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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9 21:38:43

이제가기


1. 개요2. 기록3. 특성

1. 개요

李磾家記 / 李碑家記[1]

고려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 인용된 책. 저자는 알 수 없으며, 이름상 후백제건국군주전주 견씨중시조 견훤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이제(李磾) 혹은 이비(李碑)라는 인물의 가문 기록(家記)으로 여겨진다. 《삼국유사》가 13세기 말(1281년 ~ 1283년)에 편찬된 점을 볼 때 고려 말까지 존재하고 있었다가 이후 실전된 듯 하다.

《삼국유사》에서 인용된 견훤의 선대 및 견훤의 자녀들을 기록한 내용만 전해지고 있다.

2. 기록

李碑家記云, “真興大王妃思刀謚曰白𪀚夫人. 第三子仇輪公之子, 波珎干善品之子角干酌珎妻王咬巴里, 生角干元善, 是為阿慈个也. 慈之弟一妻上院夫人, 第二妻南院夫人, 生五子一女. 其長子是尚父萱, 二子将軍能哀, 三子将軍龍盖, 四子寳盖, 五子将軍小盖, 一女大主刀金.”
《이비가기》(李碑家記)에는 “진흥대왕왕비 사도(思刀)시호는 백융부인(白𪀚夫人)이다. 그 셋째 아들 구륜공(仇輪公)의 아들 파진간(波珍干) 선품(善品)의 아들 각간(角干) 작진(酌珍)이 왕교파리(王咬巴里)를 아내로 맞아 각간(角干) 원선(元善)을 낳으니 이가 바로 아자개(阿慈个)이다. 아자개의 첫째 부인상원부인(上院夫人)이요, 둘째 부인은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아들 다섯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 맏아들이 상보(尙父) 훤(萱)이요, 둘째 아들이 장군 능애(能哀)요, 셋째 아들이 장군 용개(龍蓋)요, 넷째 아들이 보개(寶蓋)요, 다섯째 아들이 장군 소개(小蓋)이며, 대주도금(大主刀金)이다”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제2<기이> -후백제 견훤-
李磾家記云, “萱有九子, 長曰神劒 一云甄成, 二子太師謙腦, 三子佐承龍述, 四子太師聦智, 五子大阿干宗祐, 六子闕, 七子佐承位興, 八子太師青丘, 一女國大夫人, 皆上院夫人所生也.
《이제가기》(李磾家記)에는 “견훤에게는 아들 아홉이 있으니, 맏이는 신검(神劍) 혹은 견성(甄成)이라고도 한다., 둘째는 태사(太師) 겸뇌(謙腦), 셋째는 좌승(佐承) 용술(龍述), 넷째는 태사(太師) 총지(聰智), 다섯째는 대아간(大阿干) 종우(宗祐), 여섯째는 이름을 알 수 없고, 일곱째는 좌승(佐承) 위흥(位興), 여덟째는 태사(太師) 청구(靑丘)이며, 딸 하나는 국대부인(國大夫人)이니 모두 상원부인(上院夫人)의 소생이다”
《삼국유사》 제2<기이> -후백제 견훤-

3. 특성

견훤의 조상이 신라정복군주진흥왕과 이어진다고 적고 있다. 정확히는 아자개가 진흥왕의 현손[2]이라고 주장하는데, 아자개와 진흥왕 간의 격차는 300년에 가깝기 때문에[3]아자개가 진흥왕의 후손을 사칭한 것이거나 후대의 숭조사상으로 인한 가필로 여겨지고 있다.

저자인 이제(이비)에 대해서는 아자개의 후손이라는 설[4]견훤의 후손이었으나 후백제 멸망 후 살아남기 위해 본래 성이었던 이씨로 바뀌었을 것이라는 설 등이 있다.[5]
[1] 《이비가기》. 《이제가기》와 같은 책으로 여기는 견해가 있다.[2] 증손자의 아들.[3] 진흥왕의 사망은 576년이고, 아자개는 9세기 말 ~ 10세기 초에 활동하였다. 장남 견훤이 867년에 태어난 점을 고려하면 늦게잡아도 847년경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니 현손으로 보기는 무리다.[4] 申虎澈, 後百濟 甄萱政權硏究, 一潮閣, 1993[5] 허인욱, 후백제 멸망과 그 유민, 한국중세사연구,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