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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6-07-20 14:45:51

장윤정(트로트)


1. 소개2. 음반 활동3. 데뷔 전4. 커리어
4.1. 행사의 여왕4.2. 1~4집4.3. 노홍철과의 열애4.4. 도경완과의 결혼
5. 장윤정 친족 재산탕진 논란6. 기타7. 논란

1. 소개

제20회 MBC 강변가요제 대상
안문식
나와 같은 눈물을 흘릴거야
(1998)
장윤정
내 안의 너
(1999)
시너지
그녀의 여름
(2000)
파일:attachment/jangyngjng.jpg
이름 장윤정(張允瀞)
출생 1980년 2월 16일, 충청북도 충주시
신체 168cm, 48kg, B형
학력 서울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데뷔 1999년 제20회 강변가요제 대상
가족 배우자 도경완, 아들 도연우
소속 코엔스타즈[1]
종교 불교

2. 음반 활동

구분 앨범명 대표곡
1집 어머나! 어머나
2집 짠짜라 짠짜라
사랑아
싱글 [2]
2.5집 장윤정 Special Remake 콩깍지
3집 이따, 이따요 이따, 이따요
어부바
첫사랑
4집 장윤정 트위스트 장윤정 트위스트
애가타
싱글 애원 애원[3]
5집 올래 올래[4]
초혼
6집 장윤정 10주년 앨범 왔구나 왔어
싱글 블란서 영화처럼 블란서 영화처럼
7집 女子 반창고
오! 마이 러브[5]

3. 데뷔 전

1남 1녀 중 장녀로, 집안이 궁핍해서 대학 시절 난방비가 없어서 헤어 드라이어로 이불을 데워서 겨울을 이길 정도로 엄청 어렵게 살았다. 이때 학자금을 대출받으러 은행에 갔다가 부모가 진 부채때문에 자신도 신용불량자인 사실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정말 처절하게 울었다.[6][7] 토크쇼에서 언급할 정도로, 본인이 크게 상심했다. 1999년 강변가요제에서 '내 안의 넌' 으로 대상을 받았지만 가수로 데뷔하는 과정은 어려웠다. 첫 공식 방송 무대에서 너무 떨었다.[8] 기획사에 들어가서도 음반을 낼 돈이 없어서 단역 배우로 활동했다.[9] 실제로 '어머나' 로 뜨기 전까지인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 초반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10] 나 '사랑과 전쟁' 등에서 단역을 전전했다. 이 시절 모습은 현재도 종종 케이블에서 나온다. 본인도 이것 때문에 돈을 밝혔고, 그래서 쉽게 갈 수 없는 트로트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결국은 크게 성공했다. 다만 너무 상업성만 노렸다고 질타해서 이후 노래는 같은 트로트지만 스타일을 바꾸었다.

4. 커리어

4.1. 행사의 여왕

전국 각지에서 개최하는 행사에 출연하려고, 1년에 10만㎞ 정도를 돌아다닌다고 한다. 참고로 개인택시도 1년에 5만㎞ 정도를 주행하는 일이 드물다. 모 토크쇼에서 MC몽을 능가하는 '하루 8회 행사' 경험을 이야기해 주변이 깜짝 놀랐다. 때문에 인터넷상에서 장윤정 몸값을 추정하면, 사실상 1년에 행사로만 100억 원 정도를 번다고 추측할 정도다. 그래서 1년 기름값은 억대, 교통 법규를 어겨서 내야 하는 과태료가 일곱 자리라는 썰도 있다. 예전에 이동할 때는 차를 이용했지만, 나중에는 비행기로 이동한다고 했다. 비행기로 이동해서 남는 시간에 다른 행사를 더 참여하는 게 더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장윤정 본인은 '자신의 노래는 시골 장터에서 시작했으며, 자신의 노래를 듣고싶어하는 이들을 위해 현재까지도 전국을 돌아다닌다'는 신념을 밝히기도 했다. 사실 장윤정 급의 가수라면 폼나게 공연장에서 공연하는 것이 몸도 편하고 수익도 더 되는 것은 당연한 일.

