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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1-18 20:38:12

조상(학자)

이름 <colbgcolor=#fff,#191919> 조상(曺塽)
본관 창녕 조씨[1]
봉강(鳳岡)
문보(文甫)
출생 1876년(고종 13) 7월 13일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2][3]
사망 1945년 10월 9일
1. 개요2. 가계3. 활동사항4. 학문과 사상5. 저술 및 작품
5.1. 봉강문집
5.1.1. 서문
6. 상훈과 추모
6.1. 묘갈명
7. 후송재
7.1. 후송재 기문7.2. 후송재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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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개항기 고령 출신의 학자. 조상(曺塽)의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문보(文甫), 호는 봉강(鳳岡)이다.
재실(齋室)로는 후송재(後松齋)가 있다. 후송재는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유형자산 제10호로 지정되었으며,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벌지로 10에 위치한다.

2. 가계

호조참판 퇴우당 조계형(退憂堂 曺繼衡)의 18세손, 대구도호부사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의 15세손, 정주목사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의 14세손, 양산군수 설주 조시량(雪州 曺時亮)의 13세손이며 이인좌의 난합천군에서 대거 가담한 조성좌(曺聖佐)의 10세손이다. 조성좌는 반역죄로 1728년 4월 1일 처형 당했으며 조성좌의 아들 형제 조명상(曺明相)[4]과 조명협(曺明莢)[5]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하기 위해 합천군 묘산면에서 달아나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로 은거하였다. 이인좌의 난이 어느정도 평정된 후 고향을 잊지 못해 낙동강을 건너서 지나다가 지금의 고령군 다산면 송곡리에 입향하였다.[6]

겨우 살아남아 대를 이어 나갈 수 있었고 수직(壽職) 장악원정 조계흥(曺啓興)[7]의 7세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조규승(曺奎承), 증조할머니는 오원(吳瑗)의 딸 해주오씨이다. 해주오씨는 효부(孝婦)로 정려(旌閭)를 받고, 복호(復戶)의 혜택을 입었다. 또한 『성주지(星州誌)』에 효행이 수록되었으며, 후산 이도복(厚山 李道復)이 「효부전」을 지었다. 이를 기리기위해 창녕조씨 문중에서 1930년 마을 인근 도로변에 해주오씨 숭효각을 건립했다. 아버지는 조정환(曺珽煥)이며, 어머니는 장무헌(張武憲)의 딸 옥산장씨이다. 부인은 석능악(石能岳)의 딸 충주 석씨나주 임씨이다.

3. 활동사항

조상은 고령군 다산면 송곡촌에서 제자를 양성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10세 때 아버지의 명으로 임재 서찬규(臨齋 徐贊奎)의 문하에서 학문에 대한 뜻을 돈독히 하고 힘써 실천하여 수제자가 되었으며, 스승은 칠조훈(七條訓)인 “입지지대(立志之大), 입심지정(立心之正), 진실심지(眞實心地), 과실필개(過失必改), 절문근사(切問近思), 독서통투(讀書通透). 변화기질(變化氣質)” 등을 써주면서 학문적 성취를 격려하였다.

서찬규가 별세한 후에 전북 부안군 계화면 계화리 계화도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던 조선 최후의 거유(巨儒)라 불린 성리학자인 간재 전우(艮齋 田愚)에게 제자로 받아 줄 것을 청하며 예폐(禮幣)를 올리고 경의를 표하는 집지(執贄)를 청하는 서신을 올려 1917년 답신(答信)을 받고 42세에 간재(艮齋)의 문하생이 되어 성리학의 진원(眞源)을 듣고 경(敬)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義理), 실천(實踐), 극기(克己), 함양(涵養)”에 관한 사조훈(四條訓)을 받아 실천하는데 전력(專力)하였다. 그는 두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의 요지로 삼아서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항일 유학자 시암 이직현(是菴 李直鉉), 농산 장승택(農山 張升澤), 미강 박승동(渼江 朴昇東) 등 선현(先賢)을 따르고 당대의 명유(名儒)이었던 긍재 이병운(兢齋 李柄運), 덕천 성기운(悳泉 成璣運), 석농 오진영(石農 吳震泳), 고암 이종익(苦庵 李鍾翼), 덕암 박순호(德庵 朴純鎬), 운석당 박재근(雲石堂 朴在根)[8], 윤량식(尹亮植) 등과 교유하였다.

