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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37:17

제국(Warhammer)/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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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착과 첫 번째 천년기
1.1. 지그마 헬든해머의 등장1.2. 제국의 건국1.3. 제국의 확장과 전성기
2. 두 번째 천년기: 제국의 붕괴
2.1. 스케이븐 전쟁2.2. 세 황제 시기
2.2.1. 십자군 원정2.2.2. 모드하임의 파괴
3. 세 번째 천년기: 뱀파이어 전쟁
3.1. 카오스와의 대전쟁3.2. 라이클란드 황제의 세습화

1. 정착과 첫 번째 천년기

올드 월드의 인간들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드워프 역사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1,500년 전 '세상의 끝(World Edge)' 산맥을 넘어 동쪽에서 인간 부족들이 올드 월드로 건너왔다고 한다. 지금의 제국 지방으로 인간 부족들이 이주하기 300년 전에 이미 동쪽 대륙에서는 천룡황제가 동쪽의 인간 국가들을 통합, 캐세이(Cathay)[1]를 건국하고 오거들과 카오스 세력들을 몰아냈으며 지그마가 탄생하기 2천 년 전에 이미 사우스랜드에 네헤카라 왕국이 건국되었다가[2] 뱀파이어들의 준동으로 망하고 툼 킹으로 다시 부활, 운베로겐 부족이 정착했을 당시 이미 도시국가들을 건국한 아라비 세력을 괴롭히고 있었다. 즉 제국의 건국은 다른 인간 문명들보다 상당히 늦었다.

그 뒤 드워프엘프가 올드 월드의 패권을 잡았던 고대 시기에도 인간은 석기시대 수준의 부족 생활에 머물러 있었다. 드워프와 엘프가 '수염 전쟁'을 벌이고 서로 사이 좋게 공멸해버린 뒤[3], 그린스킨들과 스케이븐들이 올드 월드의 패권을 잡게 된다. 이 때 인간 부족들은 서로 싸우거나 오크들을 피해 도망다니는 생활을 하며 암울하게 지내고 있었다. 이 때 운베로겐(Unbergens) 부족이 오늘날의 알트도르프 지방에 벽으로 둘러싸인 마을을 건설하고 늑대의 신 울릭을 숭배하는 튜토겐(Teutogens) 부족이 오늘날의 미덴하임에, 틸레아 부족[4]의 한 일파가 훗날 눌른이라고 불리게 될 엘프 유적지에 정착하게 되면서 제국의 시초를 다지게 된다.

1.1. 지그마 헬든해머의 등장

첫 번째 천년기의 말기 때, 오크들이 대공세를 벌이면서 인간 부족들의 운명이 경각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운베로겐 부족에서 지그마 운베로겐이 태어나게 되었으며 지그마는 어린 나이에 강력한 전사로 인정받으며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그리고 오크들에게 공격받던 드워프들을 도와주고는 드워프 왕 쿠르간 아이언비어드를 구출[5], 그에게서 지그마의 상징과도 같은 무기인 워해머 갈 마라즈를 받게 된다[6]. 그 뒤 인간 부족들은 제철 기술 등 드워프들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였고 지그마는 운베로겐 부족을 이끌고 다른 인간 부족들을 회유, 협박, 뇌물, 때로는 무력을 이용하여 합병하여 제국의 전신을 세우게 된다[7]. 이 때 미덴란트 지방에 있던 튜토겐 부족의 족장 아르투어가 지그마에게 정면으로 대항하였으나 단신으로 튜토겐 부족의 마을에 잠입한 지그마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렇게 지그마의 무력을 본 튜토겐 부족도 결국 지그마의 세력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제국이 건국되기 1년 전, 오크들이 지금의 무트랜드 부근의 인간 거주지들을 공격해 가축을 약탈하고 가족들을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지그마는 전 부족들을 모아서 쿠르간 왕이 이끄는 드워프들과 연합, 블랙 파이어 패스에서 대결전을 벌여 오크 워로드 우굴룩 블라드팽(Urgluk Bloodfang)을 사투 끝에 처단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다. 좀 더 정확한 내용은 본 항목 참조.

1.2. 제국의 건국

블랙 파이어 패스 전투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인간 부족장들은 하나의 통합된 인간 국가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에 동의하고 이에 울릭교 대사제가 드워프가 선물로 준 왕관을 지그마에게 씌어줌으로서 제국이 건국되며 이 때를 제국력 1년으로 칭하게 된다. 황제가 된 지그마는 말 안 듣는 부족들을 쓸어버리기보다는 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부족장들을 12명의 선제후로 봉하여 혹시나 모를 불만을 잠재우게 한다. 이 때 드워프 룬스미스 미친 알라릭이 이 12명의 선제후를 위해 룬 문자를 새긴 마법검 룬팽(Runefang)을 만들어 선물해준다.[8]

하지만 여전히 제국은 건국 초기부터 순탄하지 않았는데, 제국력 9년에 노스카의 코멕 블러드엑스가 이끄는 대침공을 겪었고, 제국력 14년에 최초의 리치 나가쉬의 언데드 사태를 막아야 했고, 그 뒤에 최초의 에버초즌 모카르의 카오스 대전쟁을 치렀다.

그런 위기를 넘기면서, 지그마는 훌륭하게 제국을 다스려 나갔으며 알트도르프와 미덴하임, 그리고 알트도르프-눌른-탈라벡하임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건설하여 교통을 원활하게 하여 제국의 경제를 부흥시켰다. 이러한 번영과 평화 덕택에 제국은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스티를란트와 아페를란트, 비센란트와 탈라벡란트의 미개척지들이 개간되고 많은 수의 마을과 도시들이 세워지게 된다. 이렇게 50년간 제국을 통치한 뒤 지그마는 갑자기 퇴위를 선언했다. 이때 당황한 제후들과 신하들이 만류했으나 지그마는 자신은 할 일을 다하였다는 말과 함께 퇴위하고는 동쪽으로 사라졌으며 후에 인간 신(Mangod)으로 제국 전역에서 숭배받게 된다.

1.3. 제국의 확장과 전성기

지그마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9] 자식도 남기지 않았기에[10] 후계자가 없던 터라 모인 제후들이 황제 자리를 두고 서로 자기가 하겠다고 다투고 언쟁을 벌여 급기야 분위기가 험악해져 내전의 분위기가 돌 정도까지 되었다. 그러자 당대 슈티를란트 선제후의 측근인 라야의 여사제의 제안으로 12명의 선제후들과[11] 울릭교의 대사제가 모여 선거로 황제를 선출하기로 하는데[12] 선제후만이 황제에 즉위할 수 있으며 새로 황제가 즉위하면 수도를 자신의 주도로 정할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그래서 선제후들과 사제가 알트도르프의 대회의장에 모여 3일간의 선거를 했는데[13] 이때 4대 황제로 비센란트의 선제후 풀크를 선출한다.[14]

이 시기에 요한 헬스트룸이라는 탁발 수도승이 만든 지그마 교단이 등장하여[15] 제국 전역에 지그마 신앙을 전파하고 특히 라이클란트와 스티를란드에서 크게 위세를 떨치게 된다. 풀크 황제는 수도를 눌른으로 옮기고 그곳에서 머물렀으며 이후 눌른은 몇 대 동안 후대 황제들의 머무는 곳이 된다. 또한 이 시기에 황제들과 선제후들이 경쟁적으로 영토 확장을 시작하여 오스틀란드와 탈라벡란드는 후에 키슬레프라고 불리게 될 북쪽 지방을 차지하고, 스티를란드와 아페를란트는 '세상의 끝' 산맥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산맥의 드워프들과 무역 관계를 트게 된다.