4.2. 1~4집

2004년 '어머나' 로 데뷔했는데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11] 트로트는 중장년층만 부른다는 편견을 깨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최초 사례다. 서태지가 음악시장을 재편한 이후로 태진아의 '사랑은 아무나 하나', 김수희의 '애모', '남행열차', -김혜연의 '참아주세요'-[12] 등 전세대를 아우르는 트로트 히트곡이 없었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20대 초반 여가수가 본격 트로트로 데뷔하고 크게 성공한 것은 장윤정이 처음. 블루 오션 개척 사례로 경영학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왠만한 아이돌 가수보다도 크게 성공했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인 2008년도 JYP, YG, SM은 모두 적자였다.

이후 '어머나' 로 쌓은 인지도로 2집 '짠짜라'와 3집 '이따이따요', 4집 '장윤정 트위스트'를 냈다. 진짜 적자를 낸 음반이 없다. 음반을 판매한 수량은 둘째고, 보통은 특정 세대만 기억하는 다른 가수들과는 달리 거의 모든 세대가 자기 노래를 기억하는 건 엄청 드문 일이다. 간드러지는 음색 자체가 트로트랑 적합하고, 넉살 좋은 이미지는 중장년~노년, 심지어는 10대까지 아울렀다.

4.3. 노홍철과의 열애

2007년부터 슬슬 게스트로서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했다. 일단 우리 결혼했어요 파일럿으로 출연했으며, 그 후 각종 방송에 조금씩 출연 횟수를 늘리면서 '골드미스가 간다'는 고정 출연한다. 원래부터 장윤정한테 끈질기게 구애했던 노홍철이 프로그램 내에서 진행한 맞선을 망치자, 그를 위로하려고 맥주를 마시다가 사귀었다고 말했다. 다만 본디 이렇게 커플이 나오면 '싱글에게 짝을 찾아주는' 프로그램인 '골드미스가 간다' 특성상 하차할 가능성이 농후했지만, 하차하지는 않고 역할을 바꾸어서 노홍철처럼 러브 메신저로 활약했다. 사실상 이 프로그램이 배출한 커플이라서 제작진도 좋게 봐줬다.

2009년 12월 28일자 연예 플러스에서 노홍철이랑 자기 관계를 언급했는데, 아직은 서로를 알아가는 단계라고 실토했다. 자기가 힘든 걸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직설적인 성격은 좋아하지만, 노홍철이 보여주는 괴이한 패션 센스는 안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 중에서도 레깅스를 입은 모습은 딱 질색이라고 표현했다. 그래도 연인 취향을 존중해서 구박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2010년 3월 9일부터 노홍철과 결별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본인은 성격이 달라서 헤어지지 않았다고 했으나, 무한도전 뉴욕편에서 장윤정이 쓴 편지에서 '너무 성격이 여리고 나한테 기대려 하는 연두부 같은 사람이라 힘겹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2012년 10월, 장윤정은 노홍철과 헤어진 진짜 이유는 그때 본인을 둘러싼 스캔들 때문이라고 이실직고했다. 그 때문에 헤어진 이후 에피소드를 들어보면 노홍철보다 장윤정이 더 힘들었다. 돌아보면 동료 때문에 전재산을 날린 남자와 가족 때문에 전재산을 날린 여자가 연애하고 있었다

4.4. 도경완과의 결혼

2013년 일본에서 발표한 2집 타이틀 곡인 '最期の川' 로 일본 유선방송 엔카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다. 해당 곡은 한국에서 발매했던 '초혼'의 번안곡으로, 기존 장윤정표 트로트와는 조금 다른 애절한 곡이다.

2013년 4월, KBS 소속 도경완 아나운서와 2013년 9월에 결혼한다고 발표했다. 2013년 5월 8일 혼인신고를 해 법적인 부부가 되었으며, 예정보다 빠른 2013년 7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이를 밝히면서 어머니와 남동생이 장윤정이 10년 간 벌어온 돈을 탕진했으며 오히려 빚만 남아있는 상황이라는 것이 밝혀지며 충격을 주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2014년 6월 13일 도경완 아나운서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출산했는데 6월 22일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스페셜 방송으로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까지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고 했다. 물론 장윤정 친정 쪽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보여주지 않고 도경완 친가만 보여준다고 했다. 도경완의 부모님이 이로써 최초로 방송에 공개되는 셈. 8월 10일 방송을 끝으로 하차했다.

