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말콤 소프 플레밍 "잭" 처칠 John Malcom Thorpe Fleming "Jack" Churchill | |
<colbgcolor=#808080><colcolor=#ffffff> 출생 | 1906년 9월 16일 |
영국령 실론 콜롬보[1] | |
사망 | 1996년 3월 8일 (향년 89세) |
잉글랜드 서레이 | |
복무 | 영국 육군 코만도 여단 |
최종 계급 | 중령 (영국 육군) |
참전 | 프랑스 레에피네트 됭케르크 철수작전 노르웨이 베르수이 (아처리 작전) 이탈리아 시칠리아 전선 유고슬라비아 아르비아 섬 (바리크 섬 습격전) 버마 전역 |
신체 | 185cm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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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2. 생애
1906년 영국령 실론에서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영국 본토로 간 후 아버지의 근무지 변경으로 홍콩에도 간 뒤 청소년이 되자 맨 섬의 킹 윌리엄 칼리지(King William's College)[2]에서 공부했다. 1926년 샌드허스트 육군 사관학교[3]를 졸업했고 버마에 있는 맨체스터연대(Manchester Regiment)에서 근무했다. 1936년엔 예비역 대위로 군을 떠나 신문사 편집자로 일했다. 활과 백파이프를 다룰 줄 알아 1924년 영화 바그다드의 도둑(The Thief of Bagdad)에 해당 재능으로 출연하기도 했지만 이 재능은 좀 더 넓은 무대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다.2.1. 제2차 세계 대전
클레이모어를 들고 상륙하는 그의 모습 원본 사진 |
검을 패용하지 않고 출전하는 장교는 모두 복장 불량이다.
Any officer who goes into action without his sword is improperly dressed.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평범한 영국군 장교지만 그가 유명한 이유는 상상을 초월하는 기행 때문이다. 이미 소총이라는 개념이 잡힌지 반세기도 넘어간 시대의 전쟁에서 활과 클레이모어[4]만 가지고 싸웠다.Any officer who goes into action without his sword is improperly dressed.
전장에서 그의 무장은 웨일스가 원산지인 롱보우와 스코틀랜드의 검인 클레이모어[5]였다. 그나마 수류탄 정도는 사용하긴 했지만 문제는 아예 무기조차 아닌 백파이프도 들고 갔고 총알이 오고가는 전투 중에 대놓고 연주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시대를 몇백 년은 거스른 장비에 시끄럽기론 두말하면 서러운 악기까지 불어재끼는 죽고 싶어 안달난 행동거지와 달리 그의 싸움 실력은 대단했고 또 굉장히 호전적이었다고 한다. 덕분에 붙은 별명이 "싸움꾼 잭 처칠(Fighting Jack Churchill)"과 "미치광이 잭(Mad Jack)"이었다. 얼마나 유명했는지 적군도 잭을 보고 미친놈이라고 보고했을 지경이니 말 다했다.
1939년 9월에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군은 예비역을 재소집했고 그는 1940년 5월에 프랑스로 파견되어 맨체스터 연대에 배속되었다. 이후 레에피네트 근처에서 독일 정찰대를 습격했다. 이때 자기 부대한테 공격신호를 어떻게 내렸냐면 독일 국방군 병장을 권총도 아니고 화살로 맞히는 것으로 내렸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활로 적을 사살했다고 알려진 기록은 그가 유일하다. 당시 그의 부대는 탑에 숨었는데 독일군이 나오자 제일 먼저 나온 병사를 쏘았다고 한다.[6] 됭케르크 철수작전 후에 그는 영국 육군의 특수부대인 코만도에 지원했다.
1941년 12월 27일에 베저위붕 작전으로 독일의 국가판무관부가 되어 버린 노르웨이의 베르수이에 주둔한 독일군을 공격해[7] 수류탄을 던져 무공을 올렸다. 더욱 놀라운 건 작전을 수행하기 전에 백파이프로 카메론 사내들의 행진(March of the Cameron Men)이란 곡을 연주한 것이다. 하는 짓은 죽고 싶어 안달났는데 기묘하리만치 다치는 일 없이 무사히 작전이 성공했다.[8] 이 일로 그는 무공십자훈장(Military Cross)을 받았다.
1943년엔 지휘관으로 소총수 한 명을 데리고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 전선에 참전했는데 이때 허리에는 클레이모어를 차고 등에는 장궁과 화살을 매고 손에는 백파이프를 들었다. 그 결과 적에게 항복을 종용해 포로 42명을 잡았으며[9] 이 즈음 그는 이미 전 유럽 전선에서 대검호로 명성이 자자했다.
