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1 |
전북 현대 모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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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재
1.1. 축구
1.1.1. K리그1 : 전북 현대 모터스
{{{#!wiki style="margin: -5px 0; display: inline-table" | <tablebordercolor=#fff,#1f2024><tablebgcolor=#fff,#1f2024> | 전북 현대 모터스 Jeonbuk Hyundai Motors | }}} |
전주월드컵경기장 |
전북을 온전히 연고로 하는 프로축구단의 창단이 추진된 것은 1991년이었다. 당시 완산스포츠클럽이 '전라 진돗개'라는 이름의 컨소시엄 형태로 축구단 창단을 추진했으나 자금 부족과 드래프트 불참으로 1992년 리그 참가가 무산됐다. 1992년에는 스포츠용품 업체 푸마의 자금 지원을 받아 "완산 푸마"라는 이름으로 팀을 만들고 프로축구위원회의 창단 승인도 받았다. 그러나 창단 이전부터 구단과 관련한 온갖 괴소문이 파다했고 완산 푸마에 지명됐던 선수들도 입단을 거부하거나 타팀 입단을 희망하면서[1] 선수단 구성이 삐걱거리게 된다. 그마저도 완산 푸마는 선수 등록 마감시한을 지키지 못했고 선수단에 지급해야 할 계약금은 물론 급여까지도 체불한 것으로[2] 알려지면서 완산 푸마의 창단 승인은 1993년 3월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완산스포츠클럽은 이에 멈추지 않고 1993년 11월에는 가정용 컴퓨터 생산업체였던 제우정보를 메인 스폰서로 내세우면서 전북 연고 프로축구단 창단을 추진했으나 이 계약도 엉터리였음이 들통나면서[3] 결국 전북지역 주류업체인 보배주조가 후원을 맡는 조건으로 호남 연고 프로축구단인 전북 버팔로가 우여곡절 끝에 창단됐다. 국민은행 까치가 K리그에서 떠난 뒤 K리그에 10년 만에 돌아온 호남 연고 축구단이자 전북을 연고로 하는 최초의 축구단이었다.
그러나 그 전북 버팔로마저도 자금 사정이 시원치 않아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보배주조의 후원은 얼마 못 가서 끊겼고 당시 보배주조를 경영하던 문수기 사장이 사비를 들여서 버팔로 축구단 후원에 나섰다. 애초에 돈이 없던 팀이었기에 훈련장은 물론이고 선수단의 숙소조차 마련하지 못해서 당장 경기를 치르는 것보다 선수단이 어디서 먹고 자며 지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고 한다. 결국 1994년 여름에 전북 버팔로의 운영도 탈이 나고야 말았고 축구계가 나서서 '전북 버팔로 돕기 성금 모금 운동'을 펼치는 광경까지 펼쳐졌다. 그리고 1994년 시즌 후 전북 버팔로는 해체의 비운을 맞았다.
다행히도 1994년 시즌 종료 후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인근에 본사를 둔 현대자동차의 협력업체 현양이 해체된 전북 버팔로 선수들과 개별 계약한 뒤 구단을 만들었는데 이 팀이 전북 다이노스다. 전북 다이노스는 현양이 자본금을 대고 매년 20억원씩 현대자동차가 후원하는 조건으로 운영됐다. 그리고 1997년 아예 현대차가 다이노스 축구단을 인수하면서 전북 현대 다이노스로 간판을 바꿔 달았고 2000년부터 현재의 전북 현대 모터스라는 이름으로 팀이 운영되고 있다. 엄밀히 따지자면 전북 현대 모터스의 연고지는 전주시가 아니라 전라북도 전체지만 전주월드컵경기장 준공 이후 모든 경기를 전주에서[4] 치르고 있다.
