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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7 23:06:20

조지 빌리어스 (제2대 버킹엄 공작)

<colbgcolor=#97B3B3><colcolor=#000000> 제2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
George Villiers, 2nd Duke of Buckingham
파일:George Villiers_2nd Duke of Buckingham.jpg
이름 조지 빌리어스
George Villiers
출생 1628년 1월 30일
사망 1687년 4월 16일 (향년 59세)
배우자 매리 페어팩스 (1657년 결혼)
아버지 제1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
어머니 제18대 로스 여남작 캐서린 매너스
형제 메리, 찰스, 프랜시스

1. 개요2. 상세
2.1. 유년기2.2. 잉글랜드 내전에 개입2.3. 찰스 2세와 함께 추방당하다2.4. 귀국 및 투옥2.5. 왕정 복고 이후2.6. 몰락2.7. 은퇴와 사망
3. 캐릭터4. 과학에 대한 관심5. 대중매체6.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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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최악의 간신배로 손꼽히는 초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의 차남으로[1] 제2대 버킹엄 공작이자 19대 로스 남작이다. 영국의 정치가이자 시인이며, 찰스 2세의 재위 기간 때 상당한 정치 권력을 행사하였다.

평소 과학 및 시, 풍자극 등의 연극에 관심이 높았으며 여러편의 저서를 남겼다.

2. 상세

2.1. 유년기

1628년 1월 30일 초대 버킹엄 공작 조지 빌리어스와 18대 로스 여남작 캐서린 매너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찰스 빌리어스가 2살에 요절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버킹엄 공작의 장남이었다.

불과 생후 7개월일 때 아버지가 포츠머스에서 해군 장교 존 펠턴에게 암살되었다. 이에 따라 찰스 1세는 조지와 그의 남동생 프랜시스를 왕실로 데려와 자신의 자녀들인 찰스 2세제임스 2세와 함께 키우도록 한다. 이후 조지는 트리니티 컬리지 케임브리지에서 교육을 받으며 1642년 Master of Arts(인문사회학 분야 학위)를 수여받았다. 당시 토마스 홉스에게 기하학을 배우기도 했다. 또한 이때 훗날 캔터베리의 수석사제가 되는 조지 에글로인비와 알게 되는데, 그는 조지가 잉글랜드 내전에서 왕당파를 지지하도록 설득한 인물이다.

2.2. 잉글랜드 내전에 개입

잉글랜드 내전 당시, 그는 왕을 위해 싸웠으며, 1차 내전 중인 1643년 4월에 벌어진 리치필드 공방전에서 컴벌랜드 공작과 함께 참전하기도 했다.

노섬벌랜드 백작의 보호 하에 그와 그의 형제가 피렌체와 로마를 여행하게 되었으며, 2차 내전이 발발하게 되자, 그들은 1648년 7월, 서레이에서 홀란드 백작, 핸리 리치의 지휘 하에 왕당파에 합류하게 된다. 홀란드 백작은 600명의 소규모 부대를 모은 뒤 버킹엄 공작을 그의 기병대 지휘관으로 임명하게 된다. 이 부대는 이후 공작의 동생인 프랜시스가 살해당하게 된 킹스턴 부근의 소규모 교전 이후 흩어지게 된다. 버킹엄 공작 자신은 이때 의회군 6명을 상대로 후일 카발리어 전설의 영물로 알려진 참나무를 들쳐매고 영웅적인 활약을 보인 뒤 탈출하게 된다. 이후 세인트 네오츠에서 전투를 치른 뒤, 공작은 네덜란드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2.3. 찰스 2세와 함께 추방당하다

내전에 적극 참전한 경력으로 인해 1647년 부여되었던 영지를 몰수당했고 이 영지는 후일 장인이 되는 토마스 페어팩스 경에게 주어지게 된다. 1649년 9월 19일 찰스 2세에게 가터 훈장을 수여받고 1650년 4월 6일 추밀원 의원으로 서임받았다.