4. 학문과 사상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임재 서찬규(臨齋 徐贊奎)와 간재 전우(艮齋 田愚) 문하에서 수학하여, 기호 낙론계열의 학맥을 이었다. 그는 문인들에게 인의예지신의 오상(五常)을 강조하였고, 부모와 임금과 스승은 나를 낳아주고 먹여주고 가르쳐주신 은혜가 똑같이 중요하므로 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자세로 가르쳤다.

봉강은 수도론적(守道論的) 출처의리(出處義理)를 고수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상황에서 자신이 세상으로 나가기보다는 숨어 살면서 의리를 지키고 도(道)를 전수하는 것을 당시의 상황에서 필요한 출처의리로 보아 이러한 자신의 생각을 ‘국화지은일자(菊花之隱逸者)’[9]로 비유하였다. 간재(艮齋)가 계화도로 들어가 은둔하여 옛 것을 지키면서(去之守舊) 출처의리(出處義理)하였던 것과 맥을 같이 하였다. 봉강의 출처의리는 바로 학문연구(學問硏究)와 후진양성(後進養成)으로 이어졌다.

또한 학문은 자기 수양을 통한 참된 인간의 완성 즉 위기지학(爲己之學)을 목표로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사교론(四敎論)’에서 전통적인 유학의 교육내용이었던 시서예락(詩書禮樂)의 공부에 대하여 강조하고 사교를 네 계절에 분속시켜 락(樂)은 화창한 소리이니 봄에 마땅하고 시(詩)는 발양(發揚)하는 것이니 여름에 마땅하고 예(禮)는 닦아서 이루는 방법이니 가을에 마땅하고 서(書)는 거두어 간직하는 것이니 겨울에 마땅하다는 공부방법을 논하였다. 이러한 공부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독서(讀書)와 궁리(窮理), 역행(力行)의 모든 것을 절차탁마(切磋琢磨)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리고 공은 율곡(栗谷)우암(尤庵)의 심성론(心性論)을 수호, 발전시킨 간재(艮齋)의 성리설(性理說)을 대변하여 ‘심즉이심성일물변(心卽理心性一物辨)’이란 글을 통하여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심즉리설(心卽理說)’과 ‘심성일물설(心性一物說)’을 비판하였다. ‘성리도설(性理圖說)’을 통하여 천(天), 성인(聖人), 군자(君子), 소인(小人)으로 권역(圈域)을 구분한 것은 기(氣)의 청탁수박(淸濁粹駁)에 의한 것으로 기질변화(氣質變化)를 통해 소인(小人)은 군자(君子)로 군자는 성인(聖人)으로 다가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변화기질(變化氣質)의 수양론(修養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경천애인설(敬天愛人說)’을 지어 하늘을 높이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유학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서회설(鋤茴說)’#에서 천리(天理)를 보존하고 인욕(人慾)을 제거해야 함을 약초인 방풍(防風)밭의 김매는 것에 비유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물(四勿). 사절(四絶), 구사(九思), 구용(九容)을 제시하였다.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며(非禮勿視), 듣지 말며(非禮勿聽), 말하지 말며(非禮勿言),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유교(儒敎)의 네 가지의 금(禁)하는 가르침.
억측을 갖는 일이 없고(毋意), 기필코 해야 한다는 일이 없으며(毋必), 고집부리는 일도 없고(毋固), 자신만을 내세우려는 일도 없다(毋我).
① 항상 눈에 가림이 없이 밝게 볼 것(視思明)
② 항상 소리를 똑똑하게 들을 것(聽思聰)
③ 항상 온화하여 성낸 빛이 없도록 할 것(色思溫)
④ 항상 외모를 단정히 할 것(貌思恭)
⑤ 항상 믿음이 있는 말만 할 것(言思忠)
⑥ 항상 일을 공경하고 삼갈 것(事思敬)
⑦ 항상 의심쩍은 일은 선각(先覺)에게 물어 알 것(疑思問)
⑧ 항상 분한 일이 있을 때는 사리(事理)를 따져서 참을 것(忿思難)
⑨ 항상 재물(財物)을 얻게 될 때 의(義)와 이(利)를 구분하여 취사(取捨)를 가릴 것(見得思義)
① 걸음걸이는 무겁게 하라는 뜻이다(足容重)
② 손가짐을 공손히 하라(手容恭)
③ 눈가짐은 단정히 하라(目容端)
④ 입은 조용히 가지라(口容止)
⑤ 말소리는 조용히 하라(聲容靜)
⑥ 머리 가짐을 항상 곧게 하라(頭容直)
⑦ 숨쉬기를 정숙히 하라(氣容肅)
⑧ 설 때는 덕스럽게 하라(立容德)
⑨ 얼굴 모습은 장엄하게 하라(色容莊).