전북 현대는 이철근 단장과 최강희 감독이 부임한 2000년대 중반 부터 강팀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2006년 AFC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라는 대형 사고를 치고 2009년 리그 첫 우승을 시작으로 이후 2011년, 2014~2015년 2년 연속 우승, 2017~2021년 5년 연속 우승까지 K리그에서 총 9회 우승 및 최초 200승을 달성했다. 2016년에는 두 번째로 아시아 챔피언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2009년부터 2022년까지 14년간 구단 성적이 리그 3위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을 정도로[5] 최전성기를 맞고 있는 자타공인 K리그의 명문 구단이다.
2006년 ACL 우승을 계기로 아시아의 축구 팬이라면 전북을 모를 수 없을 정도가 되어 전라북도와 전주시의 홍보에 도움이 되고 있다. 전주시 측에서 문화협력 교류차 프랑스 파리와 베르사유 시 등을 방문했는데 전주에서 왔다니 프랑스 관계자들이 전북 구단을 알고 있어 전주시 공무원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전북 현대는 프랑스 명문구단 올랭피크 리옹과 자매 결연을 맺은 사이다.[6] 시청이나 시의회에서도 구단의 가치에 대해 예전보다는 주목하고 노력하는 편이나 꼭 투자만이 아니라도 현대차그룹의 정성에 비하면 아쉽다는 평이 많았다.
2017년 U-20 월드컵 유치에 성공하는 과정에서 수원시와 함께 FIFA의 최고 점수를 얻은 것으로 알려졌다. 명문 구단으로 도약한 2010년대를 거쳐 202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리그의 스타 플레이어들을 긁어 모아 막강한 전력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FC 서울, 울산 현대, 수원 삼성 블루윙즈, 포항 스틸러스 등과 함께 K리그를 이끄는 리딩 클럽으로 자리매김한 이래로 거대한 팬덤 규모를 자랑하며 리그 최고의 구단이라 부르기 손색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참고로 전북 현대의 클럽하우스는 전주 바로 인근 지역인 완주군 봉동읍 율소리에 있으며 리저브 팀인 전북 현대 B팀은 완주공설운동장에서 홈경기를 치르고 있다.
1.1.2. K4리그 : 전주시민축구단 (해체)
1.1.3. 아마추어 축구단
1.2. 기타 종목
2. 과거
2.1. 야구
2.1.1. KBO 리그 : 쌍방울 레이더스
{{{#!wiki style="margin: -5px 0; display: inline-table" | <tablebordercolor=#fff,#1f2023><tablebgcolor=#fff,#1f2023> | 쌍방울 레이더스 SBW RAIDERS | }}} |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 |
그러다 옆동네인 군산시의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가 1972년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결승전에서 일궈낸 기적의 대역전승과 이 시기 전국적으로 확산된 고교야구의 붐에 자극을 받은 덕에 1977년 야구부가 재창단됐다. 전주고 야구부는 1982년 대통령배 4강, 1984년 황금사자기 4강에 오른 후 1985년 마침내 황금사자기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전주고 야구부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전주시민과 전북도민들에게 피력했다. 그러나 전주고의 우승 기록은 현재까지도 1985년 황금사자기 우승이 전부다.
돌풍을 일으킨 전주고 야구부와 함께 전주에 야구 붐을 일으킨 주역은 1982년 호남을 연고로 창단한 해태 타이거즈였다. 한국프로야구는 서울특별시를 제외한 다른 지역의 연고권에 대해 1개의 대도시(직할시 또는 도청 소재지)와 그 대도시 주변 광역지자체를 하나로 묶어서 연고권으로 보장해주는 광역 연고제를 채택했다. 당시 해태의 연고권은 전라남도와 전라북도를 동시에 커버하는[7] 호남 단일 연고권이었다.