이 시기 버킹엄 공작은 스코틀랜드 장로교와 손을 잡고 찰스 2세를 스코틀랜드로 입국시킨 뒤 아가일 후작과의 동맹을 성사시켰지만 당시 10월에 진행될 예정이었던 왕당파의 음모에 찰스 2세가 관여하는 것을 차단하였다. 이에 왕당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계획을 버킹엄 공작이 배신했다고 간주했다. 그해 5월 버킹엄 공작은 잉글랜드 동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병력을 모으기 위해 보내지고 이듬해 랭커셔에 모인 군대와 스코틀랜드 왕당파의 지휘관으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1651년 9월 3일에 벌어진 우스터 전투에서 찰스 2세를 위해 싸우자고 하면서 홀로 10월에 로테르담으로 탈출했다. 이후 버킹엄 공작은 올리버 크롬웰과 협상을 벌이며 교회의 이익을 희생하려 하는 모습까지 보여서 찰스 2세의 다른 참모들과 분리되어 영향력이 떨어지게 된다. 이러한 왕실과의 불화는 버킹엄 공작이 찰스 2세의 여동생으로 남편 오라녀 공 빌럼 2세와 사별한 오라녀 공비 메리에게 적극적으로 구애하고 찰스 2세와 금전 문제까지 일으키면서 더욱 크게 촉발된다.

2.4. 귀국 및 투옥

1657년 잉글랜드로 돌아왔다. 그해 9월 15일 토마스 페어팩스 경의 딸이자 체스터필드 백작 필립 스탠호프와 결혼이 예정된 메리 페어팩스와 결혼하게 된다.

이후 올리버 크롬웰 정부를 상대로 장로교와 결탁해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고 10월 9일 법원에서 체포 영장을 발부하게 된다. 버킹엄 공작은 1658년 4월 요크 하우스에 가택연금되었지만 이내 탈출한 뒤 그해 8월 18일에 다시 체포되었다. 곧 런던탑에 수감되었지만 어머니 캐서린 매너스와 장인 페어팩스 경이 정부와 협상을 한 끝에, 1659년 2월 정부와 적대적인 세력을 돕지 않겠다는 약속과 페어팩스 경의 2만 파운드를 담보로 풀려났다. 이후 1660년 1월 존 램버트 장군을 상대로 진군하는데 있어 장인인 페어팩스 경을 합류시켰으며, 이후 찰스 2세스튜어트 왕조가 복고되자 페어팩스 경의 공로를 주장했다.

2.5. 왕정 복고 이후

버킹엄 공작은 찰스 2세가 돌아온 후 처음에는 냉대받았으나 곧 다시 호의를 얻었다. 1661년 4월 23일 찰스 2세의 대관식 때 침실 시종관(Gentleman of the Bedchamber)으로 지명되어 소버린 홀을 들었으며, 9월 21일 요크셔 웨스팅 라이딩의 주지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찰스 2세의 막내여동생 잉글랜드의 헨리에타와 함께 파리로 가서 헨리에타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결혼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헨리에타 공주에게 파렴치하게 접근하는 바람에 본국으로 소환당하게 된다. 1662년 4월 28일 추밀원에 참석하였으며 이때 몰수되었던 연간 26,000파운드에 달하는 부동산을 돌려받으면서 국왕의 가장 부유한 신민 (The king's richest subject)이라고 선언되었다. 1663년 요크셔의 반란을 예비 진압하는데 기여했고 1665년 제2차 영란전쟁에서 해전에 종사한다. 또한 1666년 6월에는 영-프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대법관이었던 제1대 클라렌든 백작 에드워드 하이드[2]의 영향으로 인해 고위직에서 제명된다. 이에 버킹엄 공작은 그를 파멸시킬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그는 아일랜드 소의 수입을 금지한 1667년 수입법을 지지하기 위해 서민원, 귀족원에 정당을 조직하였으며, 클라렌든 백작에 부분적으로 반대하면서 제임스 피츠토마스 버틀러, 오몬드 공작의 계획을 좌절시키게 된다. 위의 논쟁 중 그는 "법안에 반대하는 누구나 아일랜드와 이해 관계가 있거나 아일랜드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게 되는데, 이로인해 오몬드 작의 아들인 오소리 백작의 결투 신청을 받게 된다. 그는 백작과의 만남을 피했고, 백작은 런던탑에 보내진다. 얼마 뒤 12월 19일 양원 간의 회의 중 그는 도체스터 후작과 격투를 벌이게 되었고, 그는 후작의 가발을 벗겨버렸는데 후작 역시 손으로 공작의 머리를 뽑았다고 한다. 클라렌든 백작에 따르면, 이런 노골적인 범법행위가 귀족원의 존엄을 상하게 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두 사람 모두 런던탑에 보내지게 되었는데 곧 화해와 함께 석방되었다. 그러나 공작은 도체스터 후작의 사위가 가지고 있던 로스 후작 위의 소유권을 주장하며 그에 대한 악의를 퍼뜨리게 된다. 위에서 벌인 그의 행위로 인해 공작은 왕의 총애를 잃게 되었으며, 이제 그는 반역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와 왕의 운세를 점쳤다는 혐의를 받아 1667년 2월 25일에 체포가 명해졌으며, 모든 공직에서 해임되게 된다. 그는 6월 27일까지 체포를 피했으나 자수한 뒤 런던탑에 투옥되게 된다.
7월 17일 그는 석방되었고, 9월 15일 왕의 호의를 회복받았으며 정적이었던 클라렌든 백작의 기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백작이 몰락하자 1668년 그는 엘버말 공작으로부터 사들였던 거마 관리관 (Mater of The horse) 외의 고위직책을 맡고 있지 않았음에도 수상(Chief minister)에 임명되게 된다.

