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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03:03:32

제2대 대통령 선거

제3대 부통령 선거에서 넘어옴
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대한민국의 주요 선거·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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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통령 선거 제5대
1960년 3월 15일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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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제6차
1987년 10월 27일
시행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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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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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 선거
파일:이승만 2대 대선.jpg
대통령 당선자 이승만의 선거 포스터
{{{#!wiki style="margin: -7px -12px" 1948년 7월 20일
1대 대선
1952년 8월 5일
2대 대선
3대 부선
1956년 5월 15일
3대 대선
4대 부선
1951년 5월 16일
2대 부선
}}}
투표율 대통령 선거: 88.09% ▼ 10.90%p
부통령 선거: 88.0% ▲ 13.12%p
대통령 선거 결과
후보 [[무소속|
무소속
]]
조봉암
[[자유당(1951년)|
자유당
]]
이승만
득표율
11.35% 74.61%
득표수 797,504 5,238,769
부통령 선거 결과
후보 [[무소속|
무소속
]]
함태영
[[자유당(1951년)|
자유당
]]
이범석
득표율
41.26% 25.45%
득표수 2,943,813 1,815,692
대통령 당선인 부통령 당선인
파일:이승만_흑백 공식사진.jpg
파일:함태영 (1).png
자유당
이승만
무소속
함태영

1. 개요2. 배경3. 후보
3.1. 여권3.2. 야권
4. 과정5. 결과
5.1. 대선 결과5.2. 부선 결과
6. 뒷이야기

[clearfix]

1. 개요

파일:2대이승만.jpg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취임식 및 광복절 기념식 사진
파일:Screenshot_20220225-131556_Chrome.jpg
대통령, 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
취임식 음성
가족이 이 박사에게 표를 드리자 / 해방의 은인 이 박사 차기 대통령으로
우리 민족의 최고 영도자이신 이 박사를 대통령으로 다 같이 투표합시다!

이승만 대통령 당선인의 선전 문구들##

1952년 8월 5일 6.25 전쟁 도중의 선거로 총 4명의 후보가 나왔으며 대한민국 최초의 직선제 대통령 선거이다. 제3대 부통령 선거도 동시에 치러졌다.

2. 배경


파일:나무위키+유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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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문단의 내용에 대한 내용은 대한민국 헌법/역사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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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당시의 헌법 상 대통령은 국회에서 선출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세력이 대거 탈락한 영향으로 국회가 여소야대로 돌아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회 간선제를 통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재선이 여의치 않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이승만 대통령은 대통령 선출방식을 기존의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수정하고자 하였고, 이는 1차 개헌을 통해 실현되었다. 이 과정에서 야당 의원들이 탄 버스를 연행하여 국회의사당에 들어 오지 못하게 한 뒤, 상정된 헌법개정안을 기습 표결한 부산정치파동이 벌어졌다. 발췌 개헌이라고도 불리는 이 헌법 개정을 통해서 대통령 선출 방식이 종래의 국회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뀌어서 본 선거부터 적용되었다.

3. 후보

지금은 공직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는 일반 국민들의 추천장을, 정당 추천 후보는 소속 정당의 공천장을 제출하여 입후보하지만, 제1·2공화국 시기에는 정당 추천 제도가 없어 모든 후보가 일반 국민들의 추천장을 제출하여 개인 자격으로 입후보하였다. 따라서 정당의 후보 지명은 법적 영향력이 없었으며, 상징적인 의미만을 지녔다. 그래서 한 사람이 여러 정당의 지명을 받거나, 소속 정당의 지명을 받지 않은 사람이 입후보하는 일이 가능했다. 물론 아예 당과 협의 없이 출마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3.1. 여권

원내 자유당 내에서 원외 자유당과의 통합을 주장하는 인사들로 이루어진 자유당 합동파[1]는 7월 18일 중앙상무회의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에 만장일치로 지명하였으며, 이갑성 의원을 부통령 후보에 선출하였다.

원외 자유당(舊 통일노농당)은 7월 19일 전당대회에서 만장일치로 이승만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에, 이범석 내무부장관을 부통령 후보에 지명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의 후보 등록을 진행한 것도 원외 자유당 관계자였으나,[2] 이승만은 자신은 자유당의 후보가 아니라 국민의 후보로 입후보한 것이며 따라서 이범석은 자신의 러닝메이트가 아니라고 선언하였다.

조선민주당은 7월 13일 중앙상무집행위원회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에, 이윤영 조선민주당 부당수를 부통령 후보에 지명하였다.