펄크 이후 제국력 479년, 황제에 즉위한 아페를란트의 선제후 정복자 지기스문트는 라이클란트의 알트도르프로 다시 수도를 옮기고 알트도르프를 재개발하는 한편 베스터란트를 복속시키고 남부의 변경후맹(Border Princes)과 서부의 브레토니아를 정벌하여 리히텐베르크 주를 만드는 등 영토를 넓혔다. 이때까지는 제국의 전성기였다. 지기스문트 황제 사후 그의 아들 지크프리트가 황제에 선출되어 지크프리트 1세(Siegfried I)로 즉위했는데 지크프리트 1세도 아버지처럼 명군으로 제국을 더욱 발전시켰고 이때는 제국의 국력이 그야말로 절정에 달했다. 얼마나 강성했는지 올드 월드그 어떤 세력도 제국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아예 제국이 올드 월드 전체를 정복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다만 드락발트, 미덴란트, 베스터란트의 선제후들이 제국 서북부에 있는 우드 엘프들의 숲인 라우렐로른[16]을 탐내서 공격하다가 크게 깨지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2. 두 번째 천년기: 제국의 붕괴

두 번째 천년기가 시작되면서 제국에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드락발트 선제후가 황제로 선출된 후 드락발트가 우드 엘프의 공격과 각종 재해로 인해 약화되자 황제가 제국보단 자신의 영토에만 신경쓰기 시작하면서[17] 제국의 통합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 그 뒤에 연이어 집권한 드락발트 출신 황제들도 제국 전체의 이익보다는 본인의 출신지인 드락발트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고 황제의 궁정에 퇴폐와 쾌락이 만연하면서 강건한 정신도 약화되었다[18]. 그러던 중 제국력 11세기에 등장한 암군 루트비히 2세의 치세에 두 가지의 사건이 발발한다.

루트비히 2세(Ludwig II), 일명 '뚱뚱한 루트비히'는 별명에서 알수 있다시피 그로테스크할 정도로 뚱뚱한 몸과 왕성한 식욕으로 유명한 황제였는데 대식가이며 입맛도 까다로워서 자신의 입맛을 충족시키지 못한 요리사를 고문하고 처형하는 취미를 가진 암군이었다. 그는 또한 자신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준[19] 하플링 요리사에 대한 감사의 의미로 하플링들의 거주지인 무트랜드를 아페를란트와 스티를란트로부터 독립시켜 살던 주민들까지 다른 지역으로 강제로 이주시켜 자치구로 만들어주었으며 한 술 더 떠서 하플링 대장로에게 황제 선출권까지 주었다. 이에 스티를란트와 아페를란트의 선제후는 노발대발하여 반대했으나 루트비히는 가볍게 씹어버리고 자신의 뜻을 관철하였다.[20] 때마침 지그마 교단이 루트비히 2세한테 접근하여 황제에게 크나큰 연회와 정부들을 연달아서 제공하여[21] 황제에게 호감을 사 결국 지그마 교단이 황제를 쥐고 뒤흔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결국 지그마 교단이 알트도르프에 화려한 주방과 각종 먹거리로 가득 찬 궁전을 세워 황제에게 바치고 그 결과로 황제 선출권을 따내오게 된다. 이렇게 개인적인 욕망으로 제국을 혼란스럽게 한 루트비히 2세는 너무나 살이 찐 나머지 자신의 목살에 질식하여 죽고 말았다...

드락발트 출신의 황제들이 집권하는 동안 매우 미화된 초상화들과 형식에 집착한 음악 등 퇴폐적인 예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했으며 귀족들 또한 예술가들을 후원하거나 염료 무역에 손을 대 가족 무덤이나 초상화를 호화롭게 장식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러한 상류층의 사치와는 달리 일반 백성들은 지그마 교단의 종교적 활동에 심취해갔으며 이에 따라 지그마를 신격화하는 교단의 일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제국력 1053년엔 마지막 드락발트 출신 황제인 보리스 골드게더(Boris Goldgather), 속칭 무능한 보리스가 즉위하였다. 별명처럼 보리스는 돈만 밝히는 무능한 황제였는데 이처럼 무능한 자가 황제로 뽑힐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선제후들을 돈으로 매수했기 때문. 게다가 보리스 역시 루트비히에게 지지않는 암군으로 그의 치세 중 거의 모든 선제후들과 귀족들이 보리스에게 뇌물을 주고 더 높은 칭호와 이권을 대가로 받아갔으며 황제에게 뇌물을 받은 선제후들과 귀족들이 평민들에게 자유도시들을 억압해도 방관하기만 했다. 심지어 보리스는 선대 황제들의 능묘마저 돈을 받고 평민들에게 팔기까지 하는 행태를 보였다.

2.1. 스케이븐 전쟁

제국력 1111년에 동쪽에서 흑사병이 전파되어 탈라벡란트와 오스틀란드를 감염시키고 키슬레프 지방까지 도달하였다. 사람들로 붐비는 마을들과 도시들은 흑사병이 감염되기 딱 좋은 환경이었고[22] 당연히 질병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에 따라 제국에선 수만 명이 흑사병으로 사망했고[23] 공포심도 순식간에 퍼져 여행자들은 감염자로 오해받아 공격당하고 사제들과 빈민들이 교회에서 기도를 올리다 죽어가는 동안 귀족들과 부유한 평민들은 도시를 떠나 시골로 도망가는 등 무정부상태가 확산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보리스 황제는 해결은 커녕 수도인 카로부르크에서 멀리 떨어진 별궁에서 아름다운 시녀들과 자신들의 측근들만 데리고 연회나 벌이면서 운둔하고 있어 제국민들의 증오를 받았다.# 추가로 실질적으로 지방군 역할을 하던 선제후의 사병대에게 세금을 물리겠다고 선언하여 선제후들은 하는 수 없이 사병대를 해산하는 수 밖에 없었고 그 결과 수많은 군인들과 군인 가족들, 그리고 군대를 수행하며 서비스를 하던 상인들이 졸지에 실업자가 되어 거리로 밀려나 혼란이 가중되고 국방력이 약화되었다.[24] 오직 미덴란트와 탈라벡란트 만이 황제와의 전면전을 각오하고 군 인두세 납부와 군 해산을 모두 거부한 채 사병대를 유지한다. 1115년에는 더욱 치명적인 흑사병이 발병, 퍼져나갔고 여기에 별궁에 피신하여 연회를 벌이고 있던 황제와 같이 있던 대부분의 선제후들과 그들의 가족들마저 모두 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25] 그리고 황제와 선제후들의 죽음과 함께 스케이븐의 군대 수천이 등장했고, 제국 영토를 휩쓸기 시작했다. 스케이븐들간의 내전이 끝난 후 스케이븐의 최고회의인 13인 평의회가 페스틸런스 클랜이 개발한 새로운 질병을 시험해보기 위해 제국 전역에 역병을 살포하였고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제국 침공을 결정했던 것이다.[26]

결국 제국은 수많은 마을과 도시들이 스케이븐의 파도에 삼켜졌으며 제국군 또한 보리스의 막무가내 '개혁'과 스케이븐이 퍼뜨린 역병으로 크게 약화된터라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무너져내렸다. 몇몇 대도시들 -알트도르프, 눌른, 모드하임[27], 미덴하임, 아페르하임[28]- 만이 버티고 있을 뿐 스케이븐 군대는 수천명을 학살하고 질병으로 허약해진 제국 북부를 유린하였다. 또한 스케이븐들은 제국의 작물과 가축들을 철저하게 약탈하며 포로로 잡은 제국의 인간들 수천명을 노예로 끌고가 스케이븐들이 먹을 식량을 재배하게 하거나 지하광산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을 시켰다. 다만 실바니아에선 철수했는데, 질병으로 죽은 시체들이 좀비와 구울이 돼서 스케이븐들을 공격했기 때문이다.[29]

제국의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는데 성공한 스케이븐들은 저항하며 남아있는 대도시들에 공격을 집중시켰고 이에 눌른과 모드하임마저 함락당하면서 제국은 금방이라도 멸망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덴하임과 미덴란트의 선제후인 만드레트 폰 젤트가 1118년 미덴하임 수성전에서 스케이븐 군대를 격퇴하면서 제국에는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30] 게다가 스케이븐들이 만든 질병이 변이를 일으켜 오히려 스케이븐에게도 피해가 미치기 시작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만드레트는 제국의 백성들과 잔여 세력을 모아 제국군을 일으켜 반격을 개시했고 스스로가 만든 질병에 걸려 무력화된[31] 스케이븐들을 하나씩 격파하기 시작했다. 스케이븐들이 최후의 반격을 펼친 '비명지르는 언덕에서의 전투(Battle of the Howling Hills)'에서는 스케이븐들은 만드레트를 해치기 위한 계책을 짰음에도 불구하고 대패를 당하고 만다.[32] 그리고 1124년에 아페르하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만드레트는 벌판을 스케이븐의 시체로 메우는 대승을 거두고 전쟁에서 승리한다. 이 승리로 만드레트스케이븐 살해자(Skavenslayer)라는 칭호를 받고 생존한 선제후들의 추대로 황제에 즉위한다.