공작은 1667년에 "잉글랜드의 아프리카로의 교역을 위한 왕립 탐험회사를 위한 주요 선언문(The Several Declarations of The Company of Royal Adventurers of England Trading into Africa)"에 서명하며 왕립 아프리카 회사의 설립을 주도하게 된다.

1671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교 총장에, 그리고 1672년 옥스퍼드 대학교의 최고 관리관(High stweward of Oxford University)에 선출되게 된다. 그는 종교적 관용을 선호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시 영국 내 개신교의 대표인사인 리차드 백스터의 칭찬을 받게 된다. 그는 1668년 포용 계획을 지원하였으며, 1672년 '관용을 위한 왕실 선언(Royal Declaration of Indulgence)'를 조언하게 된다. 그는 스키너 사건에서 영주의 본래 관할권을 옹호하기도 했다. 이러한 경우를 제외하고 그의 임기는 주로 스캔들과 음모로 점철되게 된다. 슈로즈버리 백작 부인과의 불법적 관계로 인해 1668년 1월 16일 그는 반 엘름스에서 슈로즈버리 백작과 결투를 벌이게 되었고 이 때 백작이 치명상을 입게 된다. 백작 부인을 시종으로 꾸며 밀회를 즐겼다는 이야기는 증거가 없으나 그가 부인과 함께 사는 저택에 "자신이 만들어낸 미망인"과 함께 보내며 아내를 아버지인 페어팩스 경의 집으로 보냈을 때 공분을 사게 된다.

공작은 당시 찰스 2세 사이에 자녀가 없던 브라간사의 캐서린과 이혼을 고민하는 데 있어 배후로 지목되었다. (물론 이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고 공작은 당시 요크 공작 제임스, 윌리엄 코벤트리 경, 오르몬드 공작에 대해 음모를 꾸몄다. 심지어 오르몬드 공작을 납치, 살인하려했던 토마스 블러드를 선동한 혐의를 받았고, 이로 인해 오소리 백작이 자신의 아버지가 폭력적인 결말을 맞게 되면 그를 쏘겠다는 위협을 하며 왕의 면전에서 기소하게 된다.

당시 왕의 총신이자, Cabal Ministry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지닌 알링턴 백작 헨리 버넷을 극복하지 못했는데, 당시 백작은 공작의 외교통제에 있어 상당한 영향력을 얻어냈다. 알링턴 백작은 윌리엄 템플 경을 통해 1668년 스웨덴 - 네덜란드와 삼국 동맹을 체결하게 되는데, 당시 공작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지지하고 있었다. 1670년 찰스 2세이 삼국 동맹에 반하여 프랑스와 제1차 도버 조약을 비밀리에 5월 20일에 체결하는데 이때 알링턴 백작은 조약 체결 임무를 맡게 된다. 그리고 공작은 프랑스로 파견되어 1670년 12월 31일과 1672년 2월 협상을 진행하게 되는데 이는 정식 조약을 위한 가짜 협상이었으며, 이를 통해 도버 조약은 정식 조약으로 선언되게 된다. 루이 14세는 "그 어떤 임무보다 그가 해낸 일만큼 영애로운 것은 없었다."며 슈로즈버리 백작부인에게 연간 10,000 리브로의 연금을 선물하게 된다.

