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color: #121230; margin:-6px -1px -11px" | 구단 기본 문서 | 연고지 | 인천광역시 |
구단 | 인천 유나이티드 FC | ||
주요 인물 | 현재 | 선수단 | 윤정환 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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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 구단 역사 | 역대 시즌 | 기록 | AFC 챔피언스 리그 | |
시즌별 일람 | 역대 스쿼드 | 역대 유니폼 | 역대 등번호 | ||
현재 시즌 | 2024 | ||
유소년 관련 문서 | 유소년팀 | 인천대건고등학교 | 인천 유나이티드 FC U-12 | |
체계 | 유소년 체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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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천 유나이티드 FC의 유소년 체계를 정리한 문서.인천 유나이티드 유소년 체계 구성 | |
연령 | 소속 |
U-18 | 인천대건고등학교 축구부 |
U-15 | 광성중학교 축구부 https://incheonutd.com/player/u-15.php |
U-12 | 인천 유나이티드 U-12 |
직책 | 한글 성명 | 로마자 성명 | 국적 | 생년월일 |
U-18 감독 | 최재영 | CHOI Jaeyoung | 1983.09.22 | |
U-18 코치 | 노영래 | Noh Young Rae | 1986.02.08 | |
U-18 골키퍼 코치 | 윤진호 | YUN Jinho | 1988.07.04 | |
U-15 감독 | 이성규 | LEE Sungkyu | 1982.04.13 | |
U-15 코치 | 안준혁 | AHN Junhyeok | 1987.02.02 | |
U-15 골키퍼 코치 | 최승주 | CHOI Seungjoo | 1990.04.06 | |
U-12 감독 | 이재홍 | LEE Jaehong | 1982.03.13 | |
U-12 코치 | 조동욱 | CHO Dongwook | 1985.05.21 | |
U-12 코치 | 한승호 | HAN Seungho | 1992.09.15 | |
유소년 트레이너 | 이동원 | Lee Dongwon | 1985.11.25 |
인천 유나이티드 FC의 유소년 체계는 U-15(광성중학교), U-18(인천대건고등학교)로 구성되어 있다.
2006년에 가장 먼저 U-12팀이 창단됐다. 이후 2007년 4월 인천대건고등학교와 축구부 창단 협약을 맺고[1], 2008년 4월 U-18 팀이 공식 창단했다.[2] 이어서 2009년 12월 U-15 광성중이 창단[3]하면서 인천 유나이티드는 U-12, U-15 광성중, U-18 대건고로 이어지는 유소년 체계를 구축했다.
더 넓은 대상으로는 인천유나이티드 아카데미 어린이 축구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6세부터 13세까지 참여할 수 있으며 서구지부, 연수지부, 동구/남부/중부지부, 부평/계양지부, 남동지부 등 지역별로 운영 중이다.
대건고 축구부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인천대건고등학교 축구부 문서 참고.
2. 역사
2.1. 초기 (2008~2010)
인천의 유소년 체계는 전남 드래곤즈, 포항 스틸러스, 울산 HD FC 등 연혁이 오래된 곳과 달리 출발이 그리 빠르지는 않았다. 인천의 창단 자체가 2003년이었기 때문에 출발이 다소 늦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유소년 체계가 갖춰지기 전에도 인천은 지역 출신 선수를 많이 영입하는 팀이었다. 창단 당시에는 인천대학교, 부평고등학교 출신 선수를 대거 영입하기도 했고, 로컬보이를 자주 노리는 편이었다. 그러다가 K리그 전반적으로 유소년 육성을 시작하게 되면서 인천도 공식적인 유소년 클럽을 만들어야 했는데,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고등학교 팀인 부평고는 워낙 축구 면에서 이미 명문이었기에 인천 팀의 안으로 편입하기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다. 그 결과 아예 축구부가 없던 학교에 팀을 만들기로 결정했고, 인천대건고등학교가 그 대상이 됐다.