스케이븐들은 제국과 계속해서 싸우기엔 너무 피로한데다가 제국군과의 전투와 질병에 대한 피해도 컸다. 이에 13인 평의회는 일단 많은 수의 인간 노예들을 잡은 것에 만족하기로 하고 복수전은 더 나은 질병을 개발한 다음으로 미루기로 합의한다.[33] 그렇지만 만드레트는 도시의 하수구를 순찰하며 스케이븐들을 색출하여 처단하는 부대인 하수구 파수꾼(Sewer Watch)을 창설하고 지속적으로 스케이븐에 대해 경계하고 소탕해 나갔으며, 스케이븐들의 지하 제국에서는 인간 노예들의 반란도 일어나 이를 진압하기 위해 흑사병을 쓰다가 스케이븐들까지도 몰살당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황제로 즉위한 만드레트는 흑사병과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무려 1/10로 줄어든[34][35] 제국을 재건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일단 그는 이러한 사태에 무능한 태도를 보였던 드락발트 선제후 가문인 호헨바흐 가문에게 책임을 물어 그들의 권위를 박탈하고 드락발트를 해체하여, 미덴란트와 노르틀란트가 합병케하였다. 호헨바흐 가문의 룬검 역시 압수하여 울릭의 사원에 보관했다. 만드레트 1세는 25년간 제국을 다스리면서 현명한 통치로 제국의 마을과 도시들을 재건하여 명군 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재건 과정에서 제국은 스케이븐 전쟁의 공포를 잊어버렸고 심지어 스케이븐의 존재 사실조차 잊어버리고 만다. 결국 만드레트 1세는 1152년에 잠을 자다 복수하러 온 스케이븐의 암살자들에 의해 한 다스나 되는 단검들이 심장에 박혀 죽었다. 이에 선제후들은 졸란트의 오토를 차기 황제로 뽑았지만 새로 황제가 된 오토는 유약한 성격으로 만드레트만큼 제대로 해내지 못했고 이후의 황제들도 정치를 못하다보니 일시적으로 강해졌던 황제의 권위는 다시 약화되었다. 게다가 이렇게 막장이 된 상황에도 제국의 선제후들은 단합은 커녕 오히려 황제 자리를 가지고 선제후들끼리 다툼을 벌이는 일이 많아졌다.[36] 또한 스케이븐 전쟁의 여파로 많은 역사 기록들이 소실되어 제국의 기원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없게 되었다.

2.2. 세 황제 시기

제국력 1359년, 스티를란드의 선제후가 지그마 교단의 지지를 받아 황제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또 다른 강력한 황제 후보자였던 탈라벡란트의 선제후이자 탈라벡하임의 여대공 오틸리아가 이에 반발, 지그마 교단이 미치광이에 의해 창설되었다는 주장을 펼쳐 그 결과 울릭 교단 대사제의 지지를 얻어[37][38] '오틸리아 1세'로 스스로 황제에 즉위, 탈라벡란트에서 지그마 교단의 활동을 금지시키고 울릭교와 타알 신앙[39]을 지원하였다. 두 황제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졌지만[40] 때마침 남부의 반도 국가 에스탈리아를 아라비의 술탄 자파르[41]가 침공하자 브레토니아의 국왕 '도덕적인 루이(Louis the Righteous)'가 아라비를 향한 성전을 촉구, 이에 제국의 기사단들과 병사들이 호응하면서 두 황제의 갈등은 일단 소강상태가 된다.

1547년이 되자 제국의 정치적 상황은 더 악화되어 미덴란트의 선제후이자 독실한 울릭교 신자인 지크프리트가 황제 선출 모임에 참석했을때[42] 많은 선제후들이 그의 황제 선출에 반대하였고 그 중 한 선제후가 그의 가슴에 쇠뇌를 겨냥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분노한 지크프리트는 미덴란트로 돌아가 스스로를 늑대 황제(Wolf Empeor)라고 선포하고 즉위하였다. 지크프리트는 즉각 오틸리아 황제인 프레데릭 5세와 전쟁을 벌였으나 역시나 승패가 명확하지 않게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제국은 지그마 교단이 지지하는 눌른의 선출직 황제, 타알교 세력이 지지하는 탈라벡란트의 오틸리아 황제, 울릭교의 지지를 받는 미덴란트의 늑대 황제로 3등분되어 분열하고 만다.

세 황제의 시대가 열리면서 제국은 지방별로도 분열되다시피 하였다. 선제후들이 3명의 황제와 연합하거나, 혹은 자기들끼리 합종연횡을 일삼았으며 이에 따라 가뜩이나 강했던 제국의 지방색이 더 강해지는 결과를 불러왔다. 그러나 이 때 의외로 제국이 서로 내전을 벌이는 경우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사라져갔는데, 왜냐면 제국이 자국 내에서 벌어지는 반란과 제국의 약화를 틈타 침입해 오는 그린스킨들과 비스트맨들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분열기에서도 스케이븐 전쟁 당시 급격하게 줄은 인구가 착실히 회복되었고 도시들의 인구와 부도 불어나 부유한 평민계층인 부르고마이스터(burgomeisters)들의 권한이 커지고 도시들의 자치권도 증가하였다. 심지어 몇몇 도시들의 경우 자신들을 지킬 군대를 자체적으로 모집하고 무장시키기까지 했다.

제국이 혼란해지면서 소제후들까지도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였는데 제국력 1550년에는 미덴란트 서부를 지배하던 빌드호펜(Bildhofen) 가문이 드락발트 지방의 룬팽을[43] 하사받는 조건으로 눌른의 선출직 황제를 지지하는 사건이 터졌으나 그 룬팽은 눌른에서 미덴란트로 오던 도중에 실종되고 만다. 그리고 1681년에는 실바니아가 스티를란드로부터 독립해나갔고 1905년에는 오스틀란트 선제후의 지원을 받은 탈라벡란트의 몇몇 도시들이 오틸리안 황제로부터 독립해나가 오스터마르크를 형성하였다.

제국력 1705년에는 오크 워로드 골바드 아이언클로가 '세상의 끝(World Edge)' 산맥을 넘어와 드워프 방위군을 격파하고 '카라즈 아 카라크'[44]까지 도달하고는 기수를 돌려 제국으로 쳐들어온다. 하플링 거주구인 무트란트와 아페를란트를 유린한 고바드는[45] 아페르하임을 구원하기 위해 출동한 졸란트 선제후 엘드레드가 이끄는 졸란트 군대를 몰살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당시 선출직 황제였던 지기스문트 4세가 지키고 있던 알트도르프를 공격하였다. 고블린 락 로버와 제국의 대포들이 서로 공격을 주고받는 격렬한 공성전 끝에 골바드의 군세는 패퇴당했지만 궁성까지 날아온 와이번들과 맞서 싸우다가 황제 지기스문트가 죽고 만다. 골바드는 패잔병들을 이끌고 졸란트로 되돌아가다가 복수를 위해 쫓아온 드워프 군대와의 격전 끝에 실종되고 만다. 이 오크 침략의 결과로 졸란트가 비센란트에 의해 합병되고 졸란트의 룬검은 실종되었다가 수 세기 후 드워프들이 다시 찾아내 제국에 반납하였다.[46] 1750년에는 탈라벡클란트의 오틸리안 황제인 신중한 호르스트(Horst the Cautious)가 오크 침공군에 맞서 싸우기를 거부하자 이에 주도인 탈라브하임의 사람들이 반발하여 헬무트 2세를 새 황제로 선출했다가 얼마 못 가 진압당한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1979년에 선출직 황제로 마린부르크의 아기 선제후[47] 마르가리타가 선출되자 지그마 교단의 대사제가 이를 거부하고는 공식적으로 황제의 자리가 공석임을 선언하지만 무시당하고 마르가리타가 선출직 황제로 올려진다. 이에 라이클란트의 선제후 또한 독자적인 제위를 주장하면서 네 명의 황제가 생기게 되고 나중에는 마린부르크 또한 황제를 따로 선출하면서 제국은 다섯 명의 황제가 통치권을 부르짖는 촌극이 펼쳐진다. 또한 오스틀란드가 이 난장판에 신경쓰느라고 북방 영토에 대한 관리가 소홀해졌고 이에 고스포다르인들이 그곳을 차지하고 독립을 선포하며 키슬레프를 건국하게 된다.