제3차 영란전쟁 중인 1672년 6월, 공작은 알링턴 백작과 함께 뉴베리브뤼크로 가서 오랴네 공 윌리엄에게 조약을 강요했고, 알링턴 백작이 제시한 조건을 그가 거부하자 루이 14세와 함께 히스베르크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후 그는 숌버그 공작이 조직한 Blackheath 연대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는데 그는 당시 큰 실망을 하게 된다. 비록 지휘권을 넘겨받았지만 숌버그 공작 아래에서 복무를 하게 되었다는 점에 그는 분개하게 된다. 이때 그는 자신이 진행했다고 생각한 도버 조약이 실제로는 알링턴 백작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1673년 말에는 알링턴 백작에 대한 질투가 공공연한 적대감으로 발전하게 된다. 공작은 곧 알링턴 백작을 탄핵하겠다고 위협했고 루이 14세의 도움을 받아 의회에서 백작에 반대하는 파벌을 선동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2.6. 몰락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고, 1674년 1월, 양원은 모두 공작을 공격하게 된다. 귀족원에서는 어린 슈로즈버리 공작의 대리인은 공작이 모친인 백작 부인과 밀회를 공공연히 이어가고 있는 것과 그들의 아들이 코번트리 백작으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음을 불평하였다. 공작과 백작 부인은 이에 사과하였으며 동거를 지속하지 않겠다며 10,000 리브로의 연금을 제공하게 된다.
서민원에서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체결할 때 Popery로써 주도했다는 점과 임의로 체결했다는 점으로 공격받게 된다. 그는 알링턴 백작을 비난하는 것으로 대부분 시간을 할애하며 자신은 변호하게 된다. 그러나 서민원은 찰스 2세에게 의회, 알현자, 공직에서 버킹엄 공작을 제외할 것과 요청하는 성명을 승인하게 된다. 유리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찰스 2세는 버킹엄 공작의 폭로에 격노하며 즉시 수용하게 된다.

공작은 은퇴한 뒤 생활 방식을 바꾸고 아내와 함께 교회에 나가고 빚 또한 갚으면서 애국자가 되었다. 의회와 반대파에서 자신들의 지도자 중 하나로 주장되기도 했다. 1675년 봄, 그는 심사법(Test act)에 대한 반대와 가톨릭 주교에 대한 박해로 눈에 뛰었고 11월 16일에는 비순응주의자를 위한 구제 법안을 제출하게 된다. 1677년 2월 15일 그는 에드워드 3세의 법령에 따라 1년에 한번 의회를 소집하지 않은 체 의회가 최근의 처분으로 해산되지 않았는지 여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정부를 난처하게 하려던 4 명의 영주 중 한명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 제기는 곧 기각되었고 4명은 사과를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나 이들은 거절하게 된다. 그러자 그들은 곧 런던탑에 보내지게 되는데, 그럼에도 그는 시민원의 비난을 비웃으며 화를 내게 된다. 7월에 그들은 풀려났고 곧 프랑스 대사 폴 바리용과 음모를 꾸며 왕에게 물품이 공급되는 것을 방해한다. 그리고 1678년 반대파를 위해 루이 14세의 도움을 구하고자 파리를 방문하게 된다.

그 해 벌어진 구교도 음모 사건[3]에 연루된 사람들을 기소하는 데 적극 참여하였으며, 가톨릭 신도들이 편애되는 과정 속에서 대법관 윌리엄 스크롭스 경을 대법원에서 기소하게 된다. 이 때문에 그의 체포를 위한 영장이 발부되었으나 송부되지 않았다. 그는 휘그당 후보자들이 의회로 복귀하도록 촉구하였으며, 반대파의 옹호자가 되었고, 런던 시의 자유민[4]로 공인되게 된다. 그러나 가톨릭 신도들의 배제 문제에서 휘그당으로부터 스스로를 배제한 그는 몬머스 공작과 샤프츠버리 백작을 싫어했던 탓에 1680년 11월 15일에 귀족원에서의 대토론회를 참석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1684년 왕의 총애를 회복하게 된다.