메인 연고 도시는 광주였지만 창단 당시에는 전북 출신 선수들이 주축을 이뤘다. 물론 전주 출신은 지극히 적었고 대부분 군산 출신이었으며[8] 그마저도 전주고 출신은 한 명도 없었다.[9] 창단 원년부터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을 제2 홈구장으로 삼아서 홈경기를 치른 해태는 전주에서 유독 좋은 성적을 거둬 전주 팬들을 기쁘게 했다. 특히 광주에서 전국체육대회가 열린다는 이유로 전주에서 치렀던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 OB 베어스를 접전 끝에 꺾고 광주로 내려가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4승 무패로 탈탈 털며 통산 3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하지만 해태는 어디까지나 광주의 팀이었고 전주 홈경기는 1년에 10경기 미만으로 열리는데 그쳤기에 야구에 목마른 전주시민들의 갈증을 해소시키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전주시민을 비롯한 전북도민들의 야구 열기에 부응하고 당시 7개 구단으로 운영되던 한국프로야구 리그의 기형적 체제를 해결하고자 1989년부터 전라북도를 연고로 하는 제8구단 창단이 추진된다. 그렇게 창단된 팀이 1990년 3월에 전북의 향토기업 쌍방울을[10] 모기업으로 하는 쌍방울 레이더스였다. 쌍방울의 연고지는 전라북도였는데 전주시는 쌍방울의 메인 연고도시로서 전주 야구장에서 대부분의 홈경기를[11] 치렀다.
그러나 쌍방울은 창단 당시부터 힘들게 태어나서 너무나 짧은 전성기를 보내다 가장 안타깝고 비참하게 문을 닫은 프로야구단으로 기억되고 있다. 쌍방울은 홀수 구단(7구단)으로 운영되던 리그 체제의 기형을 바로 잡아줄 팀으로 야심차게 창단됐다. 그러나 창단 당시부터 모기업인 쌍방울그룹의 재정적 허약함이 단점으로 지적됐는데 이 재정적 허약함은 쌍방울의 구단 10년사 내내 구단의 숨통을 조였다. 그리고 결국 그 재정적 허약함 때문에 야구단이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자세한 사정은 쌍방울 레이더스의 역사 문서 참조.
쌍방울은 선수 수급에도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는데 애초에 전북지역에 야구부를 운영하는 고등학교가 전주고와 군산상고 밖에 없는 상황이라[12] 신인 선수 수급도 여의치 않고 창단 당시에도 타 구단에서 전력 외로 분류됐던 선수들을 주로 받았기 때문에 팀이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었다. 어느 정도로 선수단 수준이 허약했냐면 전주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창단식 당시 팬들로부터 가장 큰 환호를 받은 사람이 코치였던 김준환이었고 나머지 선수들에 대해서는 대부분 "저 사람은 누구여? 쟈도 우리 쌍방울 팀 선수여?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디..." 정도의 수준이었다. 더구나 1990년 6월에는 훈련 이동차 전주에서 군산으로 가던 구단 버스가 교통사고를 당하면서 어렵게 받은 선수들마저도 전부 부상을 당했다. 당연히 1991년 1군 리그 첫 참가 이후 1995년까지 5년 연속으로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다.
그래도 쌍방울 레이더스 야구단은 어려운 여건을 이겨내며 조금씩 동력을 얻어 발전하기 시작했고 1995년 시즌 후 부임한 김성근 감독의 지도력과 김 감독 특유의 지옥 훈련이 빛을 발하면서 1996년부터 2년 연속 가을야구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물론 가을야구에서 상대를 꺾고 상위 스테이지로 올라가는데는 모두 실패했다. 1996년에는 플레이오프에서 현대 유니콘스와 만나서 2승을 먼저 하고도 3연패를 당하는 바람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고 1997년에는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 라이온즈에게 1승 2패를 당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모기업 쌍방울그룹이 쓰러지면서 야구단도 함께 무너졌다. 쌍방울의 대들보 역할을 했던 박경완, 조규제, 김현욱, 김기태 등 주축 선수들은 부자 구단이었던 현대 유니콘스와 삼성 라이온즈에 연달아 팔려갔고 나머지 주축 선수 중 김원형, 조원우, 심성보는 크고 작은 부상으로 고생하고 있었다.[13] 더구나 어려운 상황에서 팀을 이끌던 김성근 감독마저도 1999년 시즌 중반에 해고됐다. 그 바람에 선수단은 그야말로 누더기처럼 되어 버렸고 결국 1999년에는 독보적인 꼴찌로 떨어졌으며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구단이 해체되는 비운을 맞았다. 그리고 1999년 10월 8일[14] 이후 전주에서는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지 않고 있다.
