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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15:36:00

장훈(야구인)/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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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목록3. 성격4. 오른손 장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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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훈 관련 여담을 정리한 문서.

2. 목록

파일:터질 듯한 이 가슴을.png
* 장훈이 현역 말기에 접어들던 1979년 11월, 장훈의 전기 영화 터질듯한 이 가슴을이 개봉되었다. 이상언이 감독했고 이동진(장훈 역), 하명중(장훈의 형 역), 김애경(장훈의 어머니 역) 등이 출연했으며 장훈 자신과 왕정치, 나가시마 시게오도 특별출연 했다.

3. 성격

재일 한국인으로서 차별을 많이 받아서인지 성격이 거칠기로 유명하다. 실제로 고교시절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싸움꾼으로도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도 인터뷰에서 "형님은 제가 야구선수가 되지 않았다면 야쿠자가 될 줄 아셨다"라고 말하기도. 그렇지만 자신은 그럴 근성이 없어서 프로야구 선수가 되지 못했다면 아마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덤프트럭 운전기사나 형을 따라 택시 기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했다.

장훈의 불같은 성격과 관련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일본 최고의 포수로 꼽히는 노무라 카츠야트래쉬 토크의 대응이 바로 그 예이다. 포수가 타석에 들어선 타자에게 "너, 새벽에 긴자에서 홈런 세 방 쳤다며?[10] 다리 후들거려서 타석에 설 수나 있냐?", "어젯밤 네 마누라 어떤 남자랑 술먹고 계시더라", "요새 모 술집 아가씨랑 새살림차렸다며?", "너 요새 선배들한테 인사 안 하고 다닌다며? 선배들이 널 단단히 벼르고 있더라" "어? 너 타격폼이 완전히 망가져 있네" 등의 음담패설, 욕설이나 주의력을 산만하게 만드는 말을 지껄이며 타자의 집중력을 흐트러뜨리는 것을 트래쉬 토크라 하는데[11] 노무라는 특히 음담패설이나 농담 따먹기나 주의력을 산만하게 하는 헛소리를 남발하는 수법을 쓴다고 한다.[12]

노무라는 트래쉬 토크 전술이 통하지 않았던 타자로 세 명을 꼽았는데, 그 세 명이 바로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그리고 장훈이었다고 한다. 오는 처음부터 끝까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나가시마는 오히려 웃으면서 더 심한 음담패설로 맞받아 쳤으며, 장훈은 노무라를 향해 눈을 부릅뜨며 욕설을 퍼부었다고. 하지만 어느 날은 장훈도 노무라의 야유에 결국 참을 수 없었는지 일부러 크게 헛스윙을 하는 척 하면서 배트로 노무라의 뒤통수를 갈겨버렸고, 이때 된통 혼이 난 노무라는 그 후로 장훈의 신경을 긁는 짓을 그만두었다고.[13]

은퇴 후 정식 코치, 감독으로 일한 적이 없는데 한국 국적자인 그를 각 구단들이 지도자로 데려오기 꺼렸으리라는 추측도 있으나 사실 그는 몇몇 구단에서 코치, 감독 제의를 받았었다고 밝혔다[14].

2017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밝히길 일본에서 세 차례, 한국에서 한 차례 감독직 제안을 받았었다고 한다. # 롯데 신격호 회장이 "너 언제 일본 롯데 감독할 거냐"라고 혼내기까지 했다는 증언을 봐서 롯데 오리온즈가, 그것도 회장 본인이 나서서 감독직을 주려고 했던 것이 유력하다. 여담으로 돌아가신 어머니가 아내에게 절대로 감독하는 것은 말리라고 했다고 한다. 지기 싫어하는 성격 때문에 분명 죽을 거라며(!) 걱정했다고. 장훈 스스로도 감독보직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또한 나가시마, 오 같은 스타 출신도 감독 경력 초반부엔 자질 부족이라고 욕만 들어먹었던 것을[15] 생각하면 한국인인 자신이 지도자가 되었을때 일본인들의 더 심한 비난과 인격모독을 받으며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의 친지들도 격한 성격을 가진 그가 지도자에는 별로 맞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입장을 내세웠다고 한다. 게다가 이미 팔순을 넘긴 고령인지라 앞으로 지도자로 부임할 확률은 더욱 희박해질 듯 하니 아쉬운 일이다. 하지만 은퇴 후 40여년 간 줄곧 야구 평론가로 활동하며 방송에서의 입담이나 칼럼의 필력은 선수출신 평론가 중에서 으뜸이라는 평이다.