2.2.1. 십자군 원정

오크 워로드 고바드의 침입 말고도 두 가지의 중요한 사건이 세 황제 시기에 발생했는데, 하나는 세 황제의 시대 초반에 발생한 아라비를 향한 십자군 원정이었다. 제국력 1448년, 스케이븐들에게 충동질을 받은 아라비의 술탄 자파르가 에스탈리아의 소왕국들을 침공하여 에스탈리아 영토 대부분을 점령하고 수천 명을 노예로 끌고 갔다. 이에 탈출한 에스탈리아인들은 브레토니아로 건너가 루이 왕에게 자비를 호소했으며 마침 아라비의 침공을 경계했던데다가 호전적인 귀족들의 관심을 돌릴 때가 필요하던 루이 왕은 이에 호응하여 십자군 원정을 선포하게 된다. 루이 왕은 당시 제국의 선출직 황제에게 십자군 원정에 같이 참여하자는 편지를 보냈고 황제는 정식으로 십자군에 참여하진 않았으나, 종교적 열정을 가진 제국 기사단들과 일부 선제후들의 군대가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았다.

제국과 브레토니아의 연합군이 에스탈리아로 진군해오자 술탄은 자신의 군대를 집결시키는 한편, 휘하의 해군 함대를 보내 틸레아와 브레토니아의 해안가와 항구도시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러나 틸레아와 브레토니아의 해안 방어는 예상 외로 견고했고 아라비 해군은 별 성과를 못 내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중장갑으로 무장한 브레토니아와 제국의 중기병들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무장한 아라비의 기병들을 상대로 연전연승하였고 이에 술탄 자파르는 야전이 무익함을 깨닫고 요새 도시 마르가리타를 제외한 전 에스탈리아 영토에서 철군하고는 아라비 본토 결전을 준비하였다. 이에 십자군은 둘로 나뉘어 하나는 마르가리타를 공격하고[48] 나머지 한 부대는 술탄을 쫓아 바다를 건너 아라비 본토로 진군하였다.

원정군은 아라비 본토에 상륙하여 향신료 무역으로 유명한 항구 도시 코퍼(Copher)에 도착했다. 코퍼는 요새화가 잘 되어 있었고 방어군도 이미 전투 준비를 마쳤지만, 술탄 자파의 악행에 분노하는 원정군은 코퍼를 순식간에 함락시켰다. 그러나 자파의 군대는 중무장한 연합군과의 정면대결을 피하고 지구전으로 나아갔고 아라비 사막의 열기에 많은 십자군들의 사기가 하락하였다. 이 틈을 타 기동력 있는 자파의 경무장 기병들은 연합군의 뒤를 기습하여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이런 상태로 전쟁이 1년을 넘어가자 피해가 누적되던 연합군은 단기전으로 들어가 전쟁을 끝낼 생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자파의 아라비 군대 또한 별로 좋은 상태는 아니었는데, 자파의 폭정에 불만을 품은 일부 아라비 부족들이 전열에서 이탈하거나 연합군에게 협력하기 시작했던 것.

원정군이 단기전으로 승패를 결정짓기 위해 자파의 수도인 엘 하이크(El Haikk)로 진격할 때, 엘 하이크에서 징집된 수천 명의 아라비 부족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바람에 궁지에 몰린 자파는 흑마법으로 카오스 영역을 열어 악마들을 불러올 생각을 했다. 그러는 동안 자파의 군대와 원정군은 엘 하이크에서 격돌하였으며 보병들끼리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제국과 브레토니아의 기사들이 측면 돌격을 가하여 승리를 결정지었다. 자파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악마 소환을 포기하고 달아나다가 브레토니아 기사의 창에 찔려 죽고 만다. 승전 이후 목표를 완수한 브레토니아 기사단은 고향으로 돌아갔고 제국 기사단은 계속 아라비에서 머물며 살아남은 자파의 잔당들을 사냥하고 아라비의 지식이 보관되어 있는 도서관들과 신전들을 파괴했다. 1세기가 지난 다음에서야 원정군의 마지막 기사단이 약탈한 보물들을 가득 싣고 아라비를 떠났으며 그들은 떠나면서 아라비 함대를 불태워 다시는 아라비가 침공하는 일이 없도록 철저히 짓밟았다. 그 뒤 분열된 자파의 왕국에 남쪽의 유목민들이 침입해 아라비는 혼란해졌으며 다시는 하나로 통합되지 못했다.

이 당시에 호흘란트와 오스틀란트는 유명한 비스트로드 골소어[49] 수천의 비스트맨 군대로 침략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50] 골소어의 침략은 아라비에서 돌아온 불타는 태양 기사단의 지원군과 호흘란트 주도인 헤르기그 공방전에서 호흘란트 선제후 미카엘 루덴도르프가 처절하게 저항하며 큰 희생을 치른 끝에 일기토에서 루덴도르프와 골소어가 동귀어진하고 비스트맨들이 혼란에 빠져 와해되고 도주하면서 끝났다.[51]

브레토니아는 스케이븐이 퍼뜨린 붉은 수두로 큰 피해를 입고 무지용의 메로베크가 브레토니아 전체에 피의 전쟁을 일으켰다. 붉은 공작도 이 당시에 뱀파이어가 되었다.

2.2.2. 모드하임의 파괴

오스터마크가 독립한 뒤 무역 도시 모드하임은 오스터마크의 주도가 되어 번성했다. 그러다가 1999년 쌍꼬리 혜성이 모드하임 상공에 나타났고 모드하임에선 이를 기념하는 축제가 벌어졌다. 혜성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올수록 축제는 점점 광적으로 변하였으며 무정부 상태까지 벌어진 속에서 흥에 미쳐 버린 남녀들이 난교를 벌이며 타락의 향연을 벌였다. 그리고 2000년 새해가 된 한밤중에 혜성이 모드하임에 충돌, 도시는 완전히 박살나고 그 충격파가 인근을 덮쳐 몰려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게다가 불행히도 그 운석은 워프스톤이었고 그 재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워프스톤의 기운에 의해 돌연변이가 되어버렸다. 그 후 워프스톤을 탐낸 스케이븐들과 사람들이 몰려가서 워프스톤을 캐냈으며 훗날 황제 '경건한 마그누스'가 모드하임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3. 세 번째 천년기: 뱀파이어 전쟁

제국이 세 황제의 시기에서 다섯 황제의 시기로 넘어갈 정도로 혼란해졌을 무렵, 실바니아에서는 불온한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었다.[52] 1797년 실바니아의 선제후인 미치광이 오토 폰 드락(Otto von Drak)이 병사하기 전, 그의 딸인 이자벨라 폰 드락이 아버지의 부음날 갑작스럽게 방문한 의문의 여행객인 블라드 폰 카르슈타인과 눈이 맞아 결혼하는 사건이 발생한다.[53] 오토가 죽어가는 침대 옆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자벨라와 블라드는 오토의 유언대로 실바니아를 상속받게 되었고 블라드는 선제후가 된 후 첫 번째 업무로 이자벨라의 경쟁자였던 그녀의 삼촌을 성의 가장 높은 탑에서 던져서 추락사시켰다.[54]

사실 블라드 폰 카르슈타인의 정체는 바로 먼 고대의 문명 네헤라카 제국의 군사 전술가이자 최초의 네크로맨서인 나가쉬의 혈육인 바하네쉬(Vahanesh)였다. 그가 벌인 활약에 큰 인상을 받은 도시국가 라미아의 여왕 네페라타는 그녀와 그녀의 측근들이 개발해낸 영원히 사는 비약을 그에게 건넸고, 그걸 마시고 흡혈귀가 된 바하네쉬는 네페라타의 남편이 되어 네헤라카를 차지하려는 그녀의 야욕을 도왔다. 그러나 네헤라카의 영웅 정복왕 알카디자르가 네헤라카 군대를 몰고 쳐들어와 라미아를 함락시키자 네페라타의 세력과 함께 올드 월드로 도망가던 중[55] 부활한 나가쉬와 조우, 그의 충복이 되었다가 나가쉬가 지그마 헬든해머와 일기토를 벌이다 소멸한 뒤, 현재의 키슬레프 지방으로 도망쳐 거기서 은둔하다가 스케이븐 대전쟁 당시 실바니아로 가서 언데드 군단을 일으켜 스케이븐들을 몰아낸 다음 다시 운둔 생활에 들어갔다가 블라드 폰 카르슈타인으로 돌아왔던 것.