창단 초창기의 대건고는 약체로 분류되었다. 아예 신생 팀이었고, 시민구단의 한계로 인해 시설이나 지원도 부족했으며, 두각을 드러내는 선수도 많지 않았다. 창단 멤버 중에는 문상윤이 제법 주목받았지만, 팀 전체로 보면 성적도 하위권이었고 대패하는 경기도 자주 발생했다.
그래도 2년차부터는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유소년 체계 총괄을 맡았던 김시석이 스카우트에 열중하면서 여러 선수를 찾았고, 이 과정에서 진성욱, 김용환, 박지수 등 타지에서 활동하던 좋은 유망주들이 대건고로 합류했다. 성적 자체는 여전히 상위권과 거리는 있었지만, 좋은 선수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팀이 차츰 성장했다.
한편, 클럽 팀으로 운영되던 U-15 팀도 2010년부터는 광성중학교와 협약을 맺어 팀명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 시기부터 아래 나이대의 선수 육성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유소년 체계 전체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2.2. 도약기와 첫 전성기 (2011~2016)
2011년에 광성중 축구부를 경험한 1995년생 선수들[4]이 대건고로 올라오면서 인천의 유소년 체계도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라왔다. K리그 주니어에서 중위권까지 올라온 대건고는 2012년 진성욱이 처음으로 프로 직행에 성공했고, 이듬해에는 박지수까지 바로 올라가면서 본격적인 아웃풋이 생겼다. 한편 대건고 자체도 2013년 전국체전 준우승을 거두면서 전국 대회에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대건고가 한 단계 더 올라선 때는 2015년이었다. 신성환 감독이 떠난 후 감독으로 승격한 임중용은 팀을 단단하게 꾸렸고, 2015년 K리그 주니어에서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모두 우승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그 외에도 왕중왕전 준우승을 거두는 등 그야말로 인천 유스의 황금기가 왔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이전까지는 짧은 역사와 인프라 부족으로 인해 애매한 평을 받았던 대건고였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명문'의 이미지가 처음 생겨났다. 동시에 김진야와 박명수가 U-17 월드컵에 참가하면서 더욱 주목받을 기회도 금방 찾아왔다.
2016년에도 대건고는 지속적인 상승세를 보여줬다. 2015년만큼의 성적은 아니었지만 K리그 U-17 챔피언십, U-18 챔피언십을 둘 다 준우승으로 마치고, 후기리그도 준우승
한편, 광성중 역시 2015년 리그 우승, 2016년 전국체전 우승을 거두는 등 확실한 상승세를 보여줬다. 당시의 주축 멤버들은 이후 청소년 대표팀에도 대거 발탁되는 등 높은 주목도를 자랑했다.
2.3. 과도기 (2017~2023)
2016 시즌을 마친 후 임중용 감독이 프로팀 코치로 올라가고, 전재호가 새롭게 대건고의 지휘봉을 잡았다. 당시 대건고는 정우영을 보유하고 있던 상황이지만, 3학년이 불과 4명[5]밖에 없는 언밸런스한 구조기도 했다. 2017년에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지만, 정우영이 FC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면서 인천 유소년 체계가 큰 주목을 받기도 했다.이후 2018년에는 전년과 정반대로 3학년이 10명이나 됐다.[6] 황금 세대였던 2000년생 선수들을 앞세워 대건고는 대한축구협회장배 대회에서 결승까지 무실점으로 진출했지만, 또 준우승에 그치면서 지독한 콩 징크스에 시달렸다. 당시 기준으로 대건고는 전국대회 결승에 오를 때마다 패배해서 준우승에 그치는 일이 반복되었기에 우승을 향한 열망이 굉장히 컸다.
