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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중기의 무신. 이름은 이흠례(李欽禮), 자는 문보(文甫)이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태종의 적차남 효령대군의 현손이다.2. 생애
1523년(중종 17년)에 태어났다. 상술했듯 효령대군의 현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효령대군의 4남 낙안군 이녕이고, 할아버지는 낙안군의 독자 청원정 이목이며, 아버지는 청원정의 3남 금양부정 이경이다. 왕의 4대손까지 왕족으로 대우하는 법에 따라,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태종의 현손인 그의 아버지까지 받았고 이흠례부터는 받지 못했다.효령대군파의 족보를 보면, 금양부정은 1455년(세조 원년)에 태어난 것으로 적혀있다.# 족보대로라면 이흠례는 아버지와 무려 68살 차이가 난다는 결론이 나온다.
11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 진천 송씨 슬하에서 형 3명, 동생 1명과 함께 자랐다. 위에 적었듯, 이흠례부터는 좁은 의미에서 왕의 가까운 친족으로서 대우도 받고 통제도 받는 왕족이 아니었는데, 이때문에 오히려 그는 명예직이 아닌 실직에 나설 수 있었다. 왕족은 벼슬을 할 수 없었기 때문. 1549년(명종 4년)에 무과에 급제하고 이후 선전관과 전라도 판관을 역임했다. 나주 판관으로 있던 1555년(명종 10년)에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쳐들어온 왜구들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이후 방어사를 지냈다.
이후 황해도 신계 현령으로 부임했다. 재직 중이던 1557년(명종 12년)에는 오연석 등 도적들이 황해도 일대를 휩쓸며 약탈과 살인을 일삼자 주민들과 협조하여 이들을 처단했다.#
그런데 저때 토벌한 도적들은 그냥 도적이 아니었다. 저들이 속한 도적떼들은 황해도와 경기도, 심지어 한성 일대까지 엄청난 세를 불리며 활약했었다. 그들의 두목은 바로 그 유명한 임꺽정이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단순한 도적이 아니라 국적(國賊), 그러니까 반란군으로 규정할 정도로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1560년(명종 15년)에 명종은 일전에 도적들을 토벌한 경험이 있는 이흠례를 황해도 봉산 군수로 임명하여 임꺽정 무리들을 소탕하게 했다.#
이흠례는 용감히 싸웠고 임꺽정의 부하들을 많이 사로잡았다. 그러자 임꺽정은 이흠례가 신계현령으로 있을 때에 자신들에게 피해를 많이 입힌 일을 생각해서,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흠례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임꺽정의 부하 서림이 이를 관에 밀고하여 계획은 실패했으며, 관군이 앞잡이가 된 서림에 의해 임꺽정 패는 대부분 체포당했고 임꺽정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저 때 살해당할 뻔했던 이흠례는 선전관 정수익, 평산 부사 장효범 등과 함께 임꺽정 일파를 추격했으나 그들의 함정에 걸려 실패했다. 그러자 사헌부에서는 이흠례를 비롯한 토벌군에 참여한 관료들을 처벌하라고 명종에게 간했으나, 명종은 이흠례가 그동안 세운 공이 있다하여 윤허하지 않았다.# 몇 달 뒤에는 품계가 높아져 통정대부가 되었다. 그러나 사헌부에서 도적 토벌에 실패한 전적을 문제삼아 이흠례의 품계를 내리라고 명종에게 요청했는데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참고로 임꺽정은 그 1년 여 뒤인 1562년(명종 17년) 1월에 결국 관군에 사로잡히는 결말을 맞이했다.
임꺽정의 난이 진정된 후에는 청홍도[1] 수군절도사와 전라도 수사를 지냈고, 선조가 즉위한 뒤에는 충청도 수사와 김해 부사 직을 맡았다.
1585년(선조 18년) 8월 11일에 사망했다. 향년 63세였다.[2]
3. 가족과 후손
부인은 언양 김씨이다. 김씨 부인 사이에서 아들은 없고 딸만 6명을 낳았다. 그중 다섯째 사위 윤백순은 순회세자의 빈이자 명종의 며느리인 공회빈 윤씨의 오빠이다.누이 1명이 더 있었다. 누이가 낳은 딸, 그러니까 외조카는 군수이자 무관이었던 이간과 혼인했다. 그러니까 이간은 이흠례에게 조카사위가 된다. 그런데 이간 역시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이흠례에게는 부계로는 9촌 조카이다.[3]
이흠례의 할머니 파평 윤씨는 중종의 외할아버지 윤호의 누이이다. 따라서 중종과 이흠례는 부계, 즉 왕실 족보로는 10촌 형제이지만[4], 중종에게는 외가 기준, 이흠례에게는 진외가(친할머니의 집안) 기준으로 6촌 형제이다.
4. 묘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에 있다. 원래는 지금의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에 있었다. 그러나 어느 알려지지 않은 시기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4.1. 묘지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 ||||
134호 | ← | 135호 | → | 136호 |
순명비 유강원 석물 | 조선 이흠례 묘지 | 본원정사 목 보살좌상 (지장보살) |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5호 | |
조선 이흠례 묘지 朝鮮 李欽禮 墓誌 | |
소재지 | <colbgcolor=#fff,#191919>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신길동 |
시대 | 1585년(선조 18년) |
분류 | 유물 / 기타종교조각 / 유교조각 |
수량 / 면적 | 5張 |
지정연도 | 2001년 7월 16일 |
<colbgcolor=#C00D45> 이흠례 묘지[5] |
처음 묻혔던 자리에서 지석 5장이 발견되었다. 지석은 묻힌 사람의 인적사항과 무덤의 위치가 적힌 돌로, 보통 묘 앞에 묻는다. 이 지석은 2001년 7월 16일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35호로 지정받았다.
[1] 충청도를 명종 시기에 불렀던 명칭이다.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던 1549년(명종 4년)에 충주 출신 이홍윤이 문정왕후를 연산군 같다고 썼다가 그를 비롯한 300여 명이 피해를 본 일이 있었는데, 이 때 문정왕후가 어지간히 열받았는지 충주를 유신현으로 강등시키고 충주에서 따온 '충청도' 명칭도 없애어 충주 대신 홍주(지금의 홍성)에서 따온 '청홍도'로 바꾸었다.#[2]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를 적용한 기준이다. 만으로는 62세이다.[3] 이흠례는 효령대군의 4남 낙안군의 증손이고, 이간은 효령대군의 장남 의성군의 현손이다.[4] 이흠례는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현손, 중종은 태종의 3남 세종의 현손이다.[5]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