1944년엔 유고슬라비아 전선으로 갔는데 비스 지역의 아드리아 섬에서 주둔 중인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끄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당원의 부대와 협조했다. 5월이 되어서야 그는 독일에게 점령된 바라크 섬을 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이때 그는 파르티잔 약 1500명을 백파이프로 지휘했다. 슈퍼마린 스핏파이어의 공중지원을 받으며 전투하다 밤을 기해서 철수함으로써 전투 첫날이 무위로 돌아간 다음 날 파르티잔은 빼고 자기 휘하의 영국군 40명만 끌고 갔는데 박격포 공격을 받으면서 열세에 몰리자 백파이프로 '다시 안 돌아올 거야?(Will Ye No Come Back Again?)'를 연주하고 수류탄에 맞아 정신을 잃은 뒤 포로가 되어 베를린에 끌려갔다.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두 번 기도하여 두 번째[10]엔 성공하여 영국군에 합류하고 버마 전선으로 배속되었다. 그는 일본군과 몹시 싸우고 싶어했는데[11] 그가 인도에 도착할 무렵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전쟁이 끝났다. 그는 양키 놈들이 전쟁을 끝내 버렸다며, 아직 10년은 더 싸울 수 있었다며 몹시 아쉬워했다.
2.2. 그 후의 행적
1952년엔 20세기 폭스의 영화 아이반호(Ivanhoe)에 활 쓰는 인물로 나왔다. 팔레스타인에 가 근무하기도 했고 호주의 공지전학교(land-air warfare school)에서 교관으로 근무했다. 1959년에 전역했다. 최종 계급은 중령.이후에도 그의 기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는데, 매일 일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열차에서 항상 서류 가방을 창문 밖으로 던지며, 같은 객차내의 승무원들과 승객들를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후에 진술하기로는 가방을 자택 정원에 던져놓아서 역에서 집까지 가는 동안 들고 가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 그리고는 템스 강에서 증기선을 몰거나, 서핑 보드를 즐겼으며, RC 군함을 만들고 수집하기도 했다. [12]
각종 다큐멘터리와 자녀들한테서 자신의 무용담도 들려주다가 1996년에 서리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3. 여담
- 그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활잡이로 유명했기 때문에 시중에 관련 피규어도 있다.#
- 오토 스코르체니가 자기 자서전에서 윈스턴 처칠의 아들이 유고슬라비아에서 포로로 잡혔다는 기술을 한 바 있는데 윈스턴 처칠의 아들 랜돌프 처칠은 2차 세계대전에서 포로가 된 적이 없다. 랜돌프가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인 티토의 지휘부에서 활동을 한 적은 있으나 포로로 잡히지 않고 무사히 귀환했다. 성이 같은 잭 처칠이 포로가 된 사실을 혼동한 듯하다. 참고로 잭 처칠과 윈스턴 처칠은 성만 같을 뿐[13] 아무런 연관이 없다. 뭐 다르게 착각할만한게 윈스턴 처칠의 동생으로 다른 잭 처칠(본명은 존 스트레인지 스펜서-처칠(1880생–1947몰) 이지만 이쪽도 별칭으로 잭으로 불렸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 존 스트레인지 처칠의 딸인 안나 클라리사 스펜서-처칠이 앤서니 이든의 두번째 부인(앤서니 이든이 총리일때의 부인이기도 함)이 되었다.)이 있었다.
- 그가 전쟁 당시 보여준 여러 기행에 대한 언급이나 목격담은 아군은 물론이고 주적인 독일군에서도 백파이프를 연주하는 그를 목격한 것을 증언한 바 있어서 교차검증이 되어 있다. 이때 잭을 쏘지 않은 이유는 아무리 봐도 미친놈같아서였다고 한다. 이 부분은 단순히 웃어넘길 이유는 아니다. 당연하지만 모든 전투에서 우선 제거 순위는 자신에게 위협이 될 화력이 있는 무장한 전투 요원이다. 공격해오지 않는, 그것도 비무장 요원들을 굳이 먼저 공격하는 건 전투원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낭비하는 거다. 그것도 백파이프 불면서 검 들고 돌격하고 앉은 놈은 더더욱. 간단히 생각해 보면 당신을 총으로 겨누면서 달려오는 적이랑 칼 들고 달려오는 적 중 누굴 먼저 쏘고 싶은가? 당시 전투가 너무 참혹해 정신줄을 놓거나 미쳐서 기행을 벌이거나 총기도 버려놓고 아예 죽여줍쇼 하고 엄폐물도 없는 전장을 터벅터벅 걸어다니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대충 그런 부류로 생각한 듯 하다. 실제 개인의 병사로 보기에 잭 처칠의 행동은 완벽하게 미친놈으로 보였을 것이다. 다른 병사들은 총 쏘면서 돌격하는데 혼자 백파이프를 불고 있으니 돌아 버렸다고 본 듯하다. 물론 이 양반은 미친 게 아닌 제정신으로 돌아다니며 그런 기행을 저지른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불고 다니던 백파이프부터가 소리가 제정신이 나가버린
음파병기악기인지라[14] 오해할 만도 하다.
