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경언(慶彦) |
본관 | 인천 채씨[1] |
출생 | 1901년 10월 18일 |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미대동 (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2] 179번지) | |
사망 | 1966년 11월 3일[3] (향년 65세) |
경상남도 진주시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670호 |
상훈 | 대통령표창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2. 생애
1901년 10월 18일 경상북도 대구군 해북촌면 미대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179번지)에서 아버지 채덕해(蔡德海, 1868 ~ ?. 8. 12)와 어머니 경주 최씨(? ~ ?. 2. 28)[4] 사이의 4형제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출생 이후 5촌 당숙 채형해(蔡亨海, 1882 ~ 1961. 12. 23)에 입양되었고, 해북촌면 미대동 223번지로 이주했다.그는 1919년 3.1 운동 당시,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과 조선 각 지방에서 발발한 만세운동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격문을 살포,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해 4월 28일 밤 10시에는 권재갑·채갑원·채경식·채봉식·채송대·채학기·채희각 등 7명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의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으며, 그날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아 곧 항소하였으나 5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공소가 취하, 결국 원심 판결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경상남도 진주시로 이주하였으며, 1966년 11월 3일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7년 11월 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