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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6 14:35:05

자네 아직도 업고 있나

1. 개요2. 줄거리3. 의미4. 누구의 이야기인가?5. 비슷한 이야기

1. 개요

불교의 우화 가운데 하나로 간결한 줄거리를 통해 겉으로 드러난 것에 얽매이지 말라는 교리에 대해 알기 쉽고 이해가 빠르게 전달하고 있다.

2. 줄거리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두 스님이 길을 가다 어느 강가에 이르렀다. 마침 강가에서는 어느 여자가 강을 건너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를 본 두 스님 가운데 한 명이 나서서 여자를 업고 강을 건네 주었다.[1] 그리고 다시 길을 가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지켜본 그 다른 스님은 가는 내내 계속해서 처음 그 여자를 업어 건네 주었던 그 스님에게 따졌다.
"세상에, 자네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우리는 수행하는 승려인데, 승려는 여자를 멀리해야 되는 거 아닌가? 여자를 멀리해야 할 승려가 여자의 몸을 만지다니, 그게 불도를 닦는 승려가 할 일인가?"
그 스님의 말없이 듣고만 있던, 그 여자를 업어 건네 주었던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아니, 자네는 아직도 그 여자를 등에 업고 있었나? 그 여자라면 나는 진작에 그때 거기서 내려놓고 왔네만..."[2]

3. 의미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노힐부득달달박박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수행에 있어서 형식이나 문자에 구구하게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3] 교훈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선불교에서는 애욕을 포함한 인간의 감정을 거울에 비치는 상으로 설명하는데, 거울 앞에 물체가 있으면 물체의 상이 거울에 비치고, 물체의 상이 거울 앞에서 사라지면 상도 사라지듯이 감정도 그 감정을 유발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나면 사라져 버리는 것인데 그런 것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한국 조계종의 소의경전인 금강경에서는 문자로 된 부처의 가르침을 뗏목에 빗대어 강을 건넜으면 마땅히 강에 두고 가야 할 것이지, 강을 건넜는데도 나아가지 않고 붙잡고 있을 것이 아니라고 설명한다.

다만 이는 석가모니 항목에 나온 깔라마 경이나 앙굴리말라 항목에 나온 설명과 마찬가지로 석가모니 부처의 법이라고 해서 무조건 따를 필요가 없다거나 회의주의나 비이성적이고 주관적인 진리 창조를 옹호하는 것이라기보다, "법다운 것도 구애되지 않아야 하거늘 법답지 않은 것이야 말할 게 있느냐"라는 일종의 반어법이다.

가톨릭에서도 이 일화를 흥미롭게 본 것인지 승려수도자로 바꾼 버전도 있으며, 서울대교구 위례성모승천성당 이기양 요셉 신부나# 수원교구의 전삼용 요셉 신부가 이 일화를 주제로 묵상한 내용을 기고하기도 했다. 다만 전삼용 요셉 신부의 글에서는 승려가 아니라 수도자로 나와 있다. #

해당 일화를 성인지 감수성과 결부시켜 설명하기도 한다. 여자를 업어서 건네준 스님은 성인지 감수성을 초월했지만, 그것을 지적한 스님은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

4. 누구의 이야기인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중국 당대의 선종 승려였던 단하천연(丹霞天然)[4]과 그 제자의 일화라고도 하고[5] 한국 근현대 불교의 고승이었던 경허 스님과 만공 스님의 이야기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는 일본 에도 말기에서 메이지 초기에 걸쳐 활약했던 선종 승려 하라 탄잔(原坦山, 1819~1892)[6]의 이야기가 각색되어 전해진 것이라는 견해가 더 신빙성이 높다. 하라 탄잔의 문집에 실제로 관련 이야기가 실려있고, 일본어 위키에서도 해당 일화가 하라 탄잔의 것으로 소개되어 있다.[7]

참고로 하라 탄잔에게 "승려가 여자에게 손을 대다니" 운운하며 따졌던 승려는 탄잔의 동료로 마찬가지로 일본의 고명한 선승인 모로가쿠 에키도(諸嶽 奕堂)로 알려져 있다. 다만 하라 탄잔의 일화에서는 강이 아니라 진흙탕으로 뒤덮인 좁은 샛길이었고, 업어서 건네 준 것이 아니라 들쳐안아서 진흙이 없는 곳에 내려놓아 준 것이다. ##

5. 비슷한 이야기

북송유학자 정명도와 정이천 형제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이는 풍몽룡고금담개(古今譚槩)에 심중유기(心中有妓)라는 일화로 나와 있다.
兩程夫子赴一士夫宴,有妓侑觴。伊川拂衣起,明道盡歡而罷。
두 정부자(程夫子: 정명도, 정이천)가 어느 사대부의 연회에 갔는데, 기생이 술을 권했다. (그러자) 이천은 옷깃을 떨치며 일어났고 명도는 연회를 다 즐긴 후에야 그만두었다.

次日,伊川過明道齋中,慍猶未解。
다음날, 이천이 명도의 집으로 찾아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듯 화를 내었다.

明道曰:「昨日座中有妓,吾心中卻無妓。今日齋中無妓,汝心中卻有妓。」
정명도가 말했다. "어제 연회에 기생이 있었지만 내 마음 속엔 기생이 없었네. 오늘 우리집에는 기생이 없지만 자네 마음 속엔 아직 기생이 있구려."

