구름이 되고 저녁에는 비가 되어 양대 아래에서 아침 저녁으로 당신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라고 작별 인사를 했다는 것. 성관계를 뜻하는 사자성어인 운우지정(雲雨之情)도 여기서 나왔다.
[1] 중국 특유의 과장임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만큼 한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2] 회수 이북을 말한다.[3] 초나라의 도읍 영.[4] 아버지 초 회왕이란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