‘혈기잠(血氣箴)’에서 모든 재앙(災殃)의 출발은 혈기(血氣)를 조절하지 못함에서 기인(基因)하였다고 보고 혈기를 조절하여 중화(中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학문과 수양의 목표로 삼았다. 봉강(鳳岡)의 예설(禮說)은 기본적으로 예법(禮法)의 기본원칙을 지키면서 인정(人情)을 따른다는 예(禮)의 기본정신에 충실한 입장에 있었다. 봉강 선생의 삶과 학문은 난세에 유학의 도(道)를 수호하고 속세에 전수해 주려는 수도(守道)와 전도(傳道)에 그 중심이 있었다.

5. 저술 및 작품

『심성이기설(心性理氣設)』과 『대학석의(大學釋義)』가 있다. 2012년 증손 조택상(曺澤相)이 『봉강문집(鳳岡文集)』(2책)을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서문은 1967년 7월 권용현(權龍鉉)이 썼다.

5.1. 봉강문집

5.1.1. 서문

내가 보건대 선비가 된 사람들이 총명하고 영리한 재질을 타고나고 풍부한 가세(家勢)를 의뢰하여 침착하게 힘을 써서 그 학업을 성취한 사람은 그 환경이 순조롭고 평탄하나 혹은 타고난 재주가 둔해서 통하기가 어렵고 가세가 빈곤하여 장애가 많으나 고생을 무릅쓰고 열심히 하여 마침내 그 학업을 성취한 사람은 그 환경이 험하고 어려우니 돈독한 의지로 힘을 몇 배로 쓰지 아니하면 불가능하다. 그 환경이 어렵고 평탄함이 있기 때문에 성취하는 바도 얕고 깊고 넓고 좁은 것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성취하면 동일하니 어찌 이로써 저 것은 많다하고 이 것은 적다하리오.
고령(高靈)에 거주하는 조을환(曺乙煥)과 조해수(曺海銖)군이 그들 일족 어른 봉강공(鳳岡公)의 끼친 글을 나에게 보이면서 서문을 요청하거늘 내가 그 책을 살펴보고 그 사실을 상고해 보고는 여러모로 느낌이 있었다. 대개 공께서는 소시에 임재 서선생(臨齋 徐先生)에게 수학하였는데 처음에는 재주가 없어 깨닫기가 어려웠고 또 집이 매우 빈한하여 학자금이 어려웠으나 공께서는 싫어하지도 아니하고 게으르지도 아니하며 괴로움을 참고 견디면서 백 가지 어려움을 배척하고 속세를 벗어나서 혼자 가는 뜻이 여러 해 쌓여 마침내 물이 이르러 배가 뜨게 되는 것을 보듯이 그 중요한 뜻을 얻어듣게 되었으니 함께 배우는 선비들이 앞설 사람이 없었다. 만년(晩年)에는 또 간재 전선생(艮齋 田先生)의 문하에 나아가 졸업하니 지식이 더욱 확실하고 조행이 더욱 돈독하여 평생에 가난을 근심하지 아니하고 학문에 힘쓰며 후생들을 교훈하여 우뚝하게 한 지역의 표본이 되셨다.
아~ 공 께서는 어찌 이르는 바 괴로움을 극복하고 통하였으며 얻기 어려운데서 얻은 것이 아니신가. 그러므로 그 저술(著述)에 나타나는 것이 모두 근본적이여서 지엽(枝葉)적인 것이 없으며 순수하고 진실하여 화려하고 사치한 것이 없으니 그 원인은 모두가 많이 쌓아 스스로 얻은 데서 나온 것이었고 입과 귀에만 좋도록 취한 것이 아니었으니 마치 그 깊고 넓은 지식과 맑고 밝은 문장으로 남을 즐겁게 하고 명예를 취하는 것은 유독 재주가 모자랄 뿐 아니라 또한 달갑게 여기지 아니한 것이었다.
그 이(理)와 그 기(氣)로 대학(大學, 책 이름)의 뜻을 설명하는데 이르러서는 심오한 것을 탐구하여 선현(先賢)의 설(說)을 알맞게 취득하였으니 또 그 스스로 얻은 것을 증험할 수 있다. 대개 수고롭게 통하였기에 차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건너뛰는 폐단이 없어 보는 것이 확실하고 얻는 것이 어려웠기에 넘치는 실수가 없이 지키는 것이 확고하였으니 그 높은 재주와 많은 지식으로도 넓은 도량과 나타나는 문채가 특히 적은 것을 본다면 도리를 아는 사람은 반드시 이로써 무겁고 가벼움을 삼지는 아니할 것이다. 다만 공께서 종신토록 산중에서 표현하신 바 없이 돌아가신 것이 애석하도다.
그 후 수십년까지 끼친 글이 상자 속에 감추어져서 명성과 광채가 침체하게 되었으니 개탄하는 소리가 없지 아니하였다. 지금 수학한 제자들이 한탄하면서 의론하고 합심하여 오래도록 전하고자 하니 장하도다. 어찌 공께서 후세에 전할만한 실상이 있어 마침내 없어지지 아니한 것이 아니리오. 이것이 내가 사양하지 아니하고 말씀한 까닭이다.
화산 권용현(花山 權龍鉉)

