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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아제르바이잔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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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아제르바이잔
1. 개요2. 역사적 관계3. 현대사4. 상호 교류5. 대사관6. 교통 교류7. 관련 문서

1. 개요

아제르바이잔, 조지아의 대외 관계에 대한 문서.

2. 역사적 관계

서로 인접국인 관계로 역사적 교류 자체는 활발했다. 고대 말 조지아가 아르메니아와 함께 거의 세계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것과 다르게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해당하는 캅카스 알바니아 지역은 페르시아와 마찬가지로 조로아스터교를 고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양 지역간의 문화적 격차가 점점 벌어지게 되었는데 근세에도 조지아 서부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영향으로 상당수 주민들이 정교회에서 순니파 이슬람교 등으로 개종하는 동안, 고대의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호람딘 등을 지지하던 아제르바이잔 주민들은 사파비야의 영향으로 거의 대부분 시아파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다.

중세 조지아 왕국이 강성하던 당시에는 조지아가 아제르바이잔 일대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키질바시들이 사파비 왕조를 건국하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아제르바이잔의 키질바시들은 오늘날에 이란에 해당하는 지역을 정복하고 사파비 제국을 건설한 이후 이란의 순니파 무슬림들이 봉기하자 이들을 진압할 목적으로 조지아인들을 납치해다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시킨 후 이란 각지에 주둔시켜 봉기를 제압하였다. 이란으로 납치된 조지아인들은 이란 현지 유력자들과 연고가 없었기 때문에 사파비 왕조에 충성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사파비 왕조의 인재의 중추를 조지아인들이 구성하게 되었다. 사파비 왕조가 이스파한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이스파한의 군인들이나 황궁의 후궁들은 조지아인들로, 시장의 상인들은 아르메니아인들로 채웠다. 조지아에서는 아제르바이잔과 이란에서 활약한 조지아인들을 기념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과정에서 조지아인들이 강제로 개종당하고 상당수가 납치 과정에서 살해당했기 때문에 좋게 볼 수 만은 없다.

아제르바이잔인들이 건국한 사파비 왕조는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서 패배하면서 조지아 서부까지 완전 장악하는데는 실패하였다. 다만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는 한동안 아제르바이잔계 이란 왕조인 사파비 왕조, 카자르 왕조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19세기 러시아 제국이 트빌리시를 점령하기 이전 트빌리시 주민 대다수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이었다. 러시아 제국에 점령된 이후 아제르바이잔계 주민 상당수가 쫓겨나거나 학살당하고 시아파 이슬람으로 개종했던 조지아인들은 다시 정교회로 개종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모스크들이 정교회 성당으로 개조된다.[1] 다만 조지아 내 무슬림들이 다 쫒겨난 것은 아니고 트빌리시 구시가지에는 현재도 아제르바이잔인 쿼터가 있으며 해당 쿼터에는 마스지드가 남아있다. 또한 트빌리시 근교의 마르네울리(მარნეული), 루스타비(რუსთავი)를 중심으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으며, 반대로 아제르바이잔령인 가흐(Qax), 자가탈라(Zaqatala), 발라캔(Balakən)구 일대에는 조지아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3. 현대사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수 세기 이상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20세기사를 비슷하게 겪어 왔다. 두 나라 모두 1918년 5월 독립을 획득하였고[2], 1920년 아제르바이잔이 붉은 군대에 멸망한 후 1년 뒤 조지아 또한 멸망한다. 두 나라는 이해관계가 달라 갈라지기로 했지만 1918-1920년의 짧은 독립 기간동안 합동으로 국제 승인을 위한 로비를 벌인 역사가 있다. 1919년 프랑스-캅카스 위원회를 유치하고 미국의 지원을 따내기 위한 홍보전 또한 함께 하였다. 더 나아가 두 나라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방위 동맹을 맺고 경제 협력을 개시하기로 한다. 또한 1919년 아제르바이잔 정치인 유시프 배지르 채맨재민리(Yusif Vəzir Çəmənzəminli)의 저작에는 20세기 초반 두 나라의 관계를 보여 주는 문단이 하나 있다.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우호는 양국의 이익에 부합한다. 의심없이 두 나라는 각각 독립을 원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지아에 대한 위협은 아제르바이잔에게도 피해를 입힌다. 두 나라의 독립이 서로에게 의존하는 만큼, 한 나라의 독립이 실효되면 다른 나라 또한 그 지위를 잃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흑해와 카스피해를 잇는 캅카스 산맥을 함께 방어해야 한다.

