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 성안(聖顔) / 난정(蘭汀) |
본관 | 인천 채씨[1] |
출생 | 1896년 11월 20일[2] |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내동 (현 대구광역시 동구 내동)[3] | |
사망 | 1966년 3월 22일[4] (향년 69세)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189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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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채희각은 그의 친형[5]이며, 홍연흠은 그의 고모부, 홍묵은 그의 손위 처남이다.[6]
2. 생애
1896년 11월 20일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내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내동)에서 아버지 채규식(蔡奎植, 1873 ~ 1903. 12. 19)과 어머니 성주 도씨(? ~ ?. 6. 20)[7] 사이의 두 아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첫째 숙부인 채효식(蔡孝植, 1879. 7. 14 ~ 1959. 1. 1)에 입양되었으며, 이후 대구군 해북촌면 미대동으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조선 각 지방에서 발발한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격문을 살포,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해 4월 28일 밤 10시에는 권재갑·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학기·채희각 등 7명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의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그날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아 곧 항소하였으나 5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공소가 취하되어, 결국 원심 판결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66년 3월 22일 사망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대구광역시 동구 내동에 안장되었다가 2017년 7월 1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에 이장되었다.
[1] 소감공파(少監公派)-양전헌공파(兩傳軒公派) 28세 희(熙) 항렬. 족보명은 채희복(蔡熙復).[2] 음력 10월 16일.[3] 대부분의 기록에서는 미대동을 본적지 내지 출생지로 기록하고 있으나, 당시 수형인명부에는 미대동을 본적지로, 내동을 출생지로 기록하고 있었다.[4] 인천채씨대동보 3권 303쪽에는 1965년 4월 25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5] 채송대가 이후 첫째 숙부 채효식(蔡孝植, 1879. 7. 14 ~ 1959. 1. 1)에 입양되면서 족보상으로는 사촌 형이 되었다.[6] 채송대의 부인 부림 홍씨(1898. 6. 20 ~ ?)는 홍기순(洪祺舜, 1858 ~ 1948)의 장녀로, 홍묵은 부인 부림 홍씨의 오빠이다.[7] 도응호(都應浩)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