한국 프로야구의 초창기에 KBO 각 팀에 재일동포 선수들을 이어주는 등[16] 여러 공헌을 했지만, 한국 프로야구가 성장했던 1990년대에도 1980년대 수준으로 생각, 3군 수준의 퇴물을 소개해줘서 각 구단의 프런트들로부터 욕을 먹기도 했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로 1990년대 초반 그가 "괜찮을 것" 이라고 소개해서 한국팀에 입단했던 여러 명의 재일교포 선수들은 거의 활약을 못하고 방출되었다.

프리미어12의 결과에 대해서는 일본이 오타니를 완투시켰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며 고쿠보 히로키 감독의 안이함을 지적했고, 김인식 감독의 인내력을 칭찬했다.[17]

4. 오른손 장애

파일:external/bm.gametree.co.kr/zmxd4hmt.jpg 파일:external/bm.gametree.co.kr/dtrsnqug.jpg
문서 상단의 영상 캡쳐 2006년 3월 5일. 도쿄돔에서 열린 WBC 아시아라운드 1, 2위전에 참석한 장훈의 오른손.

오른손에 화상으로 인한 장애를 가지고 있다. 사진을 보면 오른손의 엄지가 바깥쪽으로 휘어져있고, 새끼손가락과 넷째손가락이 붙어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 오른손을 누구에게도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왼손으로 가리거나 뒷짐을 지고, 식사할때도 오른손은 항상 탁자 밑으로 숨긴다고 한다.[18] 손을 보여주지 않는 이유는 1959년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 리그 신인왕을 수상한 후 온 가족이 히로시마에 새로 지은 집에 모여 식사하던 중 장훈이 "이 오른손이 멀쩡했다면 성적이 좀 더 좋지 않았을까?"라고 혼잣말을 했는데 그 말을 들은 어머니 박순분 여사가 "저 어린 것을 혼자 내버려 뒀다가 손을 다치게 만들었으니, 나도 참 나쁜 어미다"라며 펑펑 눈물을 흘렸고, 그 일을 계기로 장훈은 다시는 남에게 오른손을 보이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야구인 중 가장 존경하는 대 선배 카와카미 테츠하루에게만 유일하게 자신의 오른손을 보여준 적이 있는데, 카와카미는 "엇" 하며 놀라더니 "그런 손으로 어떻게..."라면서 말문이 막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 토에이(東映)가 제작 발매하는 렌탈 전용의 영화.[2] 이나가와카이 초대 회장 이나가와 세이죠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3] 백인천은 장훈을 '장이형'이라고 부른다.장형도 아니고 훈이 형도 아니고[4] 1932년생 으로 선수 등록명은 블룸. 미국 마이너리그를 거쳐 킨테츠 버팔로즈(1960~1964), 난카이 호크스(1965~1966)에서 활동했고 1962, 1963년 2년 연속 퍼시픽리그 타격왕을 수상했다.[5] 여기서도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애초에 4타수 3안타를 치면 기록을 경신하는 줄 알고 있던 장훈은 이날 경기에서 3타석만에 3안타를 치고 1루에서 만세를 불렀지만, 팀 선배인 부스지마 쇼이치가 달려와서 "계산을 잘못했다. 안타를 하나 더 쳐야한다" 라고 알려주는 바람에 김이 샌 장훈은 다음 타석에서 범타로 물러났지만 기어이 마지막 타석에서 기습번트를 성공시키면서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6] 다만 이와는 별개로, 위의 통산성적에서 보듯이 선수생활 동안 번트를 잘 대지 않았기에, 통산 번트는 고작 4개뿐이다.(2개 이상 댄 시즌도 없다.) 심지어 번트를 처음 댄 때가 프로 15년차인 1973년이니 말 다했다. 다만 통산 번트가 4개라는 건 희생번트가 4개라는 말이다(기습번트가 성공하면 기록상 내야안타가 되고 번트로는 기록되지 않는다). 