2018년이 끝난 후 전재호 감독이 떠나고, 최재영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임시로 팀을 지휘했다. 2월에 열린 문체부배 대회는 정식 감독이 없는 상태로 임했는데, 힘든 여건이었지만 결승전에서 최세윤의 골로 현풍고를 무너뜨리며 첫 전국대회 우승을 거머쥐었다. 해당 대회를 마친 후 이천수 체제에서 부평고 출신인 김정우가 감독으로 오면서 변화가 생겼는데, 10월에 전국체전까지 우승하면서 상승세를 유지했다. 해당 해에는 광성중 역시 소년체전에서 우승하면서 U-15와 U-18이 나란히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다만 이 시기가 대건고에게 꼭 상승세라고만 볼 수는 없었다. 2019년의 우승을 이끌었던 2001년생 선수들은 결과적으로 프로에서 자리를 잡지 못했고[7], 일시적으로 유소년 정책이 U-15 스카우트 집중으로 바뀌면서 혼선을 빚기도 했다. 한편, 이천수 전력강화실장이 2020 시즌 인천이 겪은 혼란 속에서 팀을 떠났고 그의 선택으로 팀에 왔던 김정우 감독도 결별을 택하면서 2021년부터는 대건고도 다시금 변화에 직면했다.
2021년부터는 오랫동안 팀의 코치를 맡았고, 대행으로 나서서 우승도 경험했던 최재영이 대건고의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어 유소년 체계를 이끌게 됐다. 하지만 2020년대로 들어온 후 팀의 성적은 생각만큼 좋지 못했다. 2021년에는 결승에 진출한 전국대회가 없었고, 2022년에는 2월 문체부장관배 준우승을 거뒀지만 전기리그에서 크게 부진하였다. 기업구단의 유소년 수준이 크게 올라오고, 한동안 침체됐던 학원축구계도 명문 팀들이 강세를 회복하면서 대건고 역시 시험대에 다시 오른 셈. 이후 2023년에도 대건고는 애매한 성적을 남겼는데, 5년 연속 프로직행자 배출에는 성공했지만 팀적으로는 아쉬움도 있었다.
2.4. 부침 끝에 찾아온 두번째 전성기 (2024~)
2024년에는 3학년 선수 8명 중 5명이 청소년 대표팀 경험자[8]였기에 전보다 큰 기대를 받았다. 실제로 전기리그에서 정말 오랜만에 준우승을 거두면서 한결 발전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어진 전국대회에서 부진했고, U-18 챔피언십에서는 조별리그 2경기 10실점을 당하면서 충격적인 탈락을 받아들여야 했다. 위기의 대건고였지만 저학년 선수들이 출전한 U-17 챔피언십은 경기력이 점점 올라오면서 제법 순항했고, 승부차기까지 거치는 혈투 끝에 결승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오산고를 상대로 승리를 따내면서 창단 후 K리그 유스 챔피언십 첫 우승에 성공했다.U-17 챔피언십을 기점으로 대건고는 팀 자체의 사기가 크게 올라왔다. 8월에 치러진 왕중왕전에서 초반에는 약간 애매한 모습도 보여줬지만, 경기를 치르면 치를수록 팀이 단단해졌다. 토너먼트 돌입 후에는 더더욱 뛰어난 경기력을 보였고 마침내 평택 진위 FC를 꺾으면서 왕중왕전 우승까지 거머쥐었다. 한 해의 가장 중요한 대회를 화려하게 장식하면서 대건고는 애매했던 기간을 뒤로 하고 다시 도약에 성공했다.
3. 특징
3.1. 프로직행
초창기에는 프로직행을 그렇게 자주 시도하는 팀은 아니었다. 최전성기였던 2015년 선수들이 모두 프로직행 대신 대학교로 간 케이스가 대표적이다. 최대 아웃풋으로 기대를 모았던 박지수가 빠르게 프로로 올라왔다가 실패했던 사례의 영향이 크기도 했다. 그러나 2017년 김진야, 김보섭, 명성준 셋이 프로로 직행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마다 적극적인 콜업을 진행 중이다.2018년에는 직행이 없었으나, 정우영의 독일 진출을 관점에 따라 직행으로 본다면 2017년부터 8년 연속으로 직행자가 배출되었다. 정우영의 사례를 제외하면 2019년부터 6년 연속이다.[9] 나름 꾸준하게 유소년 선수들을 끌어올리는 구조로 볼 수 있다.
