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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1-07 09:09:11

채갑원

파일:채갑원.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자강(子康) / 우산(佑山)
본관 인천 채씨[1]
출생 1894년 6월 21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북촌면 미대동
(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2] 265번지)
사망 1986년 7월 2일 (향년 92세)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1992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894년 6월 21일 경상도 대구도호부 해북촌면 미대동(현 대구광역시 동구 미대동 265번지)에서 아버지 채복해(蔡復海, 1863 ~ 1916. 1. 29)와 어머니 성주 배씨(? ~ ?. 2. 3)[3] 사이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채갑원은 경기도 경성부 등지에서 독립운동가들과 접촉하며 국권회복에 대한 의지를 품었고, 이를 22촌 지간의 족손(族孫) 채학기와 논의하며 결의를 다지곤 했다.

1919년 3.1 운동 당시, 조선 각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채갑원 등 미대동 인천 채씨 문중 선비들은 자금을 마련, 대구향교의 유림들을 선동하여 거사를 일으키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득이하게 앞장서서 궐기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4월 26일 자신의 집에서 채봉식·채학기·채희각과 함께 전국적인 추세에 호응하여 만세운동을 하기로 하고, 공산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짧은 격문을 살포하면서 주민들에게 독립운동 궐기를 호소하였다. 그리고 그 날 밤 10시 앞서 세 사람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 동쪽에 있는 여봉산(礪峰山)에 올라 일제히 한국독립만세를 외쳤다.

이틀 뒤 28일에는 밤 10시에 권재갑·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송대·채학기·채희각 등 7명과 함께 같은 장소에 올라가 한국독립만세를 외치고 곧 자진 해산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곧 팔공주재소의 일본군 헌병대에 체포되어 그해 5월 1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즉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8개월형을 선고받아 곧 항소하였으나 5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공소를 취하해 결국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조용히 지내다가 1986년 7월 2일 사망하였다.

199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1] 소감공파(少監公派)-양전헌공파(兩傳軒公派) 27세 식(植) 항렬. 족보명은 채중식(蔡中植).[2] 인근의 지묘동과 함께 인천 채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채경식·채명원·채봉식·채학기·채희각 등도 이 마을 출신이다.[3] 배동엽(裵東燁)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