2.7. 은퇴와 사망

찰스 2세의 사후 그의 동생 제임스 2세가 즉위하자 그의 치하에서 공직을 맡지 않았다. 이후 건강과 재정이 악화되자 요크셔 헴슬리의 영지로 돌아갔다. 1685년 '인간이 종교를 갖는 합리성에 관한 짧은 담론'이라는 제목의 팜플렛을 출판했는데 이때 주요한 주제를 논한 뒤 자신의 관심 분야인 종교적 관용으로 관심을 돌리게 된다. 버킹엄 공작이 발매한 이 팜플렛은 몇가지 반박을 불러 일으켰으나 윌리엄 펜과 다른 이들의 옹호를 받기도 했다. 공작 본인도 1685년에 발표한 '버킹엄 공작이 자신의 논문에 대한 짧은 답변을 무명의 저자에게 보낸 편지(Duke of Buckingham's letter to the unknown author of a short answer to the Duke of Buckingham's paper)'에서 자신을 변호했다. 제임스 2세는 버킹엄 공작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기 위해, 신부를 보냈으나 정작 공작은 그런 제임스의 제안을 비웃었다. 1687년 4월 16일 요크셔 커크비무어사이드에 있는 세입자의 집[5]에서 사냥하러 나갔다가 감기에 걸려 사망했는데, 죽기 직전 "내 조국에서 멸시를 받고, 내가 신에게 버려졌음을 두려워합니다"라고 고백하며 회개를 하였다고 한다.

사후 버킹엄 공작은 1687년 6월 7일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헨리 7세 예배당에 국왕이자 먼저 죽은 찰스 2세보다 더 화려하게 매장되었다. 제2대 버킹엄 공작의 죽음으로 그의 아버지 초대 버킹엄 공작이 무소불위의 권력과 영향력으로 세운 빌리어스 가문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버킹엄 공작이 적자녀는 물론 사생아도 남기지 않아 그의 작위와 칭호는 소멸되고, 재산까지 사라졌는데 그 흔적이라곤 오직 공작이 버킹엄셔 클리브덴에 건설한 대저택 중 테라스 뿐이다.

3. 캐릭터

공작은 당대 전형적인 복원 시대의 방랑자 (archetypal Restoration rakes) [6]인데, 로체스터 백작, 찰스 세들리 경, 미들섹스 백작, 윌리엄 위첼리, 조지 에터레지 경 등이 포함된 궁중의 Merry gang [7]에 속해있다. 당시 국왕이 정한 어조에 따라 이들은 술, 섹스, 재치 있는 대화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버킹엄 공작은 종종 "17세기의 알키비아데스"처럼 과시하고 음탕하며 비양심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한번은 공작이 뉴마켓에 있는 술집에 한 남자를 초대해 그의 주의를 돌리는 동안, 그의 친구 로체스터 백작이 남자의 집에 몰래 들어가 남자의 여동생에게 약을 먹이고, 집을 털고, 그의 아내를 유혹한 다음 버킹엄 공작도 함께 하도록 그의 아내를 술집으로 데려와 성관계를 가지게 했는데 남자는 나중에 자살하게 된다.

그러나 공작을 비판하는 이들도 그가 유머러스하고, 성격이 좋고, 관대하며, 탁월한 모방자이자 패션 리더라는 점에 동의했다. 그의 도덕적 결점과 수준 낮은 사생활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모와 재치는 그를 동시대 사람들이 거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당시 찰스 2세의 궁정에 속했던 이는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정중하고, 상냥하며, 관대하고, 관대합니다. ... 그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 반면에 그는 무신론자이고 신성모독자이며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악명 높습니다. 그의 방탕함은 그가 너무나 얽혀 있어서 성별이나 나이, 조건에 관계없이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존 레레슬리 [8]는 "내가 본 이 중 첫번째 신사"라고 불렀으며, 딘 록키어는 그의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승마, 춤, 펜싱 기술을 언급한 뒤 " 그가 회의실에 들어왔을 때 그가 따라가는 동안 눈으로 그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매우 우아하게 움직였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공작은 경주와 사냥을 매우 좋아했으며, 그의 이름은 오랫동안 요크셔의 사냥 노래에 남아있었다.