다만 2020년대로 접어들면서 대학교로 보낸 우선지명 선수들의 콜업 사례가 많이 적어졌다. 외부에서 수혈되는 신인 선수의 질이 높아지면서 연쇄적으로 발생한 현상이기도 하다.
3.2. 골키퍼 명가
타 포지션보다도 유독 좋은 골키퍼를 많이 배출하는 편이다. 1995년생 이태희가 고등학생 시절 청소년 대표팀의 주전으로 나서면서 골키퍼 명문의 역사가 시작됐는데, 당시 대건고의 코치였던 김이섭의 영향력도 컸다. 이태희의 뒤를 이은 1997년생 김동헌 역시 청소년 대표팀에 뽑혔던 선수이고, 프로 진출 후에는 리그 상위권 골키퍼로 주목받았다. 1999년생 민성준도 경쟁이 있었지만 청소년 대표팀에서 주전을 맡았던 적이 있고, 아시안게임에서 2선발 골키퍼로 합류해 금메달을 획득했었다.위에서 언급한 세 선수가 2년 터울로 계속 등장하면서 골키퍼의 퀄리티가 특히 좋다는 이야기가 정말 많았다. 2022년과 2023년에는 아예 저 셋과 2001년생 김유성까지 포함하여 프로 골키퍼 넷이 모두 유스 출신으로 구성되었다. 다른 포지션은 몰라도 골키퍼만큼은 걱정이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한편으로는 골키퍼 포지션의 경쟁이 어려워서 청소년 대표팀 골키퍼였던 2005년생 김민준이 인천 대신 J리그로 진출하는 일도 있었다.
3.3. 해외 진출 사례
인천 유소년 체계를 거쳐 해외로 진출한 선수가 제법 있다. 제일 유명한 사례는 이승우와 이강인을 들 수 있다. 다만 전자는 FC 바르셀로나 합류가 예정된 상황에서 잠시 광성중에 소속된 정도였기에 진지하게 언급되는 경우도 많다. 반면 이강인은 U-12 팀에서 제법 오래 있었다. 한국에 오면 인천에서 시축을 진행하거나, 행사에 참여한 적도 있을 정도로 인연을 계속 이어가는 중이다.대건고 출신 해외 진출 사례로는 정우영이 가장 유명하다. 정우영의 FC 바이에른 뮌헨 이적은 인천 팬덤에서도 상당히 화제가 됐는데, 결국 독일 무대에 잘 정착하게 되면서 긍정적인 사례로 남았다. 그 외에는 함부르크 SV로 갔던 권로안, FC 아우크스부르크로 갔던 천성훈 등의 사례도 있다. 다만 두 선수 모두 해외 정착에는 실패했고, 이 중 천성훈은 인천에 입단해 잠시 활약하기도 했다. 기타 사례로 유럽 진출이 예정됐으나 메디컬 테스트에서 심장 문제가 발견되어 취소된 박명수도 있다.
다만 선배들의 연속된 유럽 진출이 악영향을 미친 점도 있었다. 2019년 대건고의 호성적을 이끌었던 2001년생 주축 멤버들은 졸업 후 유럽 진출을 대거 노렸고, 이 과정에서 최세윤과 정성원이 임대 형식으로 유럽에 갔다. 그러나 두 선수 모두 코로나19가 겹친 상황 속에서 자리를 잃었고, 국내 복귀 후에도 어려움을 겪어 프로 무대를 떠났다. 최준호 역시 유럽 진출을 노리고 테스트를 봤었지만 상황이 꼬여서 잠시 무적 신분으로 지냈었다. 이들의 사례가 발생한 이후부터는 무리한 해외진출은 피하는 추세이다.