6. 상훈과 추모

묘갈명은 송시열의 후손인 덕은 송재성(德殷 宋在晟)이 썼으며, 가장(家狀)은 집안 조카이자, 문인이었던 학산 조을환(學山 曺乙煥)이 썼다. 2012년 입춘에 후학들의 모임인 삼일계(三一契)에서 조상의 학덕을 기리고자 성균관 관장 최근덕이 근찬(謹撰)하고 성균관 부관장겸전례위원장 강동숙이 근서(謹書)한 봉강선생창녕조공송덕비를 후송재 내부에 세웠다.

6.1. 묘갈명

성주읍(星州邑) 남쪽 의봉산(儀鳳山) 아래 송곡마을 뒤 간좌(艮坐)를 지고 곤좌(坤坐)를 향하여 집과 같이 쌓은 봉분은 봉강조공(鳳岡曺公)의 묘소이다.
공의 휘(諱)는 상(塽)이요, 자(字)는 문보(文甫)요, 관향은 창녕(昌寧)이니 시조는 신라 때 창성부원군 휘 계룡(繼龍)이시고 대악서승 휘 겸(謙)에 이르러 비로소 고려에 드러나서 벼슬이 빛나 17대를 연속하여 평장사가 된 자가 8인이요, 소감이 된 자가 9인이나 모름지기 상세하지 아니하다. 조선조에 들어와 호조참판 휘 계형(繼衡)께서는 정국공신으로 창성부원군을 봉하니 시호는 문정공이시고 2대를 전해 휘 몽길(夢吉)께서는 상주목사로 좌승지에 증직되시고 이가 응인(應仁)을 낳으시니 호는 도촌(陶村)으로 한강 정 선생을 섬기시니 유일(遺逸)로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셨고, 오계(梧溪) 휘 정립(挺立)께서는 사인(舍人)으로 백사 이문충공을 따라 노셨고, 설주(雪州) 휘 시량(時亮)께서는 문과 군수시니 그 중세에 현조(顯祖)이시다. 고조 증조 조부 삼대는 가로되 석두(錫斗) 가로되 규승(奎承) 가로되 병극(秉極)이요, 부친의 휘는 정환(珽煥)이요, 외조부는 옥산장무헌(玉山張武憲)이라.
공이 겨우 10세에 어버이 명령으로 임재 서공(臨齋 徐公)에게 수학할 새 재주는 비록 노둔하나 부지런함은 남음이 있으니 임재께서 그 마침내 성취가 있을 것을 알고 가르침을 게을리 하지 아니하며 손수 입지 입심 등 일곱가지 조목 요긴한 말씀을 써서 힘쓰게 하시니 공이 가슴에 새기고 종사하여 스승의 바라는 뜻에 보답하고 임재가 별세한 뒤에는 갈팡질팡하며 우러를 바가 없어 이에 폐백을 잡고 전간재(田艮齋)를 뵙고 극기하고 수양하는 방도를 얻어 듣고는 더욱 향상(向上)하는데 분발하여 오직 안에 착실하기를 힘쓰고 밖에 영달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임천에서 고요히 수양하며 가난함을 편안히 여기고 뜻을 지키며 당시에 여러 명석(名碩)과 교유하면서 선을 살피고 인(仁)을 도우는 지역을 삼고 후생을 인도하며 성실하게 잘 개유하여 한 가닥 미약한 양을 이으니 그 수학하는 자 김재철, 조긍환 등이 삼일계를 설치하고 후송재를 마을 뒤에 건축하여 예절을 익히고 학문을 강론하여 공이 별세한 뒤에도 해마다 서로 모여서 당일 규칙을 이었다. 저술(著述)한 바 유고(遺稿) 6권은 상자에 있는데 그 대학석의(大學釋義)와 성리도(性理圖)와 경천애인도설(敬天愛人圖說) 같은 책이니 다 가히 후인을 열어줄만한 것이다. 실제로 보고 얻은 것이 아니면 어찌 능히 쌓이고 오묘한 것을 드러내고 발명함이 이와 같으리오.