대한여자국민당 대표인 임영신상공부장관과 무소속 함태영 심계원장, 무소속 백성욱 전 내무부장관도 이승만 대통령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며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3.2. 야권

민주국민당은 정식으로 후보를 지명하지 않았으나, 조병옥 민주국민당 사무총장이 사실상 당의 후보로 부통령 선거에 뛰어들었다. 또한 조병옥은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이시영 전 부통령과 선거 연대를 결성하였다. 따라서 이시영 대통령 후보와 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사실상 러닝메이트 체제로 선거를 치렀다.

그 외에 무소속 조봉암 민의원부의장과 무소속 신흥우주미대사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며,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 위원장인 전진한 의원, 자유당 합동파 소속 정기원 의원[3]이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4. 과정

파일:1952년 8월 병풍 투표소.png
피란길에 천막과 병풍을 둘러 마련된 임시 투표장에서 유권자가 투표하고 있다.

전시임에도 당시 한국 인구 2천만 명 중 유권자가 8백 20만 명인데, 7백 20만 명이 참여(88.09%)한 선거로써, 역대 세번째로 높은 선거 참여율을 보여주고 있다.[4]

기호 2번 이승만 후보가 다른 후보들을 큰 표차로 앞서고 당선되었다. 부산정치파동을 생각하면 이해가 안 갈 수 있겠지만 사실 전시의 경우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집권 여당을 잘 바꾸지 않는 성향이 있다. 이를테면 미국우드로 윌슨(제1차 세계 대전)과 프랭클린 D. 루스벨트(제2차 세계 대전)이 있는데, 이승만의 경우도 일단 이것에 해당된다. 이른바 '전쟁 중에는 장수를 교체하지 않는다.'라는 논리가 통한 셈이다.[5]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이범석 초대 총리가 자유당 소속으로 부통령 후보에 출마하여 당선이 유력시되었는데, 이후 이승만과의 사이가 틀어져 이승만 쪽에서 무소속 함태영 후보를 적극 지원하여 함태영이 이범석을 꺾고 당선되었다. 이승만 정권 때 치러진 선거는 정부가 경찰력을 동원하여 선거에 깊이 개입하는게 일상이었는데 이범석에 대한 낙선 시도도 여기에 해당한다.

5. 결과

5.1. 대선 결과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선거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colcolor=#fff> 1 조봉암(曺奉岩) 797,504 2위


[[무소속(정치)|
무소속
]]
11.35% 낙선
2 이승만(李承晩) 5,238,769 1위


[[자유당(1951년)|
파일:자유당_투명.png
]]
74.61% 당선
3 이시영(李始榮) 764,715 3위


[[무소속(정치)|
무소속
]]
10.89% 낙선
4 신흥우(申興雨) 219,696 4위


[[무소속(정치)|
무소속
]]
3.12% 낙선
선거인 수 8,259,428 투표율
88.09%
투표 수 7,275,883
무효표 수 255,199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파일:2대 대선.png
지역 <colbgcolor=#254170><colcolor=#fff> 자유당
이승만
무소속
조봉암
무소속
이시영
전국 5,238,769
(74.61%)
797,504
(11.35%)
764,715
(10.89%)
서울 205,300
(82.2%)
25,631
(10.3%)
14,883
(6.0%)
경기 657,174
(87.7%)
44,967
(6.0%)
34,704
(4.6%)
강원 366,583
(92.4%)
10,516
(2.7%)
13,378
(3.4%)
충남 636,061
(82.4%)
56,590
(7.3%)
58,754
(7.6%)
충북 386,665
(86.7%)
25,875
(5.8%)
23,006
(5.2%)
전남 823,587
(73.6%)
99,885
(8.9%)
165,245
(14.8%)
전북 468,220
(65.9%)
109,490
(15.4%)
96,271
(13.6%)
경남 693,523
(55.4%)
288,654
(23.0%)
211,544
(16.9%)
경북 921,988
(75.0%)
129,791
(10.6%)
140,271
(11.4%)
제주 79,668
(83.8%)
6,105
(6.4%)
6,659
(7.0%)

이로써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재선에 성공하며 대한민국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5.2. 부선 결과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 선거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colcolor=#fff> 1 이윤영(李允榮) 458,583 5위