2006년 '만화로 풀어가는 스타고백' 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을 때부터 데뷔하기까지 파란만장했던 인생이 만화로 보여지기도 했는데, 상위 논란들을 생각한다면 더욱 안타까워지는 이야기가 된다.

2014년 8월, 소속사였던 '인우기획'이 갑작스럽게 폐업하게 되면서 무적(無籍)상태가 되었다.[13] 장윤정의 계약기간은 이미 만료된 지 오래였지만, 데뷔 때부터 함께 해 왔으니 당연히 함께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본인은 충격이 매우 컸던 듯. 이후 많은 소속사들이 러브콜을 보냈으나, 도전1000곡과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함께 출연한 이휘재가 소속된 '코엔스타즈'와 계약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코엔스타즈와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했다. 관련기사.

2015년 발표한 7집 앨범의 타이틀곡 '반창고'가 다시 대박을 내면서 성공적인 복귀를 마쳤다. 타이틀곡 선정 능력으로는 따라갈 사람이 없는 듯.

5. 장윤정 친족 재산탕진 논란

해당 항목 참조.

본인이 잘못한 것이 아니며[14] 오히려 피해자이므로 논란중 인물 틀은 달지 말 것.

6. 기타

장윤주와 목소리가 상당히 비슷하다. 백지영처럼 웃음소리가 엄청 크다. 으학학학학학!! 그리고 그들을 따라가는(?) 후배 가수가 있다.

이휘재도전 1000곡 MC를 맡았다. 진행력은 역대 여자 MC들 중에서 가장 우수하지만,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것보다는 무대에서 진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까부는 스타일에 약간 호불호가 갈리긴 한다. 프로그램 성격과 잘 어울리고, 그런 진행 스타일을 선호하는 해외 동포를 비롯한, 장년층이 선호하는 프로그램이다보니 좋아하는 쪽이 더 많았다. 이따금씩 왕중왕전에서 있는 패자부활전에서 노신(노래의 신)으로 나와 게스트들과 대결했는데, 짬밥 자체가 허풍이 아닌 걸 여실히 증명했다.

데뷔 초와 2012년을 비교하면 창법이 변화했다. 데뷔 초에 불렀던 '어머나' 하고 '짠짜라' 의 경우에는 발음이 굉장히 또박또박한 편이었고 포인트에서 잠깐씩 쥐어 짜는 듯한 창법이었다. 이후에는 콧소리가 많이 들어가고 바이브레이션을 많이 넣으면서 발음을 자연스럽게 흘러가듯이 발음하는 것으로 바뀌었다.[15] 좀 더 말하자면 확실히 부를 때 좀 더 간드러지게 변했다. 본인 스스로가 일부러 창법을 바꾸었는지, 아니면 가요계에 몸 담은 지가 꽤 되어 자신의 노래를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게 되어서 기교 형식으로 그렇게 된 건지는 미지수. 이러한 창법의 변화에 대해서는 주 고객층인 중장년, 어르신들 사이에서 약간 호불호가 갈린다.

장윤정 본인이 이미 라이브를 엄청나게 많이 하는 가수인 데다가 데뷔 10년이 넘었으니, 아무리 성대가 튼튼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 나갈 것이다. 이 창법은 목에 상대적으로 무리가 덜 가는 창법이라 바꾼 듯 하다.

동명이인의 미스코리아와는 2016년 7월 12일솔깃한 연예토크 호박씨에서 실제로 만났다.