이 첫 원칙을 넘어 당대 두 나라는 평화와 안정성, 그리고 확장주의적 전쟁에 반대하기 위한 이니셔티브에 동의하였다. 비록 1918~1919 두 해에 걸쳐 두 나라 사이에 국경 분쟁이 있었으나 이것이 무력 충돌로 확대된 적은 없었고 이 문제는 평화 협정으로 잘 해결이 되었다. 1919년 아제르바이잔의 외무부장관 맴매드 유시프 재패로프(Məmməd Yusif Cəfərov)는 아제르바이잔-조지아 방위 동맹을 체결하고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상실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웃으로 함께 살아갈 것이다. 이 협정은 두 이웃 공화국에게 높은 효율과 약속을 안길 것이다. 니콜라이 2세의 제정 시절 우리는 캅카스 국가들이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고, 실제로 삼국은 서로를 전멸시키려고 하였습니다. 이 합의는 우리 캅카스 국가들이 나쁜 상황에서 위험에 처하게 되면 다른 나라들이 국내 감정을 제쳐 두고 함께 죽거나 동등하게 공존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비록 두 나라의 독립을 향한 20세기 초반의 노력이 항구적이고 절대적인 평화를 보장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두 나라는 요동치는 양국 관계 속에서도 그 하한선을 결코 침범하지 않으며 공존할 수 있었다. 소련 시절 두 나라는 다양하게 협력하였고 소련의 해체를 맞았을 때도 협력은 깨어지지 않았다. 아제르바이잔-조지아의 관계는 1961년 5월 17일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캐나다 의회 연설 발언에서 인용된 문구로 잘 설명된다고도 한다.
geography has made us neighbors. History has made us friends. Economics has made us partners, and necessity has made us allies.
지리가 우리를 이웃으로 만들었고, 역사가 우리를 친구로 만들었습니다. 경제가 우리를 파트너로 만들었고, 필요는 우리를 동맹으로 만들었습니다.
- 존 F 케네디, 1961년 5월 17일 캐나다 의회 연설에서

특히 소련 해체 이후 북캅카스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지배력이 약화되고 체첸 전쟁이 격화하면서 점차 북캅카스는 러시아의 '부드러운 아랫배'로 불리게 되었고, 이러한 소수민족들의 반란 주동은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에게도 공동 이슈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2008년 조지아 전쟁이 발발했을 때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조지아를 도왔다. 아제르바이잔 국회의원 아심 몰라자대(Asim Mollazadə, 1953~)는 "러시아가 여러 차례 조지아의 불을 껐을 때, 아제르바이잔은 이를 도로 켜는 것을 도와 왔습니다."라며 우의를 과시하기도 하였다.

이상은 양국 우호 차원에서 작성된 문서를 옮긴 내용인데, 눈치가 빠르다면 알겠지만 구체적인 숫자 없이 대개 말잔치로 2000년대 이전까지 두 나라는 딱 살아남기 위한 필요 이상으로 긴밀한 교류를 한 건 아니었다. 즉 정말로 우호적이기보단 실용주의적인 경향이 강했다.[3]

4. 상호 교류

아제르바이잔은 2000년대 이후 무역량을 늘려가며 조지아에게 있어 수출입 3위를 차지하는 나라로 부상하였기에 서로 영향력이 크다.

아제르바이잔조지아는 서로 소 닭보듯 지내다가, 남오세티야 전쟁 이후 아르메니아를 대신할 철도 및 자원 라인으로 간택해 서로 협력하고 있다. 조지아는 터키와도 협력을 하는데, 조지아/외교에서 터키와의 관계에도 언급되지만 있듯 파이프라인에 아제르바이잔이 큰 몫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조지아는 아제르바이잔과 서로 협력하면서 지내려고 한다. 조지아도 경제적으로 개판된 터에 러시아와 더불어 터키, 아제르바이잔이 경제적으로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는 터라 터키와 아제르바이잔과 협력하고자 한다. 이들 세 나라가 조지아 수출입 절반이나 되는 비중을 차지한다. 자세한 내용은 조지아/경제 항목을 참고하면 된다.

