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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6-11-01 09:37:37

무왕(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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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楚) 초대 국왕
무왕 | 武王
출생 연대 미상
사망 기원전 690년 (향년 미상)
능묘 미상
재위기간 초(楚) 제17대 국군
기원전 741년 ~ 기원전 704년
초(楚) 초대 국왕
기원전 704년 ~ 기원전 6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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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ece5b6><colbgcolor=#025000> 성씨 미성 웅씨(羋姓 熊氏)
휘 철(徹)[1] / 통(通)[2]
부친 소오(霄敖)
배우자 등만(鄧曼)
자녀 문왕(文王)
시호 무왕(武王) }}}}}}}}}

1. 개요2. 생애

1. 개요

중국 춘추시대 초나라의 제17대 국군이자 초대 왕.

초 소오의 아들로, 초 무왕 때부터 초나라가 칭왕(稱王)했다.[3] 화씨지벽 전설에서는 그 전 군주인 분모가 여왕(厲王)을 칭했다고 하나 정확히 초나라가 칭왕한 시기는 바로 무왕 때로 여왕은 왕을 칭한 적이 없으며, 동생인 무왕이 분모를 시해한 후 악시를 준 것이었다.

2. 생애

분모 17년(기원전 741년), 초 무왕은 형 분모를 시해한 뒤 초나라의 군주가 되었다. 그는 등나라 후작(鄧侯)의 딸인 등만(鄧曼)을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투백비(鬭伯比)를 영윤으로 임명하고, 굴하(屈瑕)를 막오(莫敖)에 봉하면서, 국력이 날로 신장되어갔다. 그런데 초나라는 강한(江漢) 지역에서는 가장 강성한 국가였지만 작위는 자작으로 오등작 중 매우 낮았다. 국력에 걸맞지 않는 작위로 인해 무왕의 불만은 커져갔다.

주 환왕 16년이자, 초 무왕 37년(기원전 704년) 여름에 침록 부근에서 회맹을 가졌는데 파, 용, 복, 등, 교, 나(羅), 진(軫), 신, 이, 운, 강이 참여했다. 이때 황나라와 수나라가 오지 않자 무왕은 대부 위장을 보내 황나라를 책망하고, 막오 굴하로 하여금 수나라를 치게 하여 수나라군을 대파했다. 참배한 수후는 달아났고, 거우인 투단은 수나라에서 포로를 잡고 전리품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웅철은 왕을 자칭하니 바로 초 무왕이었다.[4]

초 무왕 41년(기원전 700년), 초군은 교나라군에게 승리하고 정립성 아래에서 회맹을 가졌다.

초 무왕 42년(기원전 699년), 굴하로 하여금 나나라를 치게 했는데 패전했다. 이때 굴하는 패잔병을 거느리고 황곡으로 갔으나 초 무왕의 꾸지람을 듣고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이때 변화가 화씨지벽의 원석을 바쳤다가 오른쪽 다리에 월형을 당했다.

초 무왕 51년(기원전 690년), 수나라를 정벌했는데, 한수 동쪽에 이르러 갑자기 무왕이 병이 들어 죽었다. 초나라의 영윤 투기와 막오 굴중은 무왕의 발상을 비밀에 부치고 여전히 안원에서 동진할 계획을 세웠다. 초군이 수나라의 성 근처에 이르자 수의 군신들이 굴복했다. 이후 초군이 회군하여 한수를 건넌 뒤 무왕을 발상했고, 그 뒤를 이어 아들 웅자가 즉위하니 그가 문왕이었다.
[1] 청화대학(清華大學)에서 소장하고 있는《청화전국간》(清華戰國簡) 내용 중에 초나라의 역사를 담은 문헌인《초거》(楚居)라는 기록에는 이름이 '철'(徹)로 기록되어 있다.[2] 앞의 주석에서 언급했듯이 《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한 무제의 이름이 '철'이라서 피휘를 하기 위해 기록한 이름이다. 참고로 이름이 같은 후대의 인물인 괴철도 이와 같은 경우이다.[3] 주나라 천자만이 왕을 칭한 춘추시대임을 감안하면 대담한 일이기는 하나, 초나라가 원래부터 상족과 묘족의 연합국가였다가 중원에 편입된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4] 당시 한수 동쪽의 열국 중 수나라가 가장 강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