블라드가 선제후로 있던 몇 년간은 별 일 없이 영지가 돌아갔다. 블라드는 하인도 만나려 하지 않았고 낮에 돌아다니지도 않았으며 지그마 교단의 사제들을 마을에서 내쫓았으며 많은 하인들이 실종되고 그 자리를 미심쩍은 새로운 이방인들이 채워나갔지만, 그 전의 선제후 오토처럼 학정을 저지르지는 않았기에 실바니아의 주민들은 그저 이 이상한 영주로부터 신경을 끈 채 자신들의 일만 하며 살아갔다. 하루는 악명 높은 '도살자 베른호프(Bernhoff the Butcher)'의 용병단이 실바니아로 와서 자신들이 얌전히 지나가는 대가로 공물을 요구하자 블라드는 혼자서 그 용병대를 몰살시켜 버렸고, 이러한 엄정한 법 집행을 보고는 실바니아의 주민들이 오히려 새로운 영주를 지지하게 된다.

그렇지만 실바니아의 궁성 내부에서는 이미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블라드에게 반한 이자벨라가 처음으로 그에게 반항했을때, 그 모습을 보고 그때까지 이자벨라를 데면데면하게 대하던 블라드가 오히려 그녀에게 푹 빠지게 되었다. 이자벨라는 남편의 본 모습(=흡혈귀)을 알고도 오히려 자신도 사랑하는 남편과 같이 흡혈귀가 되게 해달라고 졸랐으며 블라드는 처음엔 그녀에게 흡혈귀가 가지는 괴로움을 주기 싫어서 망설였지만[56], 이사벨라가 불치병으로 죽을 위기에 몰리자 결국 그녀를 잃기 싫었던 나머지 흡혈귀로 만들고 다른 가족들도 모두 흡혈귀로 만들게 된다. 이렇게 실바니아는 흡혈귀 일족이 지배하는 땅이 된다.

그 뒤로 실바니아에선 마을의 젊은이들이 사라지고 살아 움직이는 시체들이 생겨났으며 이들을 피해 실바니아를 떠나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의문의 사고를 당해 죽었다. 또한 블라드에게 충성을 바친 이들은 좋은 대우를 받았으며 200년간 지배하면서 블라드는 뛰어난 통치 능력을 발휘해 낙후한 지방이었던 실바니아를 제국의 어느 지방에도 뒤지지 않는 곳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선제후 부부의 비정상적인 수명이 점점 더 많은 의심들을 불러모았고 이에 실바니아를 방문하는 마녀 사냥꾼들의 숫자도 점점 많아졌다. 물론 방문한 마녀 사냥꾼들은 모두 실종되었으며, 얼마 안 가 실바니아의 모든 귀족들 또한 이런 비정상적인 수명을 구가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0년의 첫 날에 모드하임이 운석 충돌로 파괴되자 블라드는 그곳으로 부하들을 몰래 보내 마력을 품은 워프스톤을 구해오기도 했다.

제국력 2010년, 때가 되었다고 판단한 블라드 폰 카르슈타인은 드디어 군세를 몰아 제국을 친다. 실바니아의 군대 옆에는 나가쉬의 마법서를 이용해 일으킨 수많은 망자의 군대도 함께 행군했다. 우선 블라드의 군세는 탈라벡란트로 향하여 오틸리안 황제의 군대를 격파하였고 그들의 죽은 병사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 군세를 확충해 나갔다.[57] 그뒤 블라드가 미덴란트를 공격했을 때, 제국 화이트 울프 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 제렉 크루거가 실바니아의 군세를 물리치고 블라드를 쓰려뜨렸으나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블라드는 다시 일어나 죽은 자들의 군세를 이끌었다. 그랜드마스터 크루거는 살아 돌아온 블라드에게 당해 흡혈귀가 되었고 그의 배신으로 미덴하임이 함락당하고 만다. 그 다음으로 마린부르크를 공격해 마린부르크 황제 일족을 죽이고는 호흘란트와 오스틀란트를 공격하던 블라드는 오스틀란트 대공의 군대와 접전 끝에 5개의 창에 꿰뚫리고 오스틀란트 대공의 룬팽에 심장이 박혀 쓰러진다. 그러나 그는 3년 후 또다시 일어났으며, 이렇게 40년 동안 제국을 유린하였다. 제국 내에서 이렇다 할 세력들을 모두 정리한 블라드는 언데드 군세를 총집결시켜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라이클란드 황제 루트비히의 황궁인 알트도르프로 향한다.

이때 절박함에 사로잡힌 지그마 교단의 수장, 대계보학자 빌헬름 3세(Wilhelm III)는 지그마 성소의 지하 교회에서 홀로 무릎을 꿇고서 눈물을 흘리며 지그마의 응답을 구했고, 그 자리에 나타난 만프레드 폰 카르슈타인을 통해 블라드의 불사의 비결이 바로 그의 손에 있는 반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루트비히와 빌헬름 3세는 제국 내 최고의 도둑이던 펠릭스 만을 불러들여 블라드의 반지를 훔치게 하는 데 성공한다. 반지가 없어진 것을 알게 된 블라드는 크게 분노하며 총공세를 감행했고 제국군은 수개월 동안 저항했음에도 멸망 직전까지 몰렸으나 마지막 순간 빌헬름 3세가 블라드와 대결 중 블라드를 끌어안고 성벽 밑에 꽂힌 말뚝으로 몸을 던져 함께 죽음을 맞았다. 지휘자를 잃어 혼란에 빠진 언데드 군세를 루트비히의 제국군이 반격하여 물리침에 따라 제국은 기사회생한다.[58]

그러나 블라드의 뒤를 이어 권좌에 오른 콘라드 폰 카르슈타인이 다시 한 번 정복 전쟁을 시작한다. 이 전쟁으로 인해 아발란트 군이 괴멸되고 드워프들의 요새인 주프바르가 함락되기도 했다. 그러나 콘라드는 전임자였던 블라드보다 전략적인 식견도 떨어졌고 휘하의 마법사들도 매우 혹독하게 다루었기에 그들이 반기를 들면서 조금씩 무너져갔다. 이후 드워프 장군 그루프바드와 마린부르크 선제후 헬마르가 이끄는 제국-드워프 연합군이 그림 무어 전투에서 콘라드를 처단하면서 2차 뱀파이어 전쟁 역시 끝나게 된다.

그 뒤에는 만프레트 폰 카르슈타인이 이끄는 언데드 군세에[59] 의한 제3차 뱀파이어 전쟁이 일어났다. 이 때는 대계보학자 쿠르트 3세가 죽음의 서를 이용해 언데드 군세에 치명타를 입혔고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단합하여 드워프와 함께 반격하자 헬 펜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동시에 스티어란트의 선제후 마틴이 만프레트를 처단하면서 3차 뱀파이어 전쟁은 제국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이후 실바니아는 스티어란트에 병합되었지만 아직까지도 언데드의 기세가 남아 있는 땅으로 남게 되었다.