2000년 1월 쌍방울이 해체된 이후 전주를 비롯한 전북지역 연고 야구단은 없다. 2011년 제9구단 창단 추진 과정과 2013년 제10구단 창단 추진 과정에서 전북 연고 야구단의 창단 가능성이 도모됐고 특히 제10구단 창단 추진 때는 호남을 경영 기반으로 둔 건설회사 부영그룹을 모기업으로 앞세워 전북 연고 프로야구단 창단 경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하지만 수원시를 연고지로 내세운 거대 통신기업 KT에 밀려 전북 연고 야구단 창단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지역 연고 프로야구단은 없지만 아마추어 야구단은 여전히 운영 중에 있다. 전주시 내에는 전라중학교가 야구부를 운영하고 있고 전주고 야구부도 어렵게나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이밖에 다수의 사회인 야구팀이 운영되고 있는데 전주시내에 마땅한 경기장이 없어서 군산, 익산, 임실, 완주 등으로 돌고 도는 상황이다.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은 전주종합운동장 재개발 추진을 위해 2023년 초에 헐렸다. 이 야구장의 뒤를 이을 새 야구장은 전주월드컵경기장 보조경기장 터에 지어질 예정이다. KBO는 이 야구장이 지어지면 KBO 퓨처스리그 경기를 일부 유치하는가 하면[15] 과거 해태 타이거즈가 전주에서 일부 홈경기를 치렀던 것처럼 KIA 타이거즈의 1군 홈경기 일부를 유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2.2. 농구
2.2.1. KBL : 전주 KCC 이지스
{{{#!wiki style="margin: -5px 0; display: inline-table" | <tablebordercolor=#fff,#1f2023><tablebgcolor=#fff,#1f2023> | 전주 KCC 이지스 JEONJU KCC EGIS | }}} |
전주실내체육관 |
현대에서 KCC로 소속이 바뀐 구단 프런트는 대전의 농구 열기가 생각보다 미지근했다고 판단하고 연고지를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이상민이라는 초특급 훈남 스타가 있었고 1997-98, 1998-99, 1999-2000 시즌까지 3년 연속 KBL 챔피언결정전에 진출하고 그 중 두 번은 우승을 차지했음에도 대전시내의 농구 열기가 그다지 뜨겁지 못했다고 본 것이다. 아울러 과거 농구단을 운영했던 현대전자나 새로 농구단을 맡게 된 KCC 모두 대전과는 큰 연관이 없기도 했다. 반대로 전주에는 KCC의 공장이 있었다.[16]
KCC는 2001년 전주로 온 이후 3번의 우승을 경험했다. 2003-04 시즌 우승은 신선우 감독 시절의 성과이고 2008-09 시즌, 2010-11 시즌의 우승은 허재 감독 시절의 우승이다. 2011년 우승 이후 기복이 심한 편이지만 챔피언전 5회 우승에 빛나는 명문구단이자 인기구단이었다.