伊川自謂不及。
(이 말을 들은) 이천은 (자신의 도량이 형인 명도에게) 미치지 못한다라고 이야기하였다.


[1] 여기서 강을 건넌 뒤에 여자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갔다는 버전도 있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홱 가 버렸다는 버전도 있다.[2] 두 스님이 동료로 나오는 버전 말고 노승과 동승으로 나오는 버전도 있는데 이 경우 여자를 업어 건네 준 쪽은 노승이고, 따지는 동승에게 "너는 아직도 업고 있느냐?"라고 따끔하게 일침하는 전개로 나온다. 스님이 가톨릭 수사로 번안된 버전도 있다.[3] "산 것을 죽이고 때리고 자르고 묶고, 훔치고 거짓말하고, 사기 치고 속이고, 그릇된 것을 배우고, 남의 아내와 가까이 하는 것이 비린 것이지 고기를 먹는 것이 비린 것이 아니다."(숫타니파타)라고 했던 가섭불(카샤파 붓다)이나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게 아니다"(마르코의 복음서 2:27)라고 했던 예수나 공통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형식적'인 것이나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 지나치게 매달려서 교조적으로 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4] 당대의 선종 승려(739∼824)로 경덕전등록의 '단하소불'이라는 일화가 유명하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에도 실려 있는 이 일화는 다음과 같다. 어느 추운 겨울에 낙양의 혜림사에서 참선하다가 날이 추워지자 법당에 모셔져 있던 나무로 된 세 불상 가운데 가운데 주존인 석가모니 불상을 아궁이에 처넣어 불을 땠고, 당연히 그걸 보고 기겁을 한 혜림사의 원주승이 "아니 법당의 불상은 왜 태우냐?"라고 따지자 단하천연은 천연덕스럽게 "아 목불 다비(화장)하면 사리가 나오나 보려고 했지. 사리가 안 나오면 그게 그냥 나무 쪼가리지 어디 부처님인가?"라고 받아 쳤다는 이야기. 고려의 선승 진각혜심은 이 이야기에서 진짜 잘못한 건 누구냐고 묻는 질문에 "원주는 부처만 보았고 단하는 나무토막만 태웠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5] 대만의 만화가 채지충이 그린 만화에도 단하천연의 일화로 등장하고 있다.[6] 1819. 10. 18~1892. 7. 27. 일본의 조동종 승려. 현재의 후쿠시마현 이와키시 출신으로, 호는 학소(鶴巢), 각선(覺仙)이고 속명은 아라이 료사쿠(新井良作)이다. 본래는 에도막부가 설립한 유교학교인 쇼헤이코(昌平黌)에서 유학과 전통의학 등을 배웠다가 1840년 경에 출가하였고, 승려가 된 이후에는 난학을 공부한 의사 코모리 슈지(小森宗二)와의 논쟁을 계기로 서양 의학을 공부하면서 불교에 실증적이고 과학적인 방법론을 도입할 것을 주장한다. 이후 심성사(心性寺)와 장덕원(長德院)의 주지를 맡다가, 메이지 정부가 폐불훼석을 일으킬 때 일본 불교계가 합동으로 결성한 협의체인 제종동덕회맹(諸宗同德會盟)에 조동종의 중진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메이지 정부가 불교 각 종단에서 10명의 교도직을 임명하도록 할 때 조동종의 교도 중 한 사람인 소교정이 되었으나, 1873년 출판법을 위반하였다 하여서 소교정 직위와 함께 승적까지 박탈당하였다. 이때 역술인을 하면서 불경강의를 열다가, 1879년 당시 도쿄제국대학의 총장인 가토 히로유키의 청으로 제국대학 내의 '불서강의' 교과목의 강의를 맡게 된다. 이듬해 승적이 회복되었고, 1885년에는 불교 승려 중에는 처음으로 학술원의 회원이 된다. 1888년까지 도쿄제국대학 동양철학과에서 인도철학이란 이름으로 불교를 강의하였고, 1891년에는 조동종대학림(현재의 고마자와대학) 총감을, 1892년에는 조동종의 관장대리를 맡았다가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1892년 7월 27일 향년 74세로 입적하였는데, 지인들에게 자신이 오늘 죽을 것이라는 사망통지문을 띄우고 입적하였다고 전해진다. 이때 유언을 청하는 제자에게 남긴 말은 "죽은 후의 일을 어찌 하랴!(死後之事復何爲)"였다. 참고자료(논문), 참고자료(비문)[7] 탄잔은 이외에도 생전에 파격적인 일화들을 많이 남겼는데, 일례로 엄격한 계율을 중시했던 승려 샤쿠 운쇼 앞에서 술을 권하다가 운쇼가 거절하자 "아니 술도 한 잔 못하면 그게 사람 새끼냐?"라고 비웃었고, 발끈한 운쇼가 "사람이 아니면 그럼 뭡니까?"라고 따지자 탄잔은 "부처지!"라고 대답해 운쇼도 그만 웃고 말았다거나, 죽기 30분 전에 "거푸집(몸)이 이제 곧 부서질 것이므로 이렇게 고지해 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내용의 편지를 지인들에게 일일이 보내 놓고 난 뒤에 좌선한 채로 열반에 들었다거나 하는 등의 이야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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