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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4 17:13:49

이원영(1886)

파일:이원영(1886).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봉경(鳳卿)
본관 진성 이씨[1]
출생 1886년 7월 3일
경상도 예안현 의동면 원촌동
(現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원촌마을 706번지)[2]
사망 1958년 6월 21일 (향년 71세)[3]
경상북도 안동군
종교 기독교 (개신교, 조선예수교장로회)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798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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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종교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독립유공자 이영호(李寧鎬)는 그의 7촌 재종숙(再從叔)이며, 독립유공자 이광호(李洸鎬)와 는 그의 9촌 삼종숙(三從叔)이다.

2. 생애

1886년 7월 3일 경상도 예안현 의동면 원촌동(現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원촌마을) 706번지에서 아버지 이관호(李觀鎬, 1853 ~ 1904. 11. 14)와 어머니 의성 김씨(1849 ~ ?. 8. 13)[4] 사이의 4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다가 1919년 3월 8일 손병희로부터 서신을 받은 조수인(趙修仁)에게서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김진휘(金鎭暉)·조병건(趙炳建)·조방인(趙邦仁) 등과 함께 3월 17일 예안면 장날에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결의했다. 그 뒤 3월 11일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과 예안면사무소 서기로 있던 9촌 삼종숙 이광호(李洸鎬) 등이 각 마을별로 동지를 규합해나가자 거사 당일에 이들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거사 당일이던 3월 17일, 그는 조수인·김진휘·조병건·조방인 등과 함께 예안면 장터에 먼저 잠입해 시장 곳곳에 숨어 있다가 그날 오후 3시 30분에 이광호와 이동봉(李東鳳) 등 30여명이 예안면사무소 뒷편의 선성산(宣城山)[5]에 올라가 일본인들이 그곳에 건립한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6]를 쓰러뜨린 후, 태극기를 흔들며 예안면 장터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치자, 이를 기점으로 장터에 있던 수천명의 군중들과 함께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다.

얼마 후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 경찰 소다 토키치(曹田藤吉) 등이 출동해 25명의 군중을 체포하자, 그날 오후 7시 그는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주재소를 포위하고 구금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들이 무력을 행사하며 제지하자, 이에 격분해 돌을 던지며 주재소를 습격하고, 건물을 파괴했으며, 주재소에 있던 일본 경찰 3명을 포로로 잡아 이들의 무장을 해제시켜 시위대의 선두에 서게 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게 했다.

그러나 곧 안동군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해 빈 포를 쏘아댔고, 결국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얼마 뒤 대대적인 검거가 이뤄졌고, 결국 이때 체포되고 말았다. 1919년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에 공소하여 이튿날인 4월 1일 대구지방법원으로 이감되었다. 이어 4월 2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소요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형기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는 이에 상고했으나 5월 29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결국 경성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파일:이원영(1886)-2.png
1919년, 경성감옥에서 촬영된 이원영의 사진.

그는 복역 중에 개신교를 믿게 되었고, 1920년 4월 8일 가출옥한 후 세례를 받아 정식으로 개신교에 입교다. 1925년 안동성경학교, 1930년 평양신학교를 차례로 졸업한 뒤 영주중앙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이듬해인 1931년 안동 성경학교 교사에 부임하면서 안동군 안동읍 안기동(現 안동시 안기동) 143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옮겼고, 1933년에는 조선예수교장로회 경안노회 회장에 선출되었다. 1937년 7월 10일에는 조선총독부에 '포교계(布敎屆)'를 제출해 정식으로 목회자가 되었다.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에서 일제의 탄압에 끝내 굴복해 그해 있었던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수용하자, 장로로서 이들의 결정을 거부하고 1939년부터 꾸준히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또한 창씨개명을 반대하고 교인들의 민족사상 고취에 진력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3차례 검속되어 투옥되었다. 8.15 광복 직전에도 투옥되기도 했으나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기소유예불기소처분받고 출옥했다.

출옥 후 안동교회[7] 목사에 부임했고, 1946년에는 안동 고등성경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54년 재단법인 경안고등학원을 설립하고, 같은 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에 선출되었다.

이후 1958년 6월 21일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수곡리에 안장되었다가 1999년 11월 2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참고 문헌


[1] 원촌파(遠村派) 21세 원(源) 항렬.[2] 현재 이 지번에는 봉경이원영목사생가를 비롯해 이원영의 종증조부인 목재(穆齋) 이만유(李晩由, 1822 ~ 1904. 8. 18)의 고택인 목재고택(穆齋古宅),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시비, 이원영의 9대조이자 원촌파 파조인 원대(遠臺) 이구(李榘, 1681. 4. 29 ~ 1761. 10. 5)이 살던 원대종택(遠臺宗宅), 이원영의 6대조인 사은(仕隱) 이귀운(李龜雲, 1744. 10. 11 ~ 1823. 2. 11)이 살던 사은구장(仕隱舊庄) 등이 위치해 있다. 한편 이 지번은 1914년 작성된 지적원도에는 이원형의 형 이원국(李源國, 1875. 12. 24 ~ 1955. 9. 4)의 소유로 되어 있었고, 1979년 10월 22일 소유권이 국가로 이전되어 현재 국유지로 남아 있다.[3] 진보이씨상계파세보 하권 506쪽에는 6월 20일에 별세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4] 김억수(金億銖)의 딸이다.[5] 선성현문화단지 내 선성 산성공원이 바로 선성산이다.[6] 어대전(御大典)이란 천황 즉위식을 말하는데, 정황상 1912년에 즉위한 다이쇼 덴노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추정된다.[7] 화성동 안동교회가 아닌 금곡동에서 태화동으로 옮긴 안동서부교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