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세기 조선의 승려 풍계(楓溪) 현정(賢正)이 풍랑을 만나 일본에 표류, 체제하면서 겪은 경험을 서술한 표해록. 분량은 짧지만 매우 세밀하게 기술되어 있어 사학계와 일본지역학계에서도 굉장히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2. 상세
능주(綾州) 쌍봉사(雙峰寺)의 화원승(畵員僧)인 현정은 해남 대둔사 천불전의 천불 조성을 담당했던 승려였는데 경주에서 천불 제작에 쓸 옥과 자재를 구해 장진포(長津浦)에서 자재를 배에 싣고 해남으로 출항했으나 1817년 11월 27일 일본 후쿠오카 인근 오시마(大島)에 동해상에서 큰 풍랑을 만나 일본까지 흘러갔다.오시마에서 나가사키, 그리고 대마도를 거쳐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는 동안 보고 들은 일을 세세히 기록했는데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상의 서술을 줄이고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만 기록하였다. 표해록 전체에서 현정이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보이는 대목은 두어 군데에 지나지 않는다.[1]
딱딱한 역사서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의외의 사실[2]도 알 수 있어서 여러 가지로 흥미롭다. 무엇보다 분량이 짧아서 읽기에 부담이 없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료지만 저자인 현정의 이후 행적에 대해서는 생몰연도를 포함해 알려진 바가 없으며 알려진 저서도 이거 한 권 뿐이다.
3. 여담
이 기행문은 일본에서 승려 일행이 겪은 고난이나 차별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아니고 대접이 꽤 융숭했으며 사람들도 대개 친절하더라고 써놓았다. 당연한 것이 일본은 불교가 오랫동안 국교였던 시절이 있었고 이후에도 신토와 공생하며 성장했기 때문에 '승려요? 그럼 받들어 모셔야지'란 인식이 있었다.4. 해석본
일본표해록의 해석본이 출간되어 있는데 홍보용으로 써먹으려고 책 소개에 '대마도는 조선 땅이었다!' 라고 광고되어 있지만 막상 관련 내용이라곤 "대마도 사람 중에 조선말을 할 줄 알며 조선인을 자처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냥 토인이더라" 한 것뿐이다.[3][1] 그것도 금욕하는 승려로서는 당연히 불쾌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일본 특유의 성풍속에 관한 것이다.[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었는데도 양국 사이에는 해상 조난자에 대한 구호체계가 존재했다. 왜란으로부터 3백여 년 가까이 지난 시점이라서 양국 간의 악감정이 많이 희석됐기도 했거니와, 정치적인 문제와 무관한 재난 상황에서는 외교적 상황과 무관하게 상호협력하는 것이 오랜 옛날부터 동아시아의 불문율로 자리잡은 탓도 있다. 가령 한일관계 이상으로 무력 분쟁이 잦았던 유럽에서도 해상 조난자나 침몰한 군함에서 생존을 위해 탈출한 해군 수병들을 구조해서 보호하는 체계는 확립되어 있었고, 그 흔적으로 현대에도 국제법 상 바다에 빠진 적군을 공격하거나 죽이는 행위를 전쟁범죄로 간주한다.[3] 이와 별개로 대마도주에 대한 표현은 별로 안 좋다. 표류민에게 지급할 구호식량을 빼돌린다던지, 숙적 영주를 모함해서 3대를 죽게 만든다던지. 비슷한 기록은 간양록에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