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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5 18:22:49

진옥련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자 / 호 관부(瓘夫) / 청전(靑田)
본관 여양 진씨[1]
출생 1860년[2]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황청리
(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3] 황청리마을 826번지)[4]
사망 1944년 11월 10일[5]
경상북도 군위군
(現 대구광역시 군위군)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78호
상훈 대통령표창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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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00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2. 생애

진옥련은 1860년 경상도 의흥현 부남면 황청리(현 대구광역시 군위군 부계면 동산리 황청리마을 826번지)에서 아버지 진재만(陳在晩, 1834 ~ 1907. 6. 1) 슬하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생으로 곽종석의 문하에서 수학한 바 있었다.

그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뒤 줄곧 조선의 독립을 희망했지만, 형세가 어찌할 수 없었기에 번번이 단념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9년 스승인 곽종석이 파리장서 사건으로 인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자, 독립에 대한 생각이 더욱 커졌다.

그 뒤 그는 4월 26일 스승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노쇠한 몸을 이끌고 집을 나섰다.#

당일 오전 10시경 부계면 동산리 남쪽 입구 도로에서 친구 홍장흠(洪璋欽, 1857 ~ 1925. 2. 25)[6]의 장남으로 구장(區長)을 지낸 홍연구(洪淵九, 1882 ~ 1965. 5. 17)가 인사를 하며 어디에 가시냐고 묻자, 진옥련은 홍연구에게 3.1 운동으로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스승 곽종석의 동정을 살피러 간다고 말하면서, "너는 친구의 아들이기에 믿음이 가는데, 이 지방의 독립운동은 어떠한가? 너도 이 마을에서는 원래 구장을 한 일이 있는 손꼽힐 만한 사람이니, 속히 마을 주민들을 규합해 시기를 골라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운동을 하여 함께 그 목적을 달성하자."고 권유하였다. 이에 홍연구는 "저는 그러한 일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거절했다.

얼마 후 이 사실을 파악한 일본 경찰은 위와 같은 말을 한 것으로 빌미삼아 진옥련을 체포했다. 그는 1919년 7월 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이에 공소하여 그해 8월 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어 결국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1944년 11월 10일 별세하였다.

2003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2007년 5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시중공파(侍中公派)-극재공파(克齋公派)-군위 동산문중 27세 련(鍊) 항렬.[2] 1919년 7월 3일 판결문에는 1850년 9월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는 우선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의 기록을 따른다.[3] 여양 진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홍묵도 이 마을 출신이다.[4] 1914년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1914년 당시 이 지번은 진옥련의 장남 진해상(陳海翔, 1881 ~ 1954. 4. 15)의 소유로 되어 있었다.[5] 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9월 26일 별세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6] 부림 홍씨 대율파-중파(仲派) 종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