공작은 에이브럼 코슬리, 토마스 스프랫트. 매튜 클리포드, 윌리엄 위첼리 등 작가들의 후원자였다. 그는 또한 화학에 관심을 가져 램배스에 Vauxhall 유리 공장을 세웠다. 존 드라이든은 그의 시 "압살론과 아키토펠"에서 지므리라는 케릭터로 그를 묘사하였다.

" 너무나 여러 가지로 다양한 인물로 보였고 / 한 사람이 아니라 인류의 단순화였습니다. / 고집 센 사람으로 항상 잘못을 했으며, 모든 것을 시작만 했지 오래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달의 주기동안 / 연금술사, 바이올리니스트, 정치인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 어리석은 사람들에 의해 거지로 만들어지고, 그러나 그는 여전히 너무 늦게 그들을 발견했으며, 그는 재미를 즐겼지만, 그들은 그의 재산을 가져갔습니다." [9]

"그는 최상의 것을 보고 찬양했다," 브라이언 패어팩스(Brian Fairfax)는 말했다. "그러나 종종 'deteriora sequi' [10]". 버킹엄 공작 자신이 쓴 글에는 "내가 보면, 방종한 시간들이 지나가고,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돌아보고 나를 비웃는 것 같아"라고 써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록한 말은 "오! 내가 가장 귀중한 것 중 가장 낭비가 많은 사람이었구나 - 시간!"이다.

버킹엄 공작은 분명히 시적 재능은 가지고 있었지만 다소 미숙한 상태로 시, 팜플렛, 풍자글, 풍자극 및 희극을 썼다. 그의 작품 모음은 1704년 톰 브라운에 의해 처음 출판되었으나 많은 작움은 실제로 그의 것이 아니었다. 또한 공작의 노트에서 흥미로운 발췌문들이 1898년 Quarterly Review에 실렸다.

그는 영웅극을 풍자한 희극인 "The Rehearsal"의 저자인데, 이는 존 드라이든의 "The Conquest of Granada"를 풍자한 작품으로 1671년 12월 7일 Theatre Royal에서 초연되었으며, 1672년 처음 출판되었다. "The Rehearsal"은 매우 큰 인기를 끌었으며 헨리 필딩의 "Tom Thumb the Great"와 셰리든의 "The Critic"에서 모방되었다. 사무엘 버틀러도 이 작품에 손을 댔을 것으로 여겨졌다. 존 드라이든은 "압살론과 아키토펠"에서 공작을 지므리로 묘사하며 그의 복수를 실행했다.

공작은 이후 2개의 각색된 희곡을 출판하였는데, 존 플레처의 "The Chances" (1682)와 보먼트와 플레처의 "Philaster"에서 각색한 "The Restoration or Right will take place" (1714), 그리고 "The Battle of Sedgmoor"와 "The Militant Couple" (1704)도 출판했다. 그의 작품의 최신판은 T.에반스에 의해 편집되어 1775년에 2권의 책으로 출판되었다. 우드에 의해 언급된 또 다른 작품인 "A Demonstration of the Deity"는 현재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4. 과학에 대한 관심

공작은 프랑스 망명 당시 내전 중 얻은 과학에 대한 관심을 평생 가지고 갔다. 망명지에서 그는 찰스 2세의 도움을 받아 다양한 실험을 수행했는데, 특히 연금술에 관심을 가져 현자의 돌을 생산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된다. 이때부터 시작된 연금술에 대한 집착은 평생 계속 되었으며 심지어 왕궁에 출근하지 않은 것이 연인을 만나는 것으로 오해를 사기도 했다.

공작은 여러 실험실을 설립하여 실험을 수행했는데, 첫번째는 페어팩스 경의 영지에 지은 시설로, 메리 페어팩스와의 결혼을 통해 인수하게 된다. 또한 그는 웨스트민스터의 월링고드 하우스에 실험실을 설치했는데, 이 곳은 왕정 복고 후 그에 의해 설치되었다. 나중에 그가 왕실의 총애를 받지 못하자 그는 자신의 취미를 즐기면서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 페어팩스 홀로 돌아갔다. 나중에 그가 반역죄로 기소되어 런던탑에 갇혔을 때 실험을 계속할 수 있도록 자신의 개인 실험실 설치를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기도 했다.