[[조선민주당|
조선민주당
]]
6.42% 낙선
2 함태영(咸台永) 2,943,813 1위


[[무소속(정치)|
무소속
]]
41.26% 당선
3 이갑성(李甲成) 500,972 4위


[[자유당(1951년)|
파일:자유당_투명.png
]]
7.02% 낙선
4 조병옥(趙炳玉) 575,260 3위


8.06% 낙선
5 임영신(任永信) 190,211 7위


[[대한여자국민당|
파일:대한여자국민당.png
]]
2.66% 낙선
6 백성욱(白性郁) 181,388 8위


[[무소속(정치)|
무소속
]]
2.54% 낙선
7 정기원(鄭基元) 164,907 9위


[[무소속(정치)|
무소속
]]
2.31% 낙선
8 전진한(錢鎭漢) 302,471 6위

[[대한노동총연맹|
대한노동총연맹
]]
4.24% 낙선
9 이범석(李範奭) 1,815,692 2위


[[자유당(1951년)|
파일:자유당_투명.png
]]
25.45% 낙선
선거인 수 8,259,428 투표율
88.0%
투표 수
무효표 수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지역 자유당
이범석
무소속
함태영
전국 1,815,692
(25.45%)
2,943,813
(41.26%)
서울 117,326
(46.2%)
70,206
(27.6%)
경기 252,090
(33.1%)
347,799
(45.6%)
강원 129,704
(32.3%)
223,534
(55.6%)
충남 452,209
(57.6%)
118,291
(15.1%)
충북 130,843
(28.9%)
216,233
(47.8%)
전남 59,318
(5.2%)
729,541
(64.2%)
전북 235,637
(32.5%)
190,246
(26.3%)
경남 306,982
(24.1%)
296,766
(23.3%)
경북 97,256
(7.8%)
<colbgcolor=#808080> 716,794
(57.4%)
제주 34,327
(35.9%)
34,413
(36.0%)
파일:제3대 부통령 선거 (1952).png

6. 뒷이야기

북한과 전쟁의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은 첫 직접민주주의 직선제 투표였다. 선거를 제대로 치르기도 전에 납북된 정치인, 공무원이 어마어마하게 많아 민심을 반영하기 어려웠던 것.

이 선거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충청북도 옥천군충청남도 금산군은 70년 동안 역대 대선 적중률 100%를 찍게되었다.[6]

야당에서는 과정을 문제삼지만, 야당의 의견이었던 국무원불신임제도도 포함되었다. 그리고 부산정치파동과 1차 개헌 기습 통과로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을 중심으로 남부 지역의 대도시에서 이승만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부산, 마산, 광주, 대구, 여수 등지에서 조봉암과 이시영의 득표 합계가 이승만의 득표를 넘었고, 부산 일부 지역에서는 조봉암이, 광주에서는 이시영이 이승만을 이겼다.(!)[7] 경남 지역 전반적으로 이승만의 득표는 전국 평균에 한참 못 미치는 55% 정도였다.

선거의 결과를 보면 정치파동이 일어난 부산에서 멀어질수록 이승만의 득표율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다. 경남 지역에서는 이승만의 득표율이 간신히 50%를 넘었고, 계엄령이 선포되었거나(전북, 전남) 경남과 인접한(경북) 지역에서는 65~75% 정도였다. 부산에서 먼 서울, 경기, 강원, 충북, 충남, 제주에서는 압승(82~92%)을 거뒀다. 당시엔 부산이 임시수도였으니 여촌야도부산에서 일어난 것이다.

불과 2년 전 전쟁 발발 시 서울 지역의 이승만 득표율이 의외로 높은 점은 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지던 중부지방과 남부지방의 성향 차이가 주 요인이다. 이 선거에서 2위였던 조봉암은 진보 성향이 강했는데, 당시 서울은 이촌향도 현상이 일어나기 전이었기 때문에 보수적 성향이 강했고 따라서 이승만을 찍는 결과가 나왔다는 의견도 있다.[8] 3위였던 이시영 후보 역시 딱히 영향력이 없었다고 한다.


[1] 흔히 삼우장파라고 불린다.[2] 다시 말하지만 정당 공천제가 법적으로 인정받기 전이었기 때문에 원외 자유당이 일반 국민 추천서를 확보한 뒤, 이후 이승만 대통령 본인의 서명을 받아 선관위에 접수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몇 번이나 "나는 출마 의사가 없다"며 수락서를 보내지 않다가 수차례 국민들의 출마 요청이 쇄도하자 그제서야 수락서를 보내는 눈 가리고 아웅 식 연극을 하기도 했다.[3] 전혀 유력 정치인이 아닌 정기원은 그야말로 뜬금없이 출마했는데, 후보 등록일 날 그가 깜짝 입후보하자 의아해한 기자들이 출마 계기를 묻자 "친구가 나가보라 해서 나왔다"고 답했다고 한다.[4] 역대 최고의 참여율은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의 94.38%, 두번째는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의 89.15%이다.[5] 다만 윌슨이 재선될 당시 미국은 아직 참전하지 않은 상태였다.[6] 제주특별자치도는 이때부터 19대까지 100%의 적중을 보였으나 20대 대선에서 그 기록이 깨지게 되었다.[7] 57표차로 당시 선거의 유일한 격전지였다.[8] 실제로 다음 선거에서도 조봉암으로 가는 표보다 신익희 추모표의 비율이 훨씬 높았던 곳이 서울특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