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명부(明夫) |
본관 | 부림 홍씨(缶林)[1] |
출생 | 1892년 |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황청리 (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황청리마을[2] 982번지[3]) | |
사망 | 1934년 5월 10일 |
상훈 | 대통령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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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독립유공자 채송대는 그의 첫째 매부이다.[4]
2. 생애
홍묵은 1892년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황청리(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황청리마을 982번지)에서 아버지 홍기순(洪祺舜, 1858 ~ 1948)과 어머니 인천 채씨(仁川 蔡氏, 1867 ~ 1921)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곽종석의 문하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1926년 1월, 중화민국 베이징시 등지에서 활동하던 김창숙은 군자금 모금차 밀입국하였는데, 그는 내몽골 지방의 미개간지 및 황무지 20만 정보(町步)[5]를 매입하여 이상촌(理想村)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즉, 만주 지역의 한인들을 집결시켜 개간사업을 일으키고, 그 수익금으로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대를 양성하는 둔병식(屯兵式) 제도를 실시함으로써 10년 동안의 실력양성을 통하여 독립을 달성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이에 홍묵은 김창숙의 밀명을 받고 경북 지역의 담당자로 파견된 정수기와 함께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 이기원(李基元)의 집에 가서 군자금을 요청하는 등 유림단(儒林團)의 일원으로서 활동하던 중, 1926년 4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후 1927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의 예심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치안유지법 위반·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및 강도 혐의에 대해 면소로 불기소처분을 받고 당일 출옥했다.
출옥 후 옥고의 여독으로 고통받다가 1934년 5월 10일 사망하였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1] 대율파-신리(莘里)파 23세 섭(燮) 항렬. 족보명은 홍하섭(洪夏燮).[2] 인근의 남산리·대율리와 함께 부림 홍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진옥련도 이 마을 출신이다.[3] 1914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4년 당시 이 지번은 홍묵의 아버지 홍기순(洪祺舜, 1858 ~ 1948)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 이후 이 지번은 1980년 8월 27일 21촌 지간의 족증손(族曾孫) 홍연화(洪淵和, 1941. 10. 14 ~ )에게 소유권이 이전되었다.[4] 첫째 여동생(1898. 6. 20 ~ ?)의 남편이다.[5] 6억 평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