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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28 00:56:13

채봉식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자공(子拱) / 석천(石泉)
본관 인천 채씨[1]
출생 1889년[2] 4월 9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북촌면 미대동
(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3] 116번지)
사망 1949년 10월 9일[4] (향년 60세)
묘소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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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89년 4월 9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북촌면 미대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116번지)에서 아버지 채경원(蔡景源, 1861 ~ 1941)과 어머니 선산 김씨 김성동(金成東, 1861. 6. 20 ~ 1952)[5] 사이의 3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조선 각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채봉식은 채갑원 등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함께 자금을 마련, 대구향교의 유림들을 선동하여 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앞장서서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4월 26일 채갑원의 집에서 채갑원·채학기·채희각과 함께 전국적인 추세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짧은 격문을 살포하면서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 날 밤 10시 앞서 세 사람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틀 뒤 28일에는 밤 10시 권재갑·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송대·채학기·채희각 등 7명과 함께 같은 장소에 올라가 한국독립만세를 외치고 곧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아 곧 항소하였으나 5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공소가 취하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49년 10월 9일 사망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1] 소감공파(少監公派)-양전헌공파(兩傳軒公派) 27세 식(植) 항렬.[2] 인천채씨대동보 4권 21쪽에는 1899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3] 인근의 지묘동과 함께 인천 채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채갑원·채경식·채명원·채학기·채희각 등도 이 마을 출신이다.[4] 인천채씨대동보 4권 21쪽에는 1954년 1월 24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5] 김홍원(金弘遠)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