4. 주요 성적
인천대건고등학교 축구부 주요 우승 기록 | ||
연도 | 우승 대회 | 준우승 대회 |
2013 | - | 제94회 전국체육대회 |
2015 | K리그 주니어 전기리그 A조 K리그 주니어 후기리그 A조 | 금석배 전국고교축구대회 후반기 전국 고등 축구리그 왕중왕전 |
2016 | - | K리그 U17 챔피언십 K리그 U18 챔피언십 K리그 주니어 후기리그 A조 |
2018 | - | 제38회 인천광역시협회장기 축구대회 제39회 대한축구협회장배 전국고교축구대회 전반기 전국 고등 축구리그 왕중왕전 |
2019 | 제39회 인천광역시협회장기 축구대회 제41회 문화체육관광부장관배 전국고교축구대회 제100회 전국체육대회 | - |
2020 | 제40회 인천광역시협회장기 축구대회 | 제42회 문화체육관광부장관배 전국고교축구대회 |
2022 | - | 제44회 문화체육관광부장관배 전국고교축구대회 |
2024 | K리그 U17 챔피언십 2024 전국고등축구리그 왕중왕전 | 제44회 인천광역시협회장기 축구대회 K리그 주니어 전기리그 A조 |
5. 출신 선수
5.1. 인천대건고등학교 출신 선수
5.1.1. 우선 지명 후 인천 입단자
- 90: 문상윤[빠른년생]
- 93: 진성욱[11], 김용환
- 94: 박지수, 한남규
- 95: 이태희, 이정빈
- 96: 임은수
- 97: 최범경, 박명수[빠른년생], 김동헌, 이제호
- 98: 김진야, 김보섭, 명성준
- 99: 정우영[13], 구본철[14], 민성준[15]
- 00: 천성훈[16], 김채운, 이준석, 황정욱, 김성민
- 01: 최세윤[17], 정성원[18], 최원창
- 02: 김민석
- 03: 박현빈
- 04: 김세훈
- 05: 김훈, 이가람
5.1.2. 우선 지명을 받지 못하거나 취소된 선수 중 프로 입단 선수
- 90: 박효상[19] - 톰 톰스크
- 91: 고보연 - 부천 FC 1995
- 92: 장현수[빠른년생][21] - 수원 삼성 블루윙즈
- 93: 최영훈 - FC 안양, 지구민 - 고양 자이크로 FC, 김종원 - 고양 자이크로 FC
- 95: 노성민 - 인천 유나이티드[22], 이준용[23] - 오에스테, 권로안[24] - 파지아노 오카야마
- 96: 배준렬[25] - 부천 FC 1995
- 97: 표건희 - 인천 유나이티드[26]
- 99: 안해성 - 포항 스틸러스
- 00: 이호재[27] - 포항 스틸러스, 최문수 - 수원 FC
- 01: 김유성 - 인천 유나이티드[28]
- 02: 김재영 - 이와테 그루야 모리오카
- 05: 김민준 - 도치기 SC
5.1.3. 중도에 전학을 간 선수
- 91: 조준상, 김민준
- 92: 이주용[29], 심규동, 차우현, 이정수, 한기원, 박승모, 이명준[30], 김대현
- 93: 전원석[31], 장태용, 장민혁, 이승현, 최진규, 김세일, 이경호, 이종혁, 김솔민
- 94: 이지노, 고상권, 김주연, 김우람
- 95: 한상빈, 유대희, 정다훈, 김찬빈, 서형대, 백민우, 이상국, 임준규
- 96: 한상민, 신건호, 김승민, 서수원[32]
- 97: 전석훈[33], 송준호[34], 손동협, 김영일, 최종훈, 전우진, 박보한
- 98: 김도윤[35], 추민열[36], 강창민, 권순우, 노승윤, 권재훈, 김봄찬, 선정하, 임서균, 최성규, 김성환
- 99: 이원준[37], 장정준, 양철순, 이민수, 허성훈, 정연찬, 최현석, 김재완, 박윤호, 박상혁