7. 논란


[1] 과거 소속은 인우프로덕션으로 트로트SM엔터테인먼트였던 대형 기획사였다. 하지만 경영난과 내부사정 때문에 결국 2014년 8월 11일에 완전히 폐업했다. 기사. 그 해 8월 13일 코엔스타즈와 계약했다.[2] 2집에 실린 곡을 재편곡. 흔히 알려진 편곡은 이쪽이다. 홍진영의 '산다는 건'이 표절의혹을 받고 있기도 하다.[3] MBC 드라마 사랑해, 울지마 OST. 최초로 발표한 정통 발라드곡이다.[4] 이정현의 'Summer Dance' 표절 의혹이 있었다.[5] 최초의 더블 타이틀곡.[6] 당시 은행직원이 모니터를 돌려서 신용 상황을 보여주면서 이 상태에서는 휴대전화도 개통할 수 없다고 말했다. 더더군다나 지점 안에서 자기를 보는 사람들도 많아서 엄청나게 창피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여기서 한 가지가 안 맞는다. 아무리 부모가 빚을 져도 금융연좌제가 없으면 생존자인 부모가 자녀에게 채무를 상속하지 않는다. 또한 부모가 죽은 뒤에 유산을 아예 상속받지 않거나 한정 승인을 신청하면 그만이다. 즉 장윤정 본인도 신용불량자가 될 수 있는 경우라면 부모가 장윤정 이름으로 은행에서 돈을 빌리거나 연대보증인을 세운 것 정도다. 그런데 만약 자신 명의로 채무나 연대보증이 걸렸음을 알았다면 추가로 빚을 지는 학자금 대출을 받으러 갈 리가 없다. 그렇다는 건... 장윤정과 친모간의 다툼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면 상당히 의미심장한 부분이다.[7] 2010년대를 기준으로 '그렇게 쉽게 어머니가 딸의 이름으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다'라고 평가하는 이도 많으나, 2000년대까지만 해도 부모님이 자녀 명의로 대출을 받거나, 자녀를 몰래 연대보증인으로 지정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금융실명제만 해도 고작 93년의 일이다. 물론, 합법적 금융권이 아닌 사채 등의 비합법적인 루트를 고려한다면 2015년 현재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8] 제주도에서 열린 행사에서 댄스곡을 불렀는데 의외로 잘 부르고, 안무 실력도 수준급이다. 댄스 가수로 활동할 기회도 있지만 본인은 트로트가 제일 편하다고 실토했다. 사실 비음 때문에, 다른 장르와는 잘 안 맞는다고 말한 음반 제작가도 있다.[9] 장윤정이 소속됐던 인우기획 전신은 무명시절이었던 장윤정과 같이 일했던 이벤트 회사다. 장윤정이 성공할 가능성을 보고 대표가 연예기획사로 전업했고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 인우기획은 잘못된 경영으로 장윤정, 박현빈, 윙크라는 말도 안되는 라인업을 가지고도(저 셋은 젊은 나이에도 트로트계에서도 높은 몸값과 인지도로 수많은 행사를 소화하는 탑급이다)폐업하고 말았다.[10] 이후에도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있었다.[11]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는데, 김수희의 '애모'가 93년 상을 받은 이후 최초였다.[12] 94년에 발표된 곡이긴 하나 유명해진 것은 1박2일 기상송으로 등장한 2007년이다.[13] 폐업 즈음 장윤정의 모친이 서로의 행복을 빌자고 메세지를 보냈다고 한다. 첫 번째 각주 기사 참고.[14]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13조 3항[15] 장윤정이 등장한 가요 무대나 트로트 이벤트와 장윤정 데뷔 초 뮤직비디오 혹은 행사 동영상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16] 솔로몬저축은행은 대부업체가 아닌 제2금융권이지만, 지나치게 대출을 강조하고 광고까지 촌스러워서 영락없이 대부업체로 찍혔다. CF가 이들 이미지만 더럽혔다. 또한 연락처(주로 휴대폰 번호)가 새어나갔을 때 저축은행에서 전화하는 빈도가 대출 업체랑 맞먹었다. 간판에 건 은행만 보고 대출하면 큰일난다.[17] 물론 장윤정의 주요 수요층인 중노년층에게는 어느정도 퍼져있던 루머다. 그렇지 않았다면 해명하겠다고 방송에서 언급할 필요도 없을테니. 문제는 이 루머 자체의 인지도가 극히 일부 계층에만 높았지 그 외 대중에게는 매우 낮았던 것.[18] 예를들어 의사라는 남자와 소개팅을 했는데 상대 부모가 '우리는 연예인 며느리 탐탁치 않지만 그쪽이 병원 지어준다면 생각해 보겠다'는 식으로 나왔다거나[19] 원곡은 락발라드인데 부르면서 계속 트로트식 바이브레이션이 튀어나왔다. 본인도 연습과정에서 계속 이걸 자제하려고 했지만 이미 몸에 배어버린 창법을 뜯어고치는게 쉽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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