3.1. 카오스와의 대전쟁

2301년 쿠르간인 출신 에버초즌인 아사바르 쿨이 수천의 카오스 대군을 이끌고 키슬레프로 진군하였다. 키슬레프의 도시인 프라그는 맞서 싸웠지만 결국 함락되어 카오스의 마법에 생존자들이 벽과 융합되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이때 제국도 분열이 일어나 키슬레프를 지원하는 데 의견이 갈렸고 제국 귀족들 중 일부는 벌써부터 세상에 멸망이 왔다고 카오스 신앙에 빠져들었다. 주변 챙기기 바쁜 선제후들을 대신해 눌른의 젊은 귀족 마그누스 폰 빌드호펜, 훗날 ‘경건한 마그누스’로 불릴 영웅이 등장했고 그는 말세가 왔다고 두려워하는 제국인들에게 쌍꼬리 혜성이 나타났으며 어둠의 신의 군세와 싸워 인류의 터전을 지킬 위대한 의무에 대해 설파했다.

마그누스는 뉠른에서 봉기한 카오스 컬트를 진압했고 각지에서 모인 십자군을[60] 지휘하며 키슬레브의 도시 프라그로 원정을 떠나게 되었다. 또한 그는 울릭의 불꽃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순수함까지 인증하여 울릭 교단의 지원도 받아 울릭의 고위 사제인 크리스토프에게 기병대를 이끌고 키슬레프로 구원 병력을 보내게 하였다.

이후 마그누스의 제국군은 키슬레프에서 카오스의 군세와 마주하게 된다. 애버초즌의 카오스 군단은 사기와 무력도 월등했지만 카라즈 아 카라크의 드워프 하이 킹 알릭슨이 동맹군을 이끌고 왔고, 피닉스 킹 핀누바르의 탈고립주의에 찬성한 대마법사 테클리스가 두 로어마스터를[61] 대동한 채 마그누스를 지원해 프라그를 뒤로 한 채 벌어진 대전투에서 혈투 끝에 결국 에버초즌 아사바르 쿨과 그의 군세는 격퇴됐고 제국군의 승리로 종결된다.[62] 이후 마그누스는 제국인들의 지지와 환영을 받으며 황제로 선출되었다.

황제가 된 마그누스는 혼란스러웠던 세 황제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현 제국의 기틀과 눌른의 화포 제조창과 알트도르프의 마법대학을 창설하였고 인류, 엘프, 드워프 세 종족 간의 대 카오스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수년간 군대를 이끌고 제국의 영토에서 날뛰고 있던 카오스 신도, 도적떼, 비스트맨, 그린스킨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하여 제국의 치안을 바로잡았다. 마그누스의 현명한 통치로 내전과 외침으로 피폐해져 있었던 제국은 안정되기 시작했고 분열된 지방들이 재통합되었으며 교역이 활성화되고 상업이 증대되어 과거의 번영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특히 마그누스의 치세 때의 제국은 지그마 이래 제국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로 여겨졌을 정도였다.

3.2. 라이클란드 황제의 세습화

제국을 되살린 경건한 마그누스가 65년간 통치하다가 사망한 뒤[63] 그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스티를란트 선제후 레오폴트는 당선을 위해 다른 선제후들에게 벌인 엄청난 로비 때문에 선제후들의 힘이 강해지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레오폴트의 손자 디터 4세는 전대의 암군 루트비히, 보리스에게 뒤지지 않으며 오히려 더 끔찍하게 무능한 황제였다. 경건한 마그누스가 재건한 재국을 크게 말아먹었는데 그중에서도 디터 4세의 가장 큰 실책은 돈을 마구잡이로 써서 제국의 재정을 파탄내었고 돈 준다는 말에[64] 선제후들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국에서 가장 부유한 항구도시이자 제국 해군의 중심이었던 마린부르크를 자유도시로 독립시켜줘 버린 것이다.[65] 심지어 그린스킨 진영에 나타난 배불뚝이 그롬의 와아아아!까지 일어났을 때에도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해[66][67] 제국이 완전히 황폐화되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결국 보다 못한 선제후들이 들고 일어나 디터 4세를 폐위시켜 버리고 마그누스에 의해 라이클란트의 선제후에 봉해졌던 빌헬름 폰 홀스비히-슐리슈타인이 새 황제 빌헬름 3세로 선출되었다. 황제가 된 빌헬름 3세는 제국군을 이끌고 그롬의 군대를 물리치며 디터 4세가 엉망으로 해놓았던 제국을 다시 바로잡았다.[68] 그러나 빌헬름 3세는 마린부르크를 되찾으려고 군대를 파견했지만 오히려 패하여 결국 마린부르크의 독립을 인정하고 만다.[69] 그 뒤로 라이클란트의 선제후들이 황제로 계속 선출되었으며 카를 프란츠의 시대에 이르게 된다. 카를 프란츠는 매우 뛰어난 명군으로 제국을 훌륭하게 다스리고 있으나 계속된 외침과 내부 갈등, 각종 재앙들로 인해 제국의 상황은 매우 암울하며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다.[70]