다만 많은 KBL 구단이 그렇듯 연고지 정착이 온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전주 팬들의 속을 태웠다. 구단의 주소는 전주시가 아닌 서울특별시로 돼있었고 평소 훈련도 전주시가 아닌 경기도 용인시 현대인재개발원에서 하고 경기할 때만 전주에 내려오는 시스템이라 섭섭함이 컸다. 그래도 전주시민들은 호남권 유일의 프로농구단으로 남은[17] KCC 농구단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줬고 KCC의 홈경기가 열릴 때면 전주체육관이 있는 전북대학교 인근 도로가 거의 마비될 지경으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나 이처럼 폭발적인 흥행 열기를 깎아먹는 것이 있었으니 전주실내체육관의 심각한 낙후함이었다. 1973년에 지어진 전주체육관은 21세기의 프로농구 경기를 치르기에는 많이 낡았다. 관중석 의자 사이의 간격은 심하게 좁았고 선수들의 대기 공간 또한 낙후했다. 여기에 경기 당일 경기장 전기 시스템이 아예 먹통이 되면서 경기 준비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있었다. KCC 입장에서는 팬들을 위해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고 더 많은 관중들을 유치하고 싶어도 체육관 자체가 워낙 낡은 탓에 뭔가를 더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KCC는 전주시와 전라북도 측에 체육관을 새로 지어달라고 거듭 요청했지만 김완주, 송하진 등 역대 전주시장은 "우승하면 번듯한 체육관을 지어주겠다"는 공수표만 날리는데 그쳤다.
결국 이 어려움 때문에 2016년에 KCC가 수원시로 연고지 이전을 추진했으나 전주시가 새 체육관을 건설해주겠다고 약속하면서 잔류했다. 다만 시장과 구단 측이 구두로 약속한 것이기 때문에 향후 전주실내체육관을 보수 또는 개축하는 것인지 아니면 아예 새 체육관을 신축할 것인지가 미정이었다. 전주시는 2024년까지 전주월드컵경기장 인근 부지에 체육관을 신축하기로 확정하면서 2022년 3월 29일에 기공을 시작했다. 이 기공식에는 전창진 KCC 감독까지도 와서 첫삽을 뜨는 세리머니에 동참했다.
하지만 기공식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경기장 공사는 진행되지 않았고, 오히려 2022년 새로 부임한 우범기 시장이 신축 체육관 계획을 엎어버리고 야구장과 육상 경기장 건설을 우선 추진하겠다고 나서면서 지자체와 KCC와의 신뢰가 깨지기 시작했다. 전주실내체육관을 보유하고 있는 전북대학교도 2025년까지 KCC에게 경기장을 비워달라고 요구했고 전주시는 여기에 한술 더떠 "새 체육관이 지어지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듯 하니 그 기간 동안만 군산[18]에 가서 홈경기를 하면 안되겠느냐"는 기괴한 제안까지[19] KCC 구단에 내밀었다. 당연히 KCC 측은 "세상에 어느 지자체가 자기 지역의 프로 스포츠팀을 다른 동네로 내쫓는 경우가 있느냐"며 강하게 반발했다.
번듯한 새 체육관을 지어준다던 수차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전주시의 배신에 정이 떨어진 KCC는 적극적으로 연고지 이전을 검토했고 결국 2023년 8월 30일 농구단 유치에 적극적이었던 부산광역시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북은 도내 유일한 겨울 스포츠팀을 지자체의 삽질로 잃고 말았다. 우스운 건 이래놓고 전북대 체육관(낡은거) 2026년도까지 써라 2026년도에는 실내체육관 지어주겠다 했던 것. 물론 구단은 몇 번이나 속았기에 이전했고 이 일로 욕먹자 한다는 짓이 주민들에게 KCC측이 어떤 말도 없었다느니 문자나 보내고 있다.