공이 을유년 10월 9일에 별세하니 그 출생한 고종 병자년과 계산하면 수명이 74년이라. 배위 충주석씨 능악(能岳)의 따님은 신사년에 출생하여 병진 7월 29일에 별세하니 노나라 예절(魯禮)을 사용하였다. 5남 2녀를 두셨으니 아들은 용봉, 용종, 용일, 용현, 용탁이요 사위는 전주이희증과 파평윤동보이며 손자 달곤과 영곤은 장남 소생이요, 정곤은 차남 소생이요, 홍곤은 사남 소생이요, 상곤과 기곤은 오남 소생이니 증손과 현손은 번거롭게 기록하지 아니한다.
슬프다. 공이 고가(故家)의 후손으로 일찍부터 어진 스승을 섬겨 학식이 넓고 행실이 돈독하며 한 지방의 사표(師表)가 되었으니 후진 선비들이 보고 느껴 일어나는데 추앙의 올바름을 잃지 아니하여 유풍 여운(遺風餘韻)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아니하니 거룩하도다. 공의 막내 아들 용탁이 그 조카 영곤을 시켜 장차 비석을 세우려고 그 일가 을환(乙煥)과 해수(海銖)가 와서 나에게 비문을 청하면서 이르기를 저희들이 스승을 잃음으로부터 안방의 애통을 이기지 못하고 또 묘소 비석을 세우는데 도우려고 하니 자가 잠긴 것을 발휘하고 깊숙이 있는 것을 천명하기를 원한다 하였다. 내가 비록 글을 하지 못하나 그 성의에 감동하여 차마 끝까지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명(銘)을 한다.

학문은 모름지기 자기를 위함이요
가히 남을 위함이 아닌데
무릇 지금에 사람들은 거짓을 진실로 바꾸도다
아~ 공이시여 무리에서 뛰어나셨네
근본에 돈독하고 실제에 힘써 덕이 고을에 알려졌네
절실하신 군자여 아름다운 이름 없어지지 아니하리
그 대략을 기록하여 끝이 없도록 소상하게 보이노라
덕은 송재성(德殷 宋在晟)

7. 후송재

파일:후송재.png
파일:후송재 상단뷰.png

봉강 조상(鳳岡 曺塽)의 재실인 후송재(後松齋)

조상의 문인이었던 김재철(金在喆), 조긍환(曺兢煥), 이동진(李東鎭) 등의 제자들은 스승의 학은(學恩)에 보답하고 동문간 우의를 돈독히 하고자 '삼일계(三一契)'를 만들고, 1938년 강학소(講學所)인 후송재(後松齋)를 건립하여 매년 모여서 정읍례(庭揖禮)[10]를 행하였다. 삼일계의 서문과 후송재의 기문은 덕천 성기운(悳泉 成璣運)이 지었으며, 후송재명(後松齋銘)은 고암 이종익(苦庵 李鍾翼)이 썼다. 후송재는 2012년 8월 1일 고령군 향토문화유산 유형자산 제10호로 지정되었으며, 경상북도 고령군 다산면 벌지로 10에 위치한다.