뭐니뭐니 해도 BTC(바쿠~트빌리시~제이한) 파이프라인, 바쿠~수스파 파이프라인이 두 나라의 결속을 강화하고 있다. 바쿠에서는 아르메니아와의 관계 개선 실패로 천연가스 육로 운송 경로가 바쿠~체첸~노보로시스크 루트로 단일화되어 있는 것에 다소 불만이 있었는데, 협조가 영 안되는 아르메니아도 따돌릴 겸 조지아와 협력하게 된 것이다. 카스피해의 막대한 가스 자원을 유럽으로 연결하는 트란스 아나톨리아 파이프라인이 2018년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간 이상, 양 측이 서로를 꼭 필요로 하게 되었다. 정 뭐하면 이란을 경유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이란 정부의 불안정성과 대미 협조를 고려하면 이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바쿠의 파이프라인이 어디를 통할지를 두고는 일찍이 여러 나라가 다투었는데, 이것이 BTC로 확정되는 것은 러시아의 속을 가장 쓰리게 했으며 미국과 아제르바이잔의 전략적 승리가 되었다. 일찍이 보리스 옐친은 1998년 2월 10일 조지아 대통령 암살 미수 다음날 안부 전화를 걸어 오고는 '카스피해 파이프라인은 조지아가 아니라 러시아를 통해야 한다'(48페이지 참조)고 우겨 대며 암살의 뒷배를 의심케 하기도 하였다.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은 유로 2020 공동개최 경쟁후보로 나섰고, 아제르바이잔은 조지아에 축구 경기장 투자를 하겠다며 공격적인 경쟁을 벌였다. 다만 2020년 대회에 대해 난데없이 플라티니 회장이 유로 2020을 한두 나라가 아닌 유럽 여러 도시 분산 경기로 확정하면서 조지아와 같이 분노하기도 하였다.

한편 두 나라는 해묵은 국경 분쟁 문제도 아직 일부 그대로 남겨 두고 있다. 두 나라는 480km에 이르는 국경을 대충 유지하고 있기는 한데, 그 중 1/3은 잠정적으로 묻어 두었을 뿐 아직 국제법적으로 딱 떨어지게 확정한 것은 아니다. 국경획정위원회는 1996년 설립되어 이 중 70%에 달하는 권역에 대해 합의를 보았지만 남은 구간이 장애물이 되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곳은 동굴 수도원을 포함한 다비드 가레자 수도원 유적 단지(David Gareja monastry complex, დავითგარეჯა, Keşikçidağ məbədi)였다. 이 수도원 단지는 고지에 있고 전략적 이유로 두 나라 국경 사이에 끼어 있어 실질적으로 분단된 채 관리되고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도 손색이 없을 고전 프레스코 벽화와 문헌들이 가득 들어 있는 조지아의 자랑거리이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 수도원을 옛 알바니아인[4]들이 지었다며 아제르바이잔의 땅이어야 함을 주장하곤 한다.

이 수도원 문제는 양국 관계에서 은근한 시한 폭탄으로 여겨지는데, 양국이 일단 적대하게 된다면 절대 사수해야 할 국경 고지로 기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두 나라는 이 부분 국경을 관광 문제로 일축하고 싶어 하는 편이나, 행정적 절차를 두고 다투다가 끝내 아제르바이잔 측이 2012년 5월 6일 국경수비대를 전면배치하고 일부 지역에 대한 관광을 차단하는 심술을 부리기도 하는 등 갈등 소지는 그대로 남아 있다.# 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두 나라는 이 지역에서 발생하는 일을 분쟁으로 공식화하기를 매우 꺼린다. 가급적이면 상호간 헛소리를 하지 않고 묻어 두면서 서로 영토 교환을 하든 아제르바이잔의 주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면세지구를 설치하든 논의를 하는 쪽을 선호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양국이 국경획정위를 결렬시키지 않고 아무리 느리든 일단 현상유지에 동의하면서 마주앉아 미래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난세의 캅카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풍경은 아니다. 특히나 조지아-아르메니아 국경분쟁이라든지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국경분쟁에 비하면 완전한 평화에 가장 가까운 곳이어서 대비효과 차원에서 양국은 더욱 이 문제에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군사적으로는 일찍이 GUAM이나 PfP 가입으로 교류를 텄으나 GUAM은 모스크바의 따가운 시선 아래 정치-경제 동맹으로 그 지위를 축소했고 PfP는 NATO 가입 희망국들과 느슨한 방관자들이 혼재하는 자격으로 별 의미가 있다고 보지 않았다. 본래 GUAM은 비셰그라드와 유사한 결속력을 갖도록 기획되었지만 지리적 한계로 그렇게 뭉치기는 영 어려웠고, 조지아와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도 그러했다. 어쨌든 두 나라는 아노미 상태를 간신히 벗어난 2002년 경부터 전방위적인 협력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해 왔고, 가급적이면 서로 다 사이가 안 좋은 이 지역 정세를 고려할 때 웬만하면 좋게 지내려 하는 편이다. 전략적으로 양국 모두 친미 정책을 성공적으로 운영 중인 점 또한 두 나라의 우호에 기여하고 있다. 더불어 2008년 조지아 전쟁으로 군사력에 큰 피해를 입고 경제 불황으로 2012년까지 국방비를 계속 줄여 온 조지아는 더더욱 아제르바이잔과의 우호가 아쉽다.

