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제니 린드 Jenny Lind | |
출생 | 1820년 10월 6일 |
스웨덴 스톡홀름 | |
사망 | 1887년 11월 2일 (향년 67세) |
영국 헤리퍼드셔 | |
국적 | [[스웨덴|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오페라 가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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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웨덴의 소프라노. 본명은 요한나 마리아 린드(Johanna Maria Lind).스웨덴의 나이팅게일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2. 생애
사생아 출신으로 7살때부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1838년 스웨덴에서 열린 '마탄의 사수' 공연 이후 유럽에서 이름을 날렸다.한때 성대 질환을 앓았지만 스페인 출신 성악가 마누엘 가르시아의 도움으로 목소리를 구했다.
1840년대에는 스웨덴과 북유럽에서 수많은 오페라 공연을 맡았으며 펠릭스 멘델스존의 제자 겸 스웨덴 왕립 음악원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1844년 12월에는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에서 열린 오페라 '노르마'의 주역을 맡았다. 영국 런던에서 갈채를 받았던 2차례의 시즌 공연[1]을 끝으로 그녀는 29세에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를 선언한다.
이후 미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으며 93차례의 대규모 연주회에 출연하고 이후엔 자신이 직접 기획한 순회 공연을 진행했으며 역시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2] 덕분에 린드는 35만 달러 이상의 수익을 올렸는데 대부분을 자선 사업을 위한 자금, 특히 조국 스웨덴의 자유 학교 설립을 위한 기금으로 기부했다.[3][4]
이후 그곳에서 결혼한 독일 출신 음악가 오토 골트슈미트와 함께 유럽으로 돌아와서 남은 여생의 대부분을 자선 사업을 하며 살았다. 무료로 학생들에게 음악레슨을 해 주기도 했으며 수익금을 잘 굴려 정기적으로 기부했다. 또 병세가 악화되기 전, 친분이 있던 영국 여왕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잠시 영국 런던 왕립음악대학에서 보컬트레이닝법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기도 했다.
3. 기타
- 안데르센이 그녀의 노래를 듣고 사랑에 빠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린드는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은 편이 아니었던 그에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자신의 공연에 찾아와 응원해 준 쇼팽을 짝사랑하고 있었다. 안데르센의 동화들 중 하나인 나이팅게일이 린드를 짝사랑하는 마음을 담아 쓴 것이라고 한다.
- 비정규직 교사인 그녀의 어머니가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친부로부터 양육비를 받지 않은 까닭에,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나가 있는 동안 점심도 굶고 노래를 부르며 외로운 시간을 보냈는데, 왕립음악원과 발레단에서 활동하던 인근 주민이 아이의 목소리가 빼어남에 감동받은 나머지 어머니를 설득해 음악원의 장학생으로 보내 음악이론과 성악을 배울 수 있었다고. 이 발레리나는 평소 재능기부를 하던 사람이었으며 그래서 린드 또한 자신의 은인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성인이 되어 가장 먼저 만든 소원목록이 고향의 가난한 아이들이 학비 걱정 없이 다닐 수 있는 학교 설립이었으며 바넘과 계약한 이유 중 하나도 이 학교 설립과 이후 운영 자금 때문이었다.
- 쇼팽의 마지막 뮤즈로, 선정 기준은 쇼팽으로부터 노래 편곡을 허락받았는지의 여부다. 서로의 팬인 것으로 유명했다. 쇼팽의 마지막 후원자였던 제인 스털링이 직접 편곡을 허락받은 폴란드의 성악가 델피나 포토츠카, 수양딸처럼 보살피고 가르친 폴린 비아르도, 그리고 제니 린드만큼은 신뢰하여 중태에 빠진 쇼팽과 단 둘이 작별인사를 할 수 있게 했으며, 이들이 쇼팽에게 마지막으로 노래를 불러줄 수 있도록 병실에 피아노를 들였다고 한다. 린드의 경우 공연 프로모터로부터 전염병 감염 위험이 있다며 파리 방문을 만류하는 편지를 받았음에도 일정을 바꿔 2주 간의 휴가를 내 임종 전의 쇼팽을 만났다. 그리고 쇼팽으로부터 병이 나으면 새로운 가곡을 작곡 받거나 좋아하는 쇼팽 피아노 소품에 가사를 붙이고 편곡해 자신의 다음 투어에 올릴 수 있도록 제안을 받았지만 그가 39세로 상태가 악화돼 사망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쇼팽 사후 둘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상드와의 결별 원인을 두고 갑론을박하는 세간의 루머가 거세질 것을 우려한 남편 오토는 아내가 쇼팽에게 보낸 팬레터의 답장을 입수하거나 그로부터 받은 편지, 당시의 일기 등을 폐기했기에, 두 사람이 어떤 곡을 몇 곡이나 선정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는다. [5]
- 창법은 벨팅과 클라이막스에서의 루바토 바이브레이션을 거의 혹은 전혀 쓰지 않으며 토크 부분에서도 강력한 스타카토로 어필하는 일 없이 새의 지저귐처럼 청량하거나 허공을 가르는 듯 길게 여운을 남기는 고음을 추구했다. 당시에도 인기 있던 여느 벨칸토 창법과도 구분되는 보이스톤으로, 나이팅게일이라는 별명은 여기서 유래했으며 성대결절을 극복한 후에는 더욱 유니크한 발성을 할 수 있었다.
[1] 당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을 감동시켜 그녀가 영국으로 이민을 오도록 온갖 수를 쓰게 만들기도 했다.[2] 당시 관람객으로 극장이 가득 차는 바람에 반주자가 사람들 머리 위를 밟고 무대로 올라가야 했을 정도였다고...[3] 이때 제니 린드와 계약했던 흥행업자가 바로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으로 영화 <위대한 쇼맨>의 주인공이기도 한 그 사람이었다. 다만 린드는 바넘이 너무 돈을 밝힌다고 나중에는 그와 결별했다. 계약 조건으로 그에게 개런티를 크게 불렀지만, 많은 공연횟수로 수익을 얻는 것에 동의한 것이지 티켓 가격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올려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린드의 미국활동은 유럽 본토보다 상대적으로 공연을 접할 기회가 적어 문화생활이 어려웠던 유럽 이민자들과 귀족들에게 좋은 음악을 선보이기 위해서라는 이유도 있었다. 따라서 당연하지만 위대한 쇼맨에서 바넘과 썸을 타거나 구애를 거절당해 계약을 파기한 린드 관련 이야기는 거의 대부분이 사실이 아니다. 대신 백업보컬도 없이 성악 리사이틀로 무대를 장악할 수 있다고 그와 내기해서 이긴 설정은 일부 발췌되어 들어있다.[4] 아이러니한 건 바넘도 린드 못잖게 기부도 많이 했고 비영리병원이나 학교 건립에도 돈을 많이 쓴 사람이었다는 점이다.[5] 또 아이러니한 건 루머를 차단하려던 오토의 행위로 인해 기록말살 뿐만이 아니라 둘의 결백을 증명할 길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털링의 기록에 의존해 결백을 간접적으로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런 루머 때문에 창작물에서 바넘과의 억지 러브스토리 설정이 들어갔으며 당연히 상속자격을 가진 린드의 후손들은 매우 분노했다. 린드의 후손들은 오래도록 쇼팽의 팬들 못지 않게 다양한 경로로 루머들을 부정해 왔기에 당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