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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09-28 08:43:22

조지 고든(제5대 헌틀리 백작)

성명 조지 고든
George Gordon
출생 미상
스코틀랜드 왕국
사망 1576년 10월 19일
스코틀랜드 왕국 스트라스보기
아버지 제4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
어머니 엘리자베스 키스
형제 토머스, 마거릿, 진, 엘리자베스, 알렉산더, 존, 윌리엄, 제임스, 아담, 패트릭
배우자 앤 해밀턴
자녀 알렉산더, 진, 제임스
직위 제5대 헌틀리 백작

1. 개요2. 생애3. 가족

1. 개요

스코틀랜드 왕국의 백작, 군인. 메리 여왕 내전에서 메리 여왕의 폐위에 반대하여 제임스 6세를 내세운 스코틀랜드 정부에 맞섰다.

2. 생애

제4대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과 마리샬 영주 로버트 키스의 딸 엘리자베스 키스의 차남이다. 1556년부터 인버네스의 보안관을 맡았으며, 1556년 여름 내내 배드노크의 선장으로서 둔켈드에서 인버네스 성에 머무는 마리 드 기즈에게 에든버러에서 보낸 편지를 운반하는 책임을 맡았다. 1562년 아버지가 메리 여왕을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가 코리치 전투에서 패배해 생포된 직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형제 존은 사흘 후 처형되었고, 그는 키닐 하우스에 투옥된 뒤 반역 혐의로 유죄 판겨을 받고 1563년 사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실제로 집행되지는 않았고, 던바 성에 투옥되어 수년간 옥고를 치렀다.

1565년 메리 여왕이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와 결혼하자, 초대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 등이 이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메리 여왕은 그 해 8월 3일에 조지 고른을 풀어준 뒤 반란 진압을 돕게 했다. 반란이 성공적으로진압된 뒤, 메리 여왕은 1565년 10월에 그를 제5대 헌틀리 백작에 선임했다. 다만 영지는 당시에 지급되지 않았다가 의회에서 작위 복원을 비준한 1567년에야 모두 돌려받았다. 메리 여왕은 고든 가문과의 화해의 표시로 1566년 2월 24일에 헌트리 백작의 여동생인 진 고든과 제4대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의 결혼을 주선했다. 두 일족은 이제 메리 여왕의 가장 중요한 동맹 세력이 되었다.

1566년 3월,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를 내세운 공모자들이 메리 여왕의 총애를 받던 비서관 데이비드 리치오를 살해하고 궁정을 장악했다. 이에 헌틀리 백작은 보스웰 백작과 손잡고 군대를 일으켜 공모자들을 공격해 축출했다. 그 후 1566년 11월 스코틀랜드 대법관에 선임된 그는 1567년 2월 10일 단리 경 암살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의심을 받았지만 분명하지 않다. 그는 대법관으로서 단리 경 암살 혐의를 받던 보스웰 백작에게 무혐의 처분을 내렸고, 뒤이어 보스웰 백작이 자기 여동생과 이혼하고 메리 여왕을 '납치'한 뒤 결혼하는 걸 지지한 유일한 고위 귀족이기도 했다.

1567년 5~6월 메리 여왕에 반대하는 귀족들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여왕을 따라 에든버러로 이동했다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북쪽으로 도피해 던버튼 성에서 지지자들을 규합했다. 이후 메리 여왕을 체포한 모레이 백작 제임스 스튜어트와 잠정적으로 화해하고 제임스 6세 섭정단에 가담했지만, 메리 여왕이 갇힌 클레븐 성에 사람을 심어둬서 여왕을 구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1568년 여왕이 탈옥해 잉글랜드로 도피한 후, 제5대 아가일 백작 아치볼드 캠벨과 손잡고 스코틀랜드 북부 전역을 장악해 모레이 백작과 맞섰다.

1569년 5월 14일, 헌틀리 백작은 세인트앤드루스에서 모레이 백작과 협정을 맺었다. 헌틀리 백작은 대표적인 반 메리 여왕파인 제4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와의 갈등을 해소하고, 그와 동맹을 맺고 정부에 대적하던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며, 헌틀리 성에 보관되어 있던 왕실 대포를 넘겨야 했다. 그 대가로, 모레이 백작은 1567년 6월 11일 이후 국왕에게 저지른 모든 범죄를 사면해 주고, 1568년 8월부터 1569년 3월까지 '여왕의 은총을 받는 척하는 부관' 역할을 했던 그의 행위를 용서하는 의회법을 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1569년 7월, 퍼스에 집결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메리를 스코틀랜드 여왕으로 복위하는 것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다. 그 결과는 찬성 9표, 반대 40표였는데, 헌틀리 백작은 찬성표를 던졌다. 1570년 1월 23일 모레이 백작이 암살된 후, 헌틀리 백작은 메리 여왕의 복위를 위해 싸우겠다고 선언한 뒤, 제2대 아란 백작 제임스 해밀턴, 아가일 백작 아치볼드 캠벨, 레싱턴의 윌리엄 메이틀랜드와 손잡고 제4대 레녹스 백작 매튜 스튜어트, 제4대 모튼 백작 제임스 더글러스 등이 주도하는 제임스 1세 정부를 상대로 반기를 들었다. 이리하여 벌어진 내전 끝에, 1573년 2월 23일, 양 진영은 엘리자베스 1세의 중재로 퍼스 평화 협약을 맺었다. 여왕파의 지도자였던 샤텔로 공작과 그의 아들들, 그리고 헌틀리 백작 조지 고든은 제임스 6세를 스코틀랜드 국왕으로 인정하고, 메리 여왕에 대한 지지와 정부에 대한 군사 행동을 중단하기로 약속하는 대가로 사면받았다. 이 조약에 동의하지 않은 메리 여왕 지지자들은 에든버러에서 항전했지만 곧 함락되면서 스코틀랜드 내전은 종식되었다.

그 후 정계에서 은퇴한 그는 1576년 10월 19일 스트라스보기에서 사망했다. 존 녹스의 비서관을 역임한 스코틀랜드 성직자 리처드 배너타인은 그가 축구를 하던 중 식중독으로 인해 뇌졸중으로 사망했다고 밝혔다. 또한 그가 죽은 후 하인 한 명이 갑자기 쓰러지는 것을 시작으로 동료 세 명도 쓰러졌다가 다시 살아났을 때 추위를 호소했으며, 백작의 시신이 방부 처리되어 예배당으로 옮겨진 후 알 수 없는 소리가 종종 나서 사람들을 두렵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가톨릭 신앙을 고수한 그에게 반감을 품은 스코틀랜드 개신교 측이 지어낸 이야기로 간주한다.

3. 가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