건물의 배치는 산록 경사지를 2단으로 닦아 아랫단에 출입문인 평삼문, 윗단에 후송재를 '二'자형에 서북향으로 앉혔다. 후송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평면은 2칸 온돌방에 마루 1칸을 'ㅡ'로 배열하고, 전면 전체로는 퇴를 둔 좌실우당(左室右堂)형이다. 지붕가구는 간략한 3량가로 홑처마 팔작에 한식기와를 이었다. 대청에는 '후송재(後松齋)' 현판과 '후송재명(後松齋銘)', '후송재기(後松齋記)' 기판 2매가 걸려있다.

7.1. 후송재 기문

어느 날 김재철(金在哲), 조긍환(曺兢煥)이 나에게 서신(書信)을 보내어 이르기를 금년 봄에 저희들이 스승을 위해 옛 성산(星山)의 남동쪽 송곡리에 서재(書齋)를 지어 현판을 후송재(後松齋)라 하고 기문(記文)하기를 원한다 하니 그 스승은 곧 나의 동문학(同門學) 친구인 조봉강(曺鳳岡) 이름은 상(塽), 자는 문보(文甫)이다. 의리상 글을 하지 못한다고 사양할 수 없어 이에 말씀하기를 무릇 초목과 화훼(花卉)의 이름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아니나 덕(德)으로 쓴다면 근본(根本)이 굳고 중심이 비어 있는 대나무가 있고 절개(節槪)로 쓴다면 바르고 곧음을 지닌 잣나무가 있고 향기(香氣)로 쓴다면 가을 강에 깨끗한 연(蓮)과 깊은 골짜기에 아름다운 난초(蘭草)와 서리 아래 걸출(傑出)한 국화(菊花)가 있고 수명(壽命)으로 쓴다면 천년의 구기자(枸杞子)가 있는데 어찌하여 유독 소나무(松)를 취하였는가? 이는 거주지(居住地)의 이름을 인하여 추운 겨울에도 시들지 아니하는 뜻을 취한 것이니 또 이치는 하나이라. 소나무의 이치는 대나무(竹)와 잣나무(柏)의 이치이고 대나무와 잣나무의 이치는 연(蓮)과 난초(蘭草)와 국화(菊花)의 이치인데 다만 물(物)의 이치는 편벽(偏僻)하고 막혀서 능히 서로 통하지 못하고 사람은 오행(五行) 즉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의 특수함을 타고 나서 만물(萬物)이 다 나에게 갖추어져 있으므로 하나를 들면 나마지는 가히 같은 종류로 미루어서 연구할 것이라. 슬프다. 절의(絶義)는 있고 학문이 없는 자는 있으나 학문만 있고 절의(絶義)가 없는 자는 학문이 아니다. 이와 같이 천지(天地)가 순전한 음기(陰氣)의 시대를 만나 특수하게 서있는 소나무와 같이 되어야 가히 학문한 사람이 될 것이다. 알 수 없지만 그대들은 과연 능히 이름을 돌아보고 뜻을 생각하여 그 받은 바를 변함없이 하겠는가. 내가 일찍 덕사(德社)에서 봉강(鳳岡)을 한 번 만났는데 봉강의 인품이 봄꽃의 고운 것이 없으니 오래된 소나무의 순박한 기(氣)로 뿌리는 굳고 근원은 깊어서 남이 감동하여 사일지성(事一之誠) 즉 아버지와 임금과 스승을 동일하게 섬기는 정성을 얻게 된 까닭은 비록 벽해(碧海)와 상전(桑田)이 백 번이나 변하는 사이라도 이 후송(後松) 즉 소나무는 추운 뒤에까지 있는 특수함이 있는 일이리오. 그러나 서재(書齋)는 밖에 있는 것이니 물건(物件)이요 학문(學問)은 안에 있는 것이니 이치(理致)라. 물건은 반드시 흥(興)하고 폐(廢)하는 것이 있고 이치는 존재하고 망하는 것이 없으니 다만 이로서 능사(能事)가 되고 스승이 되고 제자가 되었다고 여기지 말고 나아가고 나아가 함께 학문에 힘써 형체(形體)가 없는 의리(義理)를 수립하면 형체가 있는 물건도 길이 힘입어 폐(廢)함이 없으리라. 또 혹시라도 대부송(大夫松)[11]이 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창산(昌山) 성기운(成璣運)