개인적 관심 외에도 공작은 폭 넓은 과학 연구에 참여했는데, 1661년 5월 15일 왕립학회 회원으로 임명된다. 이때 협회는 그의 전문분야를 "화학"으로 분류하였다. 공작은 정기적이지만 낮은 수준의 관심을 유지했는데, 이를테면 학회는 그에게 주간 실험을 위해 그의 화학자에게 목탄을 증류하도록 지시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고, 회원들이 조사할 수 있도록 유니콘 뿔 샘플을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 1666년 12월 4일 노샘프턴 백작과 엑서터 주교가 학회를 위해 요크 하우스, 스트랜드에 몇 개의 방을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도록 임무를 맡기도 했다.

공작은 또한 화이트홀에 있는 왕의 개인 실험실에도 자주 방문해 왕과 함께 실험과 해부를 관찰하는 등 다른 과학 활동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그는 Vauxhall 유리공장을 인수한 뒤 확정하였다. 존 이블린으 1676년 9월 19일 일기에서 그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의 품질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찰스 2세와 달리 그는 식물학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1679년 7월 23일, 존 이블린이 클리브덴 하우스를 방문했을 때, 그곳은 정원이 주로 양치식물로 이루어진 것을 보고 실망했었다. 브라이언 페어팩스는 클리브덴 하우스를 버킹엄의 비싼 "Substructiones Insanae" [11]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때 공작은 자신의 실험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한 탓에 건강을 해치게 되었고 후일 수은 중독 증상을 보이게 되었다.

5. 대중매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어린 공작도 알렉산드르 뒤마삼총사 시리즈 중 "브라겔론 자작, 10년 후"에 등장하게 된다. 작품에서 그는 찰스 2세의 여동생 헨리에타 공주와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1세의 결혼을 위해 프랑스로 공주를 호위하게 된다. 이때 그는 젋은 여인에게 반하게 되었는데, 필리프가 이를 눈치채고 어머니인 안 도트리슈[12]에게 호소하게 되고, 양국의 관계를 위해 그를 귀국시키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하여 공작을 설득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에 있는 동안, 그는 밀라디 드 윈터의 연인이자 아버지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콩트 드 와르드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콩트는 공작을 영국으로 가는 배가 있는 곳까지 호송하지만 출발 전 두 사람은 결투를 벌여 드 와르드가 부상을 입게 된다.

2003년 BBC One에서는 Charles II: The Power & the Passion가 방영되었는데 버킹엄 공작은 주연으로 다뤄지며 루퍼트 그레이브스가 연기하였다.

2004년에 개봉한 영화 Stage beauty에서는 벤 채플린이 버킹엄 공작을 연기하였다.

6.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George_Villiers,_2nd_Duke_of_Buckingham


[1] 형 찰스가 요절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장남이었다.[2] 제임스 2세의 첫번째 아내 앤 하이드의 아버지.[3] 반가톨릭 신봉자였던 티투스 오즈에 의해 가톨릭 신도가 반란을 준비했다는 허위 음모 조작 사건[4] The city of London의 헌장에 의해 보호자격을 얻은 시민을 지칭한다.[5] 버킹엄 하우스로 알려져 있으며 시내 중심에 있다.[6] 왕정 복고 이후 문학에서 등장하는 전형적인 캐릭터이며 방탕과 흥분을 즐기며 사교적인 삶을 추구하고 도박, 술, 성적 행위를 즐기는 것이 특징이다.[7] 파티를 자주 즐기는 그룹[8] 17세기 영국의 정치가, 버킹엄 공작과 동시대에 활동했다.[9] A man so various that he seemed to be/Not one, but all mankind's epitome;/Stiff in opinions, always in the wrong,/Was everything by starts and nothing long;/But, in the course of one revolving moon/Was chymist, fiddler, statesman and buffoon../..Beggar'd by fools, whom still he found too late,/He had his jest, but they had his estate.[10] 라틴어로 '최악을 따르다'[11] 라틴어로 미친 기반 시설, 로버트 버튼의 "우울증의 해부학"에서 처음 등장한 표현으로 귀족들이 화려하게 부동산을 건설하여 특정 지역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확립하려는 시도를 가리킨다. 버튼은 그러한 시도가 종종 프로젝트의 규모가 소유주의 재산을 고갈시켜 재정적 파산으로 끝난다는 의미로 썼다.[12] 전작인 삼총사에서 안은 초대 버킹엄 공작과 사랑에 빠진 것으로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