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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21 12:50:42

조지 고든(제4대 헌틀리 백작)

성명 조지 고든
George Gordon
출생 1514년
스코틀랜드 왕국
사망 1562년 10월 28일 (향년 47 ~ 48세)
스코틀랜드 왕국 벤코리 인근 코리치 언덕
아버지 고든 경 존 고든
어머니 마거릿 스튜어트
형제 알렉산더, 제임스
배우자 엘리자베스 키스
자녀 토머스, 조지, 마거릿, 진, 엘리자베스, 알렉산더, 존, 윌리엄, 제임스, 아담, 패트릭
직위 제4대 헌틀리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거친 구혼 시기에 잉글랜드에 맞섰고, 메리 여왕에 맞섰다가 코리치 전투에서 전사했다.

2. 생애

1514년생이며, 아버지는 고든 경 존 고든이고, 어머니는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4세정부 마거릿 드러먼드의 사생아인 마거릿 스튜어트였다. 형제로 알렉산더[1], 제임스[2]가 있었다. 1517년 아버지가 사망했고, 1520년 조부인 제3대 헌틀리 백작 알렉산더 고든이 사망한 뒤 가문의 영지와 작위를 물려받았다. 1537년 북부 스코틀랜드의 중장으로 임명되었고, 1540년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오크니 제도헤브리디스 제도 원정에 참여했다.

1542년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참여해 국경 지대에서 1만 장병을 이끌었다. 헌틀리 백작은 적이 쳐들어오기 전에 선제 공격하려 했지만, 많은 스코틀랜드 귀족이 "적군이 스코틀랜드를 침공하지 않는 한 그들을 공격하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그러다가 로버트 보우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 선봉대 3,000명이 스코틀랜드 국경을 넘어 헤든 리그로 진군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그제야 헌틀리 백작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1542년 8월 24일, 헌틀리 백작은 즉시 새볔녁에 헤든 리그로 진군한 뒤, 방심하고 있던 잉글랜드군을 급습했다. 그 결과 잉글랜드군 2,000명 이상이 전사했고 600명이 생포되었는데, 사로잡힌 이들 중에는 로버트 보우스, 윌리엄 모브레이 경, 그리고 잉글랜드 북부의 저명한 귀족 60여 명이 있었다. 스코틀랜드군의 손실은 기록상에 전해지지 않는데 매우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임스 5세와 갈등을 벌이다가 곧 해임되었고, 스코틀랜드군은 같은 해 11월 솔웨이 모스 전투에서 참패했다. 1542년 11월 제임스 5세가 중병을 앓다가 사망한 뒤, 1살 밖에 안 된 유아 메리가 스코틀랜드 여왕이 되었다. 그는 제2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이 이끄는 섭정 의회에 참여했다. 반 잉글랜드 정서가 강했던 헌틀리 백작은 섭정 의회 다수가 친 잉글랜드 성향을 보이는 것에 공감할 수 없었고, 마리 드 기즈 왕대비와 스코틀랜드 추기경 데이비드 비튼이 이끄는 친 프랑스파와 가까워졌다. 이와 동시에 잉글랜드 북부 지역의 질서 회복에 힘썼다. 1544년에는 캐머런 씨족의 반란을 진압했고, 1550년에는 모레이에서 일어난 매킨토시 씨족의 반란을 진압했다.

1546년 데이비드 비튼 추기경이 살해된 후, 헌틀리 백작은 스코틀랜드 대법관으로 선임되었다. 1547년 잉글랜드 호국경 에드워드 시모어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쳐들어오자 휘하 병력을 동원해 아란 백작이 이끄는 스코틀랜드군에 가담했고, 그 해 9월 핑키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패배를 면치 못하고 생포되었다. 하지만 곧 메리 여왕과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6세의 결혼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다. 그는 스코틀랜드로 돌아온 뒤 처음에는 마리 왕대비의 친프랑스 정책을 지지했지만, 1554년 마리 왕대비가 모레이 백작 작위에 대한 주장을 지지하지 않자 그녀와 불화가 생겼다. 1559년 개신교 신자들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마리 왕대비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았지만 잠자코 있었고, 1560년부터 반란군을 지원했다.

마리 왕대비 사후 스코틀랜드 정계에서 우위를 차지한 개신교 신자들은 메리 여왕이 프랑스에서 귀환한 뒤 보수적인 가톨릭 신자인 헌틀리 백작을 권력에서 배제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헌틀리 백작은 1562년 스코틀랜드 각지를 순방 중이던 메리 여왕이 인버네스 성에 입성하는 걸 거부했다. 이에 스코틀랜드 정부는 헌틀리 백작에게 소환령을 내렸지만 거부당하자 반역자로 규탄하고, 제임스 5세의 사생아이자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가 이끄는 왕실군이 출진해 1562년 10월 벤코리 인근 코리치 언덕에서 헌틀리 백작의 군대를 격파했다. 헌틀리 백작은 패배 후 생포되자마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1563년 5월, 헌틀리 백작의 영지는 의회에 의해 몰수되었다가 1565년 메리 여왕이 그의 아들인 조지 고든을 헌틀리 백작으로 복귀시켜주면서 부활했다.

3. 가족


[1] 1516 ~ 1575, 글래스고 주교, 군도 주교, 갤러웨이 주교[2] 모레이의 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