7.2. 후송재 명

나의 친구 조상(曺塽) 문보(文甫)는 일찍부터 임재(臨齋) 서씨(徐氏) 어른 즉 서찬규(徐贊奎) 어른을 섬겨 바른 길은 알았고 뒤에는 우리 간재(艮齋) 전우(田愚) 선생을 스승으로 모셔 성(性) 심(心)의 비결을 묻고 교훈한 제자가 심히 많으니 김재철(金在哲), 조긍환(曺兢煥) 같은 젊은이가 돈을 모아서 계(契)를 만들어 이름을 삼일계(三一契)라 하였다. 여러 해 동안 꾸준히 돈을 불려 원금과 이자가 약간의 금전이 되었다. 성산(星山) 남쪽 거주지인 송곡리(松谷里)에 서재(書齋)를 지어 후송재(後松齋)라고 현판(懸板)하니 대개 겨울이 추운 후에 송백(松柏)을 취한 것이요 또 마을 이름을 인함이라. 김재철(金在哲), 조긍환(曺兢煥) 두 사람이 이미 덕천(德泉) 성기운(成璣運)의 기문(記文)을 얻었고 나에게 와서 상량문(上樑文)을 청하는데 갑자기 부지런한 뜻에 부응(副應)하지 못하였는데 지금은 김(金), 조(曺) 두 사람이 받들지 못하고 또 세상을 떠났으니 이에 슬퍼하며 명(銘)을 지어 그 청하는데 보답하고 문보(文甫)의 상여지통(喪予之痛)[12]을 위로하며 명(銘)을 한다.

천 길의 의봉산(儀鳳山)이여 맑은 기운 높게 쌓았도다
넓게 수용하였으니 아래는 송곡마을 있도다
송곡(松谷)에 사람이 있으니 뜻은 높고 행실은 돈독하도다
지금 것을 단절하고 옛 것을 배워 뛰어나게 저속(低俗)되지 아니하도다
골짜기에 나무가 푸르니 송목(松木)임을 알겠도다
사람과 지역이 서로 걸맞으니 여기를 가려 건축하였네
혹시라도 이어지지 않음이 없으니 떨어진 우리 도(道)가 다시 회복하리라
경산(京山) 이종익(李鍾翼)

[1] 태복경공파 28세손[2] 창녕 조씨 집성촌[3] 4선 국회의원 조일환과 같은 마을이다.[4] 계사(1713)~정축(1757)[5] 무술(1718)~기사(1749)[6] 원래 성주군 벌지면에 속했던 지역이고, 1906년(고종 43) 고령군에 편입했다.[7] 병술(1766)~정사(1857)[8] 조상의 12촌 고종형.[9] 국화는 다른 꽃보다 늦게 피어 서릿발을 잘 견뎌 이기는 것으로, 은자(隱者 : 산야에 묻혀 숨어 사는 사람) 같은 풍격(風格 : 풍채와 품격)이 있음을 이름.[10] 조선후기, 서원이나 서당들의 학교에서 학생들이 모여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인사하고 배운 바를 점검하는 의식.[11]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서 큰비를 만나 다섯 소나무 밑에서 비를 피할 수 있게 되어 벼슬을 내린 소나무를 말한다.[12] 공자(孔子)께서 수제자(首弟子) 안자(顔子)가 별세하니 공자께서 하늘이 나를 잃게 하셨다 하시며 애통(哀痛)한 고사(故事)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