- 00: 진호승[38], 이상현, 김영훈, 이동준, 김주완
- 01: 고병범, 박현빈, 서지환[39], 고동영, 황영준, 황동휘, 김동민, 김민수, 권민서
- 02: 최명재, 김동훈[40], 노승준, 김재범, 이건웅[41], 정민, 이주영, 김무진
- 03: 김건우, 김종진, 김태형, 권우빈, 한민호, 김태경, 장재원, 김명진, 서규원
- 04: 유선[42], 김강민, 정지원, 김도현, 유광근, 도건후, 홍준호, 안성환, 최정우, 김주형
- 05: 정마호[43], 이재석, 곽연우, 최준서, 백지호, 김예찬, 황정구
- 06: 황신연, 김진영, 김태형, 배은호, 황재보, 김민석, 박상우, 오재원, 최종범
- 07: 강건, 최윤우, 김문건, 이진혁, 이현승, 조한빈, 송동윤, 염지유, 이수민
5.1.4. 2024년 기준 우선 지명 선수
- 03: 신동욱 (광운대), 강민성 (인천대)
- 04: 박경섭 (선문대), 김현서 (동국대), 안현희 (동명대), 이충원 (안동과학대), 한동훈 (여주대)
- 05: 조은준 (동국대), 윤재원 (청주대), 진현준 (평택)
5.2. U-12/U-15(광성중학교)만 경험한 선수
[1] 인천 UTD-대건고 축구부 창단 협약[2] 인천UTD 유소년팀 대건고 11일 창단식[3] 인천UTD 유소년 U-15 광성중 29일 창단[4] 유명한 선수로는 이태희, 이정빈이 있다.[5] 정우영, 구본철, 안해성, 민성준. 3학년이 이렇게 적은 때는 극초반을 제외하면 2017년이 유일하다.[6] 이들 중 절반 이상이 프로 진출에 성공했다. 김채운, 황정욱, 이준석은 프로로 직행했고, 최문수는 수원 FC에 합류했으며, 천성훈은 FC 아우크스부르크로 이적했다. 이후 김성민이 대학을 거쳐 인천에 합류했고, 이호재는 포항 스틸러스로 갔다. 10명 중 7명이나 프로에 안착한 셈.[7] 2020년에 3학년이 된 2002년생 선수들도 기대치와 당시 성적을 감안하면 성장세가 아쉽다는 평을 받았다. 결국 대건고가 성적을 내긴 하는데, 실질적으로 뛰어난 선수를 배출하는 측면은 전보다 아쉬웠다는 이야기가 따라다녔다.[8] 이재환, 황지성, 성힘찬, 우창범, 손태훈[9] 2019년 이준석, 황정욱, 김채운 / 2020년 최원창, 김유성 (정성원, 최세윤 직행 후 임대) / 2021년 김민석 / 2022년 박현빈 / 2023년 김세훈 / 2024년 김훈, 이가람[빠른년생] [11] 중도에 전학을 간 이주용을 제외하고 인천 유소년 최초로 성인 대표팀에 발탁된 선수.[빠른년생] [13] 지명 이후 바이에른 뮌헨의 이적료 지불 과정으로 인해 형식상 인천으로 바로 콜업된 이후 이적하는 형태로 계약 체결.[14] 입단 후 부천 FC 1995 재임대.[15] 입단 후 몬테디오 야마가타 재임대.[16] 정우영과 비슷한 경우. FC 아우크스부르크 입단 과정에서 이적료가 발생했다.[17] 입단 후 믈라디 볼레슬라프 재임대.[18] 입단 후 비토리아 SC 재임대.[19] 러시아 톰 톰스크로 이적하였으나, 오래 가지 못해 떠났고 프로 커리어도 길게 이어가지 못했다.[빠른년생] [21] 부상으로 인해 지명을 받지 못했는데 때문에 구단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인 감정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22] 최초로 우선 지명을 받지 않은 대건고 출신 선수 중 인천에 입단하여 프로에 입성한 선수.