그리고 KCC는 부산으로 가자마자 챔피언결정전에 우승하면서 전주시는 완벽하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1] 이 당시 완산의 지명을 받았던 선수가 바로 황선홍이다. 황선홍은 포항제철 아톰즈로 이적하고 그 조건으로 포철은 선수 8명을 완산에 넘겨주는 이른바 '1 vs 8 지명권 트레이드'를 단행하게 된다.[2] 현금으로 줘야 할 급여를 어음으로 지급했는데 그 어음이 부도를 맞으면서 선수단에 급여가 지급되지 않은 것이다.[3] 후원 금액이 당초 알려진 12억 원이 아니라 3억 원에 불과했음이 드러났다[4] 과거에 전주종합운동장을 홈으로 삼던 시절에는 익산종합운동장에서 홈경기를 분산 개최했다.[5] 13년간 최종순위 1-3-1-2-3-1-1-2-1-1-1-1-1-2.[6] 전북의 모기업인 현대자동차그룹이 리옹 구단의 메인 스폰서다.[7] 광주가 직할시로 승격된 것은 1986년의 일이다. 해태가 창단할 당시에는 전라남도 산하 일반시인 전남 광주시였다.[8] 해태의 원년 멤버 중 전주에서 태어나서 유년기를 보낸 사람은 김봉연 1명 뿐이었다. 김준환은 바로 옆 완주군에서 태어나 전주에서 자랐다. 그러나 둘 다 중학교부터는 군산에서 나왔다. 두 사람 이외에 김성한, 김용남, 김일권 등은 애초에 군산에서 나고 자란 선수들이었고 나머지는 광주 출신이었다.[9] 전주고 출신 최초의 프로 지명 선수는 김대현이었는데 1986년에 입단했다. 김대현의 고교, 대학 동기인 백재우도 같은 해 지명되었으나 해태에 입단하지 않고 한국전력 야구단으로 들어갔다.[10] 쌍방울을 창업한 이봉녕-이창녕 형제의 고향이 전라북도 익산군(현 익산시)이었고 이리시(현 익산시) 인화동에 속옷회사를 차렸는데 이것이 쌍방울의 모태가 된다. 야구단 창단 당시에도 이리시에 쌍방울 공장이 있어서 쌍방울을 전북의 향토기업으로 봤다. 물론 현재의 쌍방울은 과거의 쌍방울과 이름만 같을 뿐 전혀 다른 기업이다.[11] 해태 시절 전주에서 홈경기 일부를 분산 개최한 것처럼 쌍방울 시절에는 홈경기 일부를 군산 월명 야구장에서 개최했다.[12] 정읍 인상고와 고창 영선고는 쌍방울 해체 후 10년이 훌쩍 지난 2010년대에 창단됐다. 쌍방울이 있던 시절에는 정말로 전북지역에 있는 고교 야구부가 딱 2개였다.[13] 당시 쌍방울은 돈이 되는 것이 있다면 무조건 팔아치우고 있는 자산은 무조건 아껴쓰던 시절이었다. 앞서 언급한 김원형, 조원우, 심성보는 타 팀에서도 눈독을 들일 만한 기량을 갖춘 선수들이었다. 때문에 만약 이들의 몸 상태가 정상이었다면 이들마저도 타 팀에 팔려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14] LG 트윈스를 상대로 했던 마지막 홈경기인데 쌍방울이 이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시즌 17연패 사슬을 끊었다.[15] 현재 익산 국가대표 야구훈련장을 홈으로 쓰는 kt 퓨처스팀과 함평 기아 챌린저스 필드를 홈으로 쓰는 KIA 퓨처스팀의 일부 홈경기가 전주에서 열릴 가능성이 있다. 또한 춘천 의암 야구장, 울산 문수 야구장, 포항 야구장 등과 함께 퓨처스리그 중립 경기장으로 지정될 가능성이 크다.[16] 하지만 대전에서 전주로 연고이전을 할때 대전지역에서의 반발이 상당히 컸다. 이상민이 상무 전역후 합류한 대전현대의 관중 동원력도 프런트가 판단 한 것보다 상상 이상으로 잘 됐었다.[17] 원년에 광주광역시를 연고로 창단했던 나산 플라망스-골드뱅크 클리커스-코리아텐더 푸르미는 전라남도 여수시로 연고지를 옮겼다가 2003년 부산광역시로 재차 연고지를 옮겼다. 코리아텐더가 부산으로 떠난 후 호남에는 KCC만 남게 됐다.[18] 실제로 KCC가 연고지 이전을 하려 할때 군산시에서 제안이 들어왔었다. 하지만 주변 시군 배후 인구 및 월명체육관 시설문제로 불발되었다.[19] 물론 전주시는 이러한 제안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