장훈은 도에이 시절엔 팀의 주포였기에 희생번트를 거의 대지 않았고 요미우리에 가서도 감독의 희생번트 지시는 거의 안 받았다. 대신 기습번트는 많이 시도해서 성공율이 높았기에 1995년 한일 슈퍼게임 현장에서 전준호에게 기습번트 요령을 알려주면서 "나의 타격왕 7회의 비밀 중 하나는 기습번트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타율 0.383을 기록한 1970년에는 21번 기습번트를 시도해서 20번 살아나가기도 했다.[7] 장타력이 있는 호타준족의 선수가 기습번트까지 능하다면 상대는 미칠 노릇이다. 수비를 전진 배치 하면 장타를 노리고, 수비를 후위에 넣으면 기습번트를 대 버리기 편하기 때문이다. 장훈은 개인 성격은 불같았지만 타격에 있어서는 철저히 냉정하고, 상황에 따라 매우 실용적으로 배팅했던 선수 였기에 살아나가기 좋은 무기를 손에 넣기 위해 더 더욱 열심히 연습했을 지도.[8] 한국명 김경홍. 일본으로 귀화. 롯데 감독을 역임했으며 일본 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400승 투수.[9] 1990년대 중반 호크스는 비밀번호나 찍던 막장팀 중에 하나였다. 연패를 밥먹듯이 하던 그런 팀의 감독으로 고생한 오 사다하루에게 공개사과를 받아내려고 했으니...[10] 밤동안 내내 섹스했냐며 까는 거다.[11] 국내에서는 이만수진갑용도 현역 시절 특유의 입담으로 선후배, 동기 안 가리고 농락한 것으로 유명하다.[12] 거친 말보다는 이렇게 쓸데없는 말로 정신 집중을 방해하는 것을 일본에서는 속삭임 전술(ささやき戦術)이라고도 한다. 가짜 데드볼 조작으로 악명 높았던 타츠카와 미츠오 또한 이런 속삭임 전술에 능했다고 한다.[13] 노무라 본인은 책 「プロ野球重大事件 誰も知らない”あの真相”」(프로야구 중대사건 아무도 모르는 "그 진실")에서 이 이야기는 거짓말이며 "장훈에게 속삭임 전술을 걸면 장훈이 너무 섬세하게 배터 박스에서의 위치를 조절하는 바람에 시합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서 그만뒀다"라고 말했다. 안 통했던 것은 사실인 모양이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14] 한때 빙그레 이글스 감독설도 있었지만 무산됐는데 공교롭게도 1986년 이 팀에서 뛴 장훈은 본인의 이름과 한자가 똑같았다. 대신 도에이 시절 동료인 이와시타를 타격코치로 추천했다.[15] 나가시마는 감독 첫 시즌인 1975년 요미우리의 사상 첫 리그 꼴찌란 치욕을 당한 데다 그 뒤에도 세리그 우승 2번 빼곤 좋은 성적을 얻지 못했고, 절친 오도 교진 감독 기간에 세리그 우승 1번만 기록했다. 거기다 다이에 감독 초기의 리빌딩 시절엔 화난 팬에게 날계란 투척사건도 당했고.[16] 장명부, 김일융, 이영구, 주동식, 김무종, 홍문종 등이 이 시기 모국 팀으로 입단한 재일교포 선수들이다. 이들은 당시 야구선수로서는 고령 축에 속하던 20대 후반~30대 초반의 나이에 모국으로 왔지만 나이를 무색케 하는 실력으로 리그를 평정했다. 장명부는 전인미답의 기록인 시즌 30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았고 김일융은 한국인 후배 김시진과 원투펀치를 이루며 1985년 삼성의 전후기 통합우승을 견인했으며 주동식과 김무종은 1983년 해태의 첫 우승을 이끌면서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 홍문종은 1984년 시즌 타격왕을 할 뻔 했지만 당시 홍문종을 상대했던 삼성이 9타석 연속 고의사구를 시전하며 홍문종의 타격왕 등극을 저지한 바 있다.[17] 고쿠보는 장훈의 요미우리 직속후배이다.[18] 고정 출연하는 방송에서도 왼손을 오른손 위로 감싼다던가 오른손을 오므린 상태에서 손등만 보여주는 등 최대한 손바닥 쪽이 보이지 않게 가린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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