[1] 영어로 중국을 가리키는 고어. 워해머 세계관에서는 중국 포지션에 해당하는 국가로 엔드 타임 시기까지 존속했다.[2] 전성기에 현 제국 지역까지 식민지를 건설해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 네헤카라 왕국 시절에 이미 네헤카라 사람들이 북부을 정복해 거기서 살았고, 후에 네헤카라의 국력이 약해저 본국과 식민지 간의 유대가 단절된 후에도 그대로 살았다. 또한 남부와 북부의 기원이 다르다는 설명도 있다. 따라서 남부는 원주민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남부 왕국들의 시조가 되었고, 북부에 있는 제국은 네헤카라 문명에서 건너와 정착한 이들이 시조가 된 것이다. 젊은 시절의 지그마가 우연히 발견한 어느 고분은 네헤카라 양식이었으며, 거기에 있던 문자판에 있던 글들은 고대의 것이었지만 운베로겐 문자와 차이가 별로 없어 지그마가 그냥 읽을 수 있었다. 이러한 네헤카라 양식의 고분들이 지그마가 인간이던 시절에는 산맥 여기저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고 한다.[3] 엘프들은 올드 월드의 거점들을 모두 잃고 울쑤안으로 도망쳤으며, 드워프들은 승리하긴 했으나 국력 소모가 극심하였고 그 뒤에 일어난 대지진의 여파까지 겹쳐 대부분의 요새들을 상실한다.[4] 틸레아 부족들은 남쪽의 산맥을 건너서 더 내려간 다음에 그곳에 있던 옛날 엘프 거주지 폐허들에 정착했는데 이 때문에 오크들의 공격에서 무사할 수 있었고 혼란스러웠던 제국과는 달리 안정적으로 문화적 발전을 구가하게 된다.[5] 쿠르간 아이언비어드는 이를 계기로 지그마의 절친한 친구가 된다.[6] 이 때 지그마의 나이가 15세였다. 한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는 만 나이를 쓰므로 중학교 3학년생이 이러한 업적을 세운 것...[7] 다만 브레토니 부족은 통합을 거부하고 서쪽으로 달아나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는데 나중에 브레토니아가 된다.[8] 이 알라릭은 이후 천벌의 왕관이라는 왕관을 만들고 두려움에 떨어 이 왕관을 숨긴 뒤 사라진다. 참고[9] 제국 황제에 오르기 이전, 라벤나라는 여인을 사모했는데 그녀의 오빠인 기레온이 지그마를 질투했고, 지그마를 암살 시도했으나 라벤나를 죽이는 비극이 일어난다. 쫓겨난 기레온은 훗날 슬라네쉬의 데몬 프린스, 아자젤(Warhammer)이 되었다.[10] 슈티를란트의 선제후가 된 애소본 부족의 여왕 프레이야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두긴 했는데, 프레이야가 비밀로 했다. 나중에 이를 알게 된 지그마는 라이크도르프로 장성한 아들들을 데려와 키우려 했으나, 본인처럼 메드브리는 애소본 부족 여인과 결혼한 부하 울프가르트가 프레이야가 그것을 우려해 숨겼던 것 아니겠냐며 만류하여 그만두었다.[11] 이때부터 제국의 제후들은 선출권을 가진 제후인 선제후로 불리게 된다.[12] 나중에 지그마교의 대사제 2명과 하플링 장로가 합류한다.[13] 이때 선제후들 간에 온갖 약속, 협박, 금전등이 오고간다(...)[14] 워해머 위키상 2대 황제는 지그리히(Siegrich), 3대 황제 헤드리흐 1세(Hedrich I)가 존재했다고 한다. 단 지그리히는 재위 2년만에 살해당했다.[15] 대략 지그마가 실종되고 25년이 지난 뒤 3대 황제인 뉠른의 헤네스트 황제 때 등장했다.[16] 우드 엘프들의 본거지인 회색 산맥 너머의 아델 로렌과는 별개로 미덴란트 서쪽에 있는 숲이다.[17] 수도도 드락발트의 주도였던 카로부르크(Carroburg)로 옮겼다.[18] 이 시기에 제국에서 최초로 슬라네쉬를 숭배하는 카오스 교단이 생겨났다.[19] 버터를 넣은 요리를 제공해주었다.[20] 근데 사실 루트비히 2세는 황제가 되기 전인 스티를란트 선제후 시절 아페를란트 선제후의 딸들에게 접근했다가 차인 악연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를 복수하려던 마음으로 그랬던 것.[21] 당시 지그마 교단은 지그마를 숭배하는 일반 제국민들과 귀족들로부터 막대한 헌금을 받아 굉장히 부유해져 있었다.[22] 특히 이때의 제국은 인구에서 절정에 달했다.[23] 이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는지 죽은 자가 산자보다 훨씬 많았다고 할 정도였다.[24] 아예 지방이 쑥대밭이 되든 말든 방치할 생각은 아니었고 국방 공백 상태가 된 선제후국에 선심쓰듯 제국군을 파견해 황제에게 의존하도록 만들 계획이었다[25] 스케이븐의 패스틸렌스 클랜이 보낸 첩자들이 숨어 들어와 별궁에 역병을 퍼뜨렸다. 그래서 보리스를 포함한 별궁의 사람들은 몸에서 종기와 고름이 터지며 죽었다.[26] 페스틸런스 클랜은 이 공적을 인정받아 의회에서 자리를 3개나 차지하게 된다. 특히 페스틸런스 클랜이 약탈과 노예사냥에 적극적이여서 클랜들중 가장 많은 부를 가지게 되었다.[27] 오스터마크의 주도로 스케이븐 전쟁 이후 운석 충돌로 파괴되었다.[28] 아페를란트의 주도[29] 이때 실바니아를 다스리던 프레데릭 반헬이 나가쉬의 책을 번역한 리베르 모티스를 지었고 이를 이용해서 스케이븐을 막았던 것. 현재 반헬 가문의 후손은 제국 위치 헌터의 수장으로 역임하고 있으며 가문의 일원들은 조상의 죄를 씻는다는 일념으로 제국에 봉사하고 있다.[30] 당시 만드레트는 역병을 막기위해 미덴하임의 도개교를 폐쇄하고 외부와의 무역로도 막았다. 만드레트의 조치로 미덴하임은 역병에서 유일하게 무사한 도시가 되어 저항군을 양성할수 있었다.[31] 이는 역병을 개발한 스케이븐의 페스틸렌스 클랜이 살상력에만 집중한 나머지 정작 치료법을 개발하는것은 생각하지않고 무턱대고 살포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스케이븐들 스스로도 역병에 대한 치료법을 찾을수가 없었고 이것이 결국 독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스케이븐은 최고 의회인 13의회의 승인이 있어야 새로운 역병을 살포할 수 있게 된다.[32] 당시 전황 자체는 막상막하였는데 스케이븐 군대를 이끌던 모르 클랜의 수장인 그레이트 워로드 버르믹을 만드레트가 직접 싸워 이겨 그의 목을 베자 혼란에 빠진 스케이븐 군대가 도주하기 시작했고 이틈을 타서 제국군이 공격하여 승리했다.[33] 하지만 스케이븐은 클랜들끼리 서로 책임 공방을 펼치면서 대립했기에 복수전을 못했다.[34] 흑사병만으로도 이미 인구의 3/4이 죽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제국은 세력이 급격하게 약화되어 제국의 적들과 물량에서 크게 불리해졌다. 이후 판타지의 제국이 단독으로 전쟁을 벌이며 타 세력들에게 위협이 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군세를 자랑하는 40K의 인류제국과 달리 드워프, 하이 엘프, 우드 엘프, 브레토니아와 연대하게 된 것도 이 때의 여파 때문. 특히 현재 제국의 적들은 제국을 무서워하는것이 아니라 우습게 보며 호구로 생각하며 심심하면 공격해온다.[35] 다만 40k의 인류제국도 호루스 헤러시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데다 기술력을 대부분 상실했고 현상 유지만 겨우 하다가 개더링 스톰 이후 일어난 대균열로 인해 영토의 절반이 분단되었고 영토 전역이 카오스와 외계인의 침공을 받게되어 단독으로 싸우기가 힘들어진 상황이다. 특히 아엘다리와의 관계가 좋지 못하지만 공동의 적인 카오스와 맞서 싸우기 위해 암묵적인 협력을 하고 있다.[36] 다툼 수준을 넘어서 전쟁을 벌이는 일도 많았다. '전쟁의 시대(Age of War)'라고 불릴 지경.[37] 본래 울릭 교단은 초대 황제 지그마도 믿을 정도로 제국 최대의 종교였으나 지그마교가 등장해 제국 남부에서 큰 위세를 떨치게 되어 2위로 밀려나 있었다. 게다가 지그마 교단도 급속도로 세를 불리고 헌금으로 부유해지자 굉장히 아니꼬와하며 세 황제 시기 내내 지그마 교단이 지지하는 황제를 반대하였다.[38] 그런데 사실 더 직접적인 이유는 스티를란드 출신 황제가 지그마 교단의 '조언'을 받아 울릭교에게 거액의 세금을 물리려 했기 때문이다.[39] 울릭의 형제 신으로 산과 숲의 신이다. 수확과 대지의 여신 라야와 부부 사이이며 이 두 신은 탈라벡란트를 비롯한 제국 북동부에서 많이 믿고 있다.[40] 이때 스티를란드 황제는 1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진압에 나섰지만 오틸리아 측의 반군 1만 명에게 참패하여 진압이 실패로 돌아간다.[41] 강력한 마법사로 아라비의 부족들과 도시국가들을 전부 통합해 아라비 제국을 건설하고 에스탈리아를 공격하였다. 강력한 정령들과 악마들을 소환해 부릴 줄 알았으며 아라비 땅의 스케이븐들의 은밀한 지원을 받기도 했다. 결국 에스탈리아를 구원하러 온 제국의 기사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죽는다.