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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9 14:35:35

진여공

파일:진(晉) 전서체.png
진(晉) 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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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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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나라 29대 국군
여공
厲公
희(姬)
진(晉)
수만(壽曼), 주포(州蒲)
아버지 진경공(晉景公) 희누(姬獳), 희거(姬據)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573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581년 ~ 기원전 573년

1. 개요2. 패권 다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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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晉)나라의 제29대 군주. 나름 나라를 잘 운영한 아버지 진경공과는 달리 당숙 진영공과 더불어 폭군으로 유명하다.[1] 본명은 희수만(姬壽曼). 《춘추좌씨전》에서는 달리 전하는데, 그 이름을 희주포(姬州蒲)라고 한다.

2. 패권 다툼

진여공 원년(기원전 581년), 아버지 진경공이 죽은 뒤 그 뒤를 이어 진(晉)의 군주가 되었다.

진여공 3년(기원전 579년), 송나라의 대부 화원이 진의 대부 사섭(士燮)과 함께 초나라의 공자 피를 송나라의 허언 서문 밖에서 물리쳤다.

진여공 4년(기원전 578년) 봄, 진(晉)은 제나라, 송나라, 노나라, 조나라, 주(邾)나라, 등(騰)나라의 군주들과 회합하였고, 여름에 위상을 사신으로 보내 진(秦)과 단교했다. 그 후 진여공은 친히 진나라의 중, 상, 하, 신 4군을 거느리고 진(秦)을 쳤다. 진(秦)은 마수 땅에서 패배했다. 경하를 건너 후려 땅에서 치열하게 싸우고 회군하였다. 마수 전투 이후 진(晉)나라의 힘은 더욱 강대해졌다.

진여공 5년(기원전 577년), 정나라는 진나라에게 의지해 후원을 받고자 공자 희를 보냈다. 그리고 초나라의 속국 허나라를 쳤다. 그러나 실패하였고, 정성공은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허나라를 쳤다. 허나라는 버틸 수가 없어서 봉토와 전답을 바치며, 정나라에게 강화를 청했다. 그리하여 정성공은 그 원한을 갚았다.

진여공 6년(기원전 576년), 열이 받은 초나라는 정나라의 땅 폭수를 쳤고, 그 뒤를 이어 위나라의 땅 수지를 쳤다. 정나라의 공자 희는 초나라를 역습해 신석 땅을 취했다. 진나라의 중군장 난서는 초나라에게 보복하고자 했다. 그러나 한궐이 반대하였다. 같은 해 허영공이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초공왕은 공자 신을 보내 허나라의 수도를 섭 땅으로 옮기게 했다. 허나라는 초나라의 속국이 되었다. 그리고 허나라의 원래 영토는 정나라가 전부 먹어버렸다.

진여공 7년(기원전 575년) 봄, 초공왕은 무성에 머물며 공자 성에게 정나라를 치게 했다. 정나라는 여음 땅의 농경지를 바치며, 강화를 청하였다. 그로써 정나라는 진나라를 버리고 초나라에 붙게 되었다. 정나라의 공자 희는 병사를 거느리고 송나라를 쳤다. 그러나 작파 땅에서 패배했고 그 후 또 송나라의 작릉 땅에서 패배했다. 정나라가 송나라와 전쟁을 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정나라에게 잔뜩 벼르고 있었던 진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정나라를 쳤다. 한 방향으로는 진나라의 4군이, 한 방향은 위나라, 제나라, 노나라에 사람을 보내 정나라를 치고자 했다. 정 성공은 그것을 알고 초나라에 구원을 요청했다. 초 공왕은 병사를 보내 정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사마 자반, 영윤 자중, 우윤 자혁에게 3군을 통솔하게 하여 만병들과 힘을 합쳐, 정나라의 언릉 땅에서 진나라 군대와 맞붙어 싸웠다. 이 전투를 언릉 전투라고 한다. 진여공은 투월초의 아들 묘분황의 건의를 받아들여, 초나라의 좌군, 우군을 먼저 치고, 또 중군을 쳤다. 진나라의 장수 위기는 초공왕의 눈에 화살을 맞추었다. 그러자 초나라의 장수 양유기가 그를 활로 쏘아 죽여버렸다. 초나라의 공자 벌은 포로가 되었다. 그 후 묘분황은 포로들로 하여금 일부러 진나라가 준비를 갖추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초 공왕은 자반과 상의해 대책을 세우려 했으나, 자반은 술에 취해 그것에 응할 수 없었고, 초왕은 결국 철군하였다. 자반은 그 일로 인해 벌을 받을 것이 두려워 자결하였다.

전쟁을 치른지 오래지 않아 진나라는 송나라의 사수에서 새로 제후들과 회맹해 정나라를 토벌하려고 했다. 그리하여 진(晉)나라는 제나라, 송나라, 노나라, 주나라 등과 연합해 정나라, 진(陳)나라, 채나라를 쳤다. 정나라의 자한(=공자 희)이 출병해 야습하여, 송나라, 제나라, 위나라의 3개 국의 병력을 패퇴시켰다.

진여공 8년(기원전 574년), 정나라는 공자 비(자는 자사.)를 파견해 진나라 땅인 허[2]와 활 땅을 쳤다. 위나라는 병사를 보내 진나라를 구원하였다. 같은 해 여름 초나라는 공자 성, 공자 인을 시켜 정나라를 도와 진나라에게 맞서게 했다. 오래지 않아 진 여공은 회맹해 주(周), 제, 송, 노, 주(邾)와 연합해 다시 정나라를 쳤다. 초나라의 자중은 정나라를 구원하러 갔다. 그리하여 진나라 연합군은 후퇴하였다. 같은 해 겨울, 진나라는 앞서 말한 것 같이 각국과 다시 회맹하여 정나라를 쳤다. 정나라가 포위되자 초나라 공자 신은 정나라를 구원했다. 각국의 병사들은 초나라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여 퇴각했다. 언릉 전투를 기점으로 정나라는 다시 흥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나라는 정나라를 복속시키지 못했다. 그 뒤로도 정나라를 거듭쳤음에도 불구하고 초나라에서 보낸 구원병을 매번 만나야했다.

진여공 9년(기원전 573년), 진 여공이 아끼는 신하 서동으로 하여금 극지를 살해하게 했다. 서동은 그 기세를 타고 난서와 순언을 협박했으나 여공에 의해 사면되었다. 난서는 순언과 함께 여공이 놀러 간 틈을 타 서동을 주살해버렸다. 그리고 여공을 구금한 뒤 6일 후 그를 살해했다. 그리고 주나라에서 공손 주를 데려와 진나라 군주로 모시니 그가 바로 진도공이다.


[1] 단 아래의 행적을 보면 패권 다툼은 나름 충실히 한 인물이다. 거기다가 서동을 시켜 대신들을 살해한 것을 제하면 폭군이라 할만한 일은 없는 편이고.[2] 허나라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