[23] 한때 김봉길 감독이 기대감을 표시한 유망주였으나 우선 지명을 받고 대구대를 다니던 도중 브라질 리그로 이적했다. 그러나 성공적으로 풀리지 않으면서 K3리그를 떠돌게 되었다.[24] 대건고 3학년 당시 함부르크 SV에게 제의를 받은 유망주였으나 독일에서 부상이 반복되면서 적응에 실패했다. 결국 일본을 거쳐 K3리그와 내셔널리그를 전전하는 중.[25] 고교 졸업 직후 부천에 입단했다가, 크로아티아 2부 NK 루츠코로 이적하였다. 2018년 여름에는 3부 NK 오파티야로 이적.[26] 우선 지명을 받았다가 취소된 선수로는 최초로 인천에서 프로 데뷔를 한 선수.[27] 이기형 前 인천 감독의 아들이다.[28] 고등학교 졸업 후 우선 지명을 받지 못했음에도 자유 선발로 입단한 특이 사례. 김유성은 중간에 전학을 왔던 선수라서 우선지명 요건인 3년을 충족하지 못했다.[29] 본래 대건고 축구부 창단 멤버였으나 전주영생고 축구부가 창단하면서 전북 유소년 구단으로 옮겨갔다.[30] 군산제일고, 청주대를 거쳐 충주 험멜에 입단했었다.[31] 포항 유소년 구단인 포철공고로 옮겨갔으나 지명을 못 받았다. 우석대를 거쳐 울산 현대에 입단했으나 이후 K3리그로 떠났다.[32] 박찬숙의 아들로, 축구를 그만둔 후 모델이 됐다.[33] 삼일공고로 전학 갔고 영남대를 거쳐 서울 이랜드 FC에 입단했다.[34] 여의도고와 장훈고를 거쳐 중앙대에 입학했다. 이후 2019년 대구 FC에 신인으로 합류.[35] 2학년 시절 부상으로 고생하다가 전학을 선택했으며 이후 고교 졸업 직후 부천 FC 1995에 입단했다.[36] 라요 바예카노 유소년으로 들어갔다가 국내 복귀 이후 부천 FC 1995의 유소년 구단으로 들어가 고교 졸업 후 프로로 직행했다. 원래는 빠른 99년생이었으나 이 과정에서 학년이 밀려 이후 원래 나이와 맞게 학교를 다녔다.[37] 인창고로 전학. 가톨릭관동대를 거쳐 서울중랑축구단에 입단했다.[38] 2022년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뇌사 상태에 빠졌고, 이후 장기 기증을 한 뒤 사망하였다.[39] 세 선수가 함께 수원 FC 유소년 구단으로 옮겨갔다. 이 중 서지환은 축구선수 생활을 일찍 마치고 2024년부터 광성중학교의 코치로 부임했다.[40] 부평고로 전학간 뒤 유럽 팀인 카르비나에 진출했다.[41] 안산 그리너스 유스로 옮겼고, 대학교를 거쳐 안산에 입단했다.[42] 2학년을 마친 후 신평고로 전학갔고, 고교 졸업 후 성남 FC에 입단했다.[43] 1학년 때 부적응으로 인해 신평고로 떠났고, 고교 졸업 후 충남 아산 FC에 입단했다.[44] 흔히 광주 FC의 유소년 구단 출신으로 유명하지만, 광주로 들어가기 이전 U-12 시절은 인천 유소년 구단에서 보냈다. 이 시기에 정우영과 함께 합을 맞추기도 했지만 집이 인천이 아니라는 결정적인 문제로 인해 결국 인천 유소년 구단을 떠났다.[45] 청소년 대표팀 시절 이정빈과 더불어 인천 유소년 출신으로 꽤나 곽광받았던 미드필더. 중학교 졸업 이후에는 용호고로 진학해 인천 유소년 체계를 벗어났고 울산대를 거쳐 울산 현대에 입단하였으나 이후 3부 리그인 K3리그의 천안시 축구단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