이 우호 관계는 2020년 아르차흐 전쟁 당시 조지아가 암묵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 국경을 틀어막으면서 그 효험을 보인다. 조지아는 전쟁에 중립을 선언하고 국경을 전부 틀어막았는데, 다른 모든 국경이 러시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튀르키예로 둘러싸인 지리적 특성상 아르메니아는 꽁꽁 묶인 채 튀르키예의 지원을 받는 아제르바이잔에게 맹폭당하고 실질적으로 항복하고 만다. 세르비아, 프랑스 등 일부 국가가 조지아를 경유해 아르메니아를 지원할 수 있을지 의사를 타진하였으나 조지아는 모두 거절하였고, 아제르바이잔은 외무장관을 통해 조지아의 중립에 감사를 표하기도 하였다.

2023년 11월 조지아가 프랑스에서 아르메니아로 가는 군수 물자를 허용함으로써 아제르바이잔은 조지아에 대해 저주하는 메시지를 남겼다.# 요약하자면 아제르바이잔이 있었기에 조지아는 러시아의 에너지 압박을 이겨낼 수 있었고, 조지아가 어려웠던 시기에 아제르바이잔은 조지아를 도왔으나, 현재 조지아 당국은 프랑스와의 관계를 위해 아르메니아에 이런 결정을 내렸는데 그 아르메니아는 소련지배기 조지아로부터 로리(Lori)땅을 넘겨받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조지아의 영토인 삼츠헤-자바헤티 주를 노리고 있고 심지어 이름까지 자바흐(Javakh)라고 아르메니아어화 시킨 이름으로 부르고 있으며[5], 그곳의 조지아의 옛 성당은 아르메니아 고유의 성당이라며 왜곡에 나설것이다. 그리고 지원받은 바스티온 장갑차는 그 땅에서 조지아를 상대로 매우 요긴하게 쓰일것이다. 라는 내용이다.

5. 대사관

조지아는 바쿠에, 아제르바이잔은 트빌리시에 대사관을 두고 있다.

6. 교통 교류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국경과 다르게 조지아 아제르바이잔 국경은 이동이 어렵지 않은 편이다. 야간열차 이외에도 마르슈루트카(Marshrutka)라는 이름의 미니밴으로도 이동이 가능하다. 양국간 직항로 또한 존재한다. 다만 타 구소련 국가들이 그렇듯이 국경이 정확하지 않아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기도 한다.

7. 관련 문서



[1] 오늘날에도 조지아의 일부 성당은 내부 구조가 모스크와 동일하게 되어있다. 다만 건물 벽의 아랍어 문구 장식 등을 완전히 다 제거한 상황이라 모스크 내부 구조를 모르면 해당 건물이 원래 모스크인지 잘 모를 수도 있다.[2] 심지어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수립을 선포한 장소가 바로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였다.[3] 예를 들어 포스트소비에트 조지아의 초대 대통령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는 자국의 소수민족인 아르메니아인, 아제르바이잔인, 오세트인, 아자르인, 압하스인, 러시아인 등을 전부 "불청객(ungrateful guests)"으로 취급했다.[4] 조지아의 옛 지명인 이베리아와 마찬가지로 이 알바니아도 유럽의 동명민족과는 하등 상관이 없는 고대민족으로 현재 이들의 직계후손은 우디인으로 여겨진다.[5] 사실 이건 조지아나 아르메니아 입장에선 어이없는 공갈인데 자바헤티의 아르메니아어 이름 자체가 바로 자바흐이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가 멋대로 지어낸 이름이 아니다. 이해가 안 간다면 한국이 옌지를 연길이라고 부르니 중국에 영토분쟁을 일으킬거라며 일본이 경고한다고 생각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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