[42] 오틸리아 혈통의 세습 황제는 당연히 불참하였다.[43] 드락발트의 룬팽 비스트 슬레이어(Beast Slayer)는 보리스 골드게더 황제 치세때부터 금고에 보관되어 있었다.[44] 드워프들의 수도로 지금껏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었다.[45] 주도인 아페르하임까지 함락시키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러한 고바드의 명성을 듣고 더 많은 오크 부족들이 고바드의 군대에 가담하였다.[46] 현재 라익스가드의 단장이자 제국 원수인 쿠르트 헬보르크가 전장에 나갈 때 하사받아 무명을 쌓는 중이다.[47] 별명이 아니라 진짜 아기였다.[48] 아라비의 정예부대들이 방어하고 있었으나 결국 함락당한다.[49] 역대 비스트로드들 중 가장 뛰어난 비스트로드로 마법사이자 전사였는데 마법뿐만 아니라 무력도 출중했다.[50] 특히 골소어는 그에게 도전한 그린스킨 군대와도 싸워 이겼다.[51] 사실 이 때 제국 측의 병력이 지원군을 합쳐도 워낙 열세였던 터라 도주하는 비스트맨 군대를 전멸시킬 수가 없었다. 특히 지원군으로 온 불타는 태양 기사단의 병력도 수백 명밖에 안 되었다.[52] 뱀파이어 카운트가 지배하기 전에도 실바니아는 이미 좀비와 구울들이 횡행하는데다가 음침한 자연환경, 거주민들의 폐쇄성, 자꾸만 태어나는 기형아들로 악명이 높았다.[53] 오토 폰 드락은 조금이라도 맘에 안 들면 농민들의 머리를 베어다가 꼬챙이에 끼워두었고 늘 술에 취해서 자신을 지그마의 현신이라 주장하고 다닌 미치광이였다. 그는 죽기 전에 자신의 딸인 이자벨라를 악마와 결혼시켜서 그 악마에게 영지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했으며 이는 그가 죽은 뒤 현실이 되었다.[54] 이사벨라의 삼촌은 호시탐탐 선제후 자리를 노려왔고 형 오토가 죽자마자 바로 선제후가 되려했다.[55] 이 때 황무지를 지나가면서 무수히 많은 오크들을 학살했다.[56] 워해머 판타지 세계관의 뱀파이어들은 나가쉬의 저주를 받아 햇빛을 받으면 타 죽기에 밤에만 활동하거나 굳이 낮에 활동해야 할 땐 철저히 본인을 마법적인 조치를 취해야 하는 불완전한 영생을 얻은 대가로 거의 대다수가 괴팍한 성질머리에 한두가지의 정신병은 기본으로 갖고 있다. 당장 그나마 온건하고 제정신에 가까운 블라드 본인도 권력욕에 집착하는 정신병이 있기에 이사벨라를 자신과 같은 미치광이로 만들기 싫었던 것. 물론 남부 왕국의 어느 뱀파이어 여백작처럼 백성들에게 피를 공물로 받고 그들을 지켜주거나 어느 스트리고이 구울 킹처럼 낮에는 성에 틀어박힌 영주로 살다가 백성들이 외적의 침입을 받으면 박쥐 가면을 쓰고 나타나 그들을 지켜주고 사라져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는 걸로 만족하는 뱀파이어들도 있지만 이건 이들이 특이 케이스인 것이지 거의 대다수의 뱀파이어들은 자기가 사는 지역의 백성들을 그저 유사시에 써먹을 좋은 고기방패 정도로밖에 생각 안 한다.[57] 뱀파이어 전쟁을 벌이면서 블라드는 반항하면 죽을 것이지만 항복하면 자신을 섬기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였고, 이를 믿고 항복해 온 자들을 처형한 뒤 망자로써 섬기게 해주었다.[58] 하지만 루트비히는 자신의 경쟁자 황제들을 견제한다고 정작 도주하는 뱀파이어들을 추격하지 않는 바람에 그들이 실바니아에 무사히 도착했고 다시 군대를 양성할 수 있는 시간을 주고 만다.[59] 이때 만프레드의 언데드 군세가 30만이라고 했지만 명백한 과장으로 보며 제국 역사가들의 추정으로는 2만이라고 한다. 특히 헬 펜 전투에 동원한 제국-드워프 연합군의 병력이 3만 명이었다.[60] 이때 모인 군세가 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의 병력이었다고 한다. 얼마나 많았던지 이와 같은 대병력이 모인 사례가 전무후무했고 군대를 움직이는 것이 힘들어 집결하여 진군하는 것을 포기하고 양분하기로 결정했을 정도였다.[61] 어틀레와 핀레이어로 테클리스와 함께 하이 엘프 최고의 대마법사들이었다. 이 3명의 마법이 얼마나 강력했냐면 이들이 전투에 참전하여 싸운 것만으로도 승패를 역전시켰을 정도였다. 다만 최후의 전투인 키슬레프 관문 전투에선 세 마법사가 온갖 마법을 다 퍼부어도 감당이 안 될 만큼 카오스 군세는 어마어마했고 테클리스와 핀레이어는 부상을 입었으며 어틀레는 키퍼 오브 시크릿과 싸우다 태워 죽이는 데 성공했으나 목이 베여 전사한다. 어틀레의 시신은 테클리스와 핀레이어, 제국군이 수습하여 오스터마르크에서 장례를 치른다음 매장된다.[62] 이때 아사바르 쿨은 죽기전 "나는 나의 신을 실망시켰다"고 하자 죽이면서 마그누스가 한 말이 간지 그 자체인데 “아니. 네놈이 신들에게 패배를 안긴 것이 아니다. 너의 신들이 네놈을 패배시킨 것이지. 저주받은 너의 신들과 달리, 나의 신께서는 언제나 나와 함께하신다. 지그마의 이름으로, 지옥으로 돌아가거라!”[63] 잠을 자다가 사망했다. 사후 마그누스의 생일은 제국의 기념일로 정해진다.[64] 왜냐면 디터 4세는 제국 동물원과 눌른의 절반을 뒤덮는 황금 궁전 건설에 많은 돈을 쓰다보니 진 빚이 엄청났다.[65] 이때문에 제국 해군의 중심지가 라이클란트와 노르틀란트가 되고 만다.[66] 그롬은 블랙오크도 아니고, 새비지 오크도 아니고, 하다 못해 그냥 평범한 오크도 아닌 뚱뚱한 고블린이다. 그저 고블린이 제국을 갈아엎는 동안 디터 4세는 현실도피에 빠져 눌른에서의 황금궁전 건설이랑 알트도르프의 제국 동물원 건설, 이젠 아무 쓸모없어진 동전이나 만지작거리며 망상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디터 4세가 자기의 덕질인 눌른의 황금궁전 건설을 위해서 제국 국방비를 깎아버리고 군축을 한 뒤 바로 발생한 일이라 제국군이 제대로 대응을 못한데다 그롬이 눌른까지 쳐들어왔을 때 대응은커녕 알트도르프로 도망가서 궁전에 숨어살면서 사태가 가만히 해결되기만을 바래서 더 비난받았다. 게다가 그롬이 드워프 영토들까지 침공할 때 드워프 왕국이 도움을 요청했는데도 도와주지 않아 원한의 서에 실리게 되어 제국의 혈맹인 드워프와의 관계가 틀어지게 만들었다. 나중에 디터 4세가 폐위되고 빌헬름 3세 때 다시 관계가 개선된다.[67] 물론 그롬이 그저 시대를 잘 타 부흥한 고블린 나부랭이에 불과하다고 보면 곤란하다. 오늘날까지도 난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고블린들의 습성을 조금이나마 의젓하게 바로잡게 하는 것이 바로 위대한 그롬의 전설이다. 아무리 정신 사나운 고블린이라도 그들의 샤먼이 그롬의 이야기를 하면 의젓하게 경청할 정도로 그롬의 행적은 고블린들 사이에서 전설로 통하는데 심지어 그롬은 엔드 타임 전까지 배다른 동족인 다크 엘프를 제외하면 역사상 단 한 번도 외적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은 하이 엘프의 울쑤안까지 침공해 그들이 만든 그레이트 볼텍스를 파괴하기 직전까지 간 위대한 업적을 세웠다. 하지만 문제는 황제가 그저 향락에만 빠져 있다가 침공에는 맞서 싸우지 않고 무책임하게 숨어서 아무것도 안 한 것이 큰 문제였던 것. 그리고 이는 하이 엘프의 영웅인 엘사리온이 인간을 좋게 보지 않게 하는 원인을 제공해 훗날 엔드 타임때 나가쉬의 부활 저지 당시 제국과 의견 충돌이 일어나 진군을 따로 해서 각개격파당해 끝내 나가쉬가 부활하는데 성공하게 만드는 등, 세계의 멸망에까지 영향을 끼쳐 버린 최악의 황제가 바로 디터 4세다.[68] 이후 디터 4세가 누군가에게 참교육을 당해 죽었다거나 하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탈라벡란트로 쫓겨난 뒤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살았다고 한다.[69] 마린부르크가 돈으로 대규모의 용병을 고용하고 하이 엘프와도 동맹을 맺어 저항하여 패전한 것도 있으나 디터 4세가 워낙 제국을 말아먹어서 제국의 형편이 너무 나쁘다 보니 제국으로선 일개 도시국가에 불과한 마린부르크와도 장기전을 할 처지가 못 되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암군으로 인해 제국의 국력이 얼마나 추락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70] 참고로 카를 프란츠의 즉위 시기는 제국력 2502년이다. 엔드타임 시기인 2525년까지 제국 멸망의 위기가 3번(2510년에 구더기 군주 타무르칸의 눌른 침공, 2512년에 학살자 아자그의 남침, 2515년에 흑철파괴자 몰트킨의 오스트란트 침공)이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2521년에는 사상 최악의 기근과 흉년이 제국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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