- 사람들이 농담 삼아 부르는 별명은 바로 라스트 하이랜더. 게다가 그가 쓰던 검의 원산지가 스코틀랜드이기도 하고.
스리랑카 출신인데
- 이 사람 말고도 정신나간 듯한 기행을 선보이던 특수부대원이 같은 시기 영국군에 더 있었는데 앨리슨 “딕비” 태덤와터 (Allison Digby Tatham-Warter)라는 이름의 공수부대 장교로 자신은 영국 신사라면서 군모 대신 중산모를 쓰고 우산을 휘두르며 그걸 가지고 전과를 올리고 돌아다닌 더한 괴인이다.[15][16] 심지어 잭 처칠처럼 매우 잘 싸워 본인 중대의 수송기가 엉뚱한 곳으로 오는 바람에 몇 킬로미터를 이동해야 하는 상황이 된 적이 있는데 이때 독일군 정탐대를 모조리 회피하고 그 중 독일군 중대 2개와 교전하여 150명을 무장 해제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며 이후 독일군 기계화부대를 포착해 기습하는데 이때 장갑차 운전석을 우산으로 찔러 운전병을 기절시켜 제압했다. 그러나 독일군 추가병력이 오면서 생포되는데 이미 부상을 입은 상태라 독일군이 그를 야전병원에 입원시킨 틈을 타 빤스런을 시전했다(...). 근데 이 빤스런 중에도 비범하게 나치 장교의 차가 도랑에 빠진 걸 빼내는 걸 도와주고 빵을 얻어먹는 흠좀무한 기사도 정신을 보여줬다(...).
[1] 현재의 스리랑카.[2] 미국에선 보통 대학교를 College라고 하는 경우가 많지만 영국에선 College=대학이 아니다. 킹 윌리엄 칼리지는 3세부터 18세까지의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사립 중등교육 기관이다.[3] 4년제 대학인 미군이나 한국군의 사관학교들과 달리 영국군의 사관학교는 군사교육 위주 훈련을 1년 미만으로 수료케 한다. 따라서 대학이 아니기 때문에 학위를 수여하지도 않는다. 한국에서 전문학사나 그에 준하는 학력을 갖추고 편입하는 육군3사관학교와 간부사관, 학사사관을 짬뽕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4] 대인지뢰 클레이모어가 아니라 검의 한 종류인 클레이모어이다.[5] 가장 많이 혼동되는 부분으로, 흔히 알려진 양손검이 아니라 바스켓 힐트 브로드소드다. 클레이모어 문서 참조.[6] 나중에 잭 처칠 본인이 밝힌 바에 따르면 활이 트럭에 부딪혀 부서진 게 와전된 거라고 한다.[7] 작전명이 하필 활 작전(Operation Archery)이었다.[8] 이 작전에서 그는 작전 참여요원 중에서 차선임 지휘관이었다. 570명이 참여한 작전에서 서열 2위인 지휘관이 백파이프 불면서 진격해 수류탄을 투척한 것. 여간 미친놈이 아니다[9] 이 어이없는 전과에 상부에서도 "대체 어떻게 잡았냐"고 묻자 잭 처칠은 "칼 들고 따라오라고 했더니 따라왔다"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당연히 남들 총들고 다니는데 혼자 활이랑 칼들고 싸우는 소드마스터께서 항복하라는데 항복해야지[10] 첫 번째 시도에선 발트 해까지 걸어갔는데 해안에 이르기 전에 잡혔다.[11] 이유가 가관인데 일본군이 쏘라는 총은 안 쏘고 칼을 들고 우르르 몰려온다는 이야길 듣고 이제야 전사답게 제대로 진검 승부를 할 수 있겠다며 매우 기뻐했다. 만약에 처칠과 일본군이 격돌했다면 클레이모어와 카타나가 맞붙는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진검승부가 펼쳐지거나, 당시 양측 군대의 보급 및 병사의 영양 상태를 감안하면 진검승부를 넘어 삼국지에서나 나오던 일기당천의 무쌍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12] https://web.archive.org/web/20130917135443/http://www.wwiihistorymagazine.com/2005/july/col-profiles.html[13] 심지어 윈스턴 처칠의 본가는 스펜서-처칠, 즉 스펜서 가문으로 잭 처칠의 가문과는 아무 연관이 없다.[14] 이게 소리가 어느정도냐면 122dB로 확성기와 기차 소리보다도 더 크며 웬만한 소음들보다 더 크다로 설명 가능하다.[15] 잭 처칠은 최소한 철모는 썼고 무기도 일단 살상용인 검과 활을 들고 싸웠으나 이 양반은 상술했듯 실크햇에 우산을 들고(...) 적을 죽였다...[16] 참고로 워털루 전투에 참전했다 전사한 토마스 픽튼 중장도 신사 정장에 실크햇을 쓰고 지휘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중장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닌 그냥 급하게 소집되는 바람에 군복을 못 챙겨와서 할 수 없이 그렇게 한 것이라 비교 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