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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02:53:32

이광호(1885)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이광호
李洸鎬[1]鎬로 기재되어 있다.]
파일:이광호(1885).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휘원(輝遠)
본관 진성 이씨[2]
출생 1885년 4월 27일
경상도 예안현 의동면 원촌동
(現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3]
사망 1942년 12월 14일 (향년 57세)[4]
종교 기독교 (개신교, 조선예수교장로회)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586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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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종교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퇴계 이황의 13대손이다. 독립유공자 이영호는 그의 8촌 삼종제(三從弟), 시인 이육사독립유공자 이원영은 9촌 삼종질(三從姪)이다.

2. 생애

1885년 4월 27일 경상도 예안현 의동면 원촌동(現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서 퇴계 이황의 12대손인 아버지 이중익(李中益, 1852 ~ 1918. 7. 26)과 어머니 나주 정씨(羅州 丁氏, ? ~ ?. 6. 7)[5] 사이의 3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예안군 읍내면 교촌동(現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7번지)[6]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예안면사무소 서기로 근무하던 그는 1919년 3월 8일 손병희로부터 서신을 받은 조수인(趙修仁)에게서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3월 11일 밤 9시 예안면사무소 숙직실에서 예안면장 신상면(申相冕)을 비롯해 이시교(李時敎)·이중원(李中元)·이남호(李南鎬)·김창옥(金昌沃)·백남학(白南鶴) 등과 만나 면장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권유해 찬성을 얻어냈다. 이에 그는 동지들과 함께 예안면 장날인 3월 17일을 거사일로 결정하고, 예안면사무소에 비치된 등사판을 이용해 기미독립선언서태극기를 대량으로 제작한 뒤 인근 마을에 거사 계획을 전달하는 등 사전준비를 실행했다.

거사 당일이던 3월 17일 오후 3시 30분에 그는 계획대로 이동봉(李東鳳) 등 30여명의 동지들과 함께 예안면사무소 뒷편의 선성산(宣城山)[7]에 올라가 일본인들이 그곳에 건립한 어대전기념비(御大典紀念碑)[8]를 쓰러뜨린 후, 태극기를 흔들며 예안면 장터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를 기점으로 시장 곳곳에 매복해 있던 조수인·김진휘(金鎭暉)·조병건(趙炳建)·이원영·조방인(趙邦仁) 등과 장터에 나와 있던 수천명의 군중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했고, 수업 중이던 예안공립보통학교 학생들까지도 가담해 예안면 장터를 돌며 행진했다. 그 뒤 이광호가 시위대열에 가담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주재소에서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 경찰 소다 토키치(曹田藤吉) 등이 출동해 그를 비롯한 25명의 시위군중을 체포하였다.

1919년 3월 25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이에 공소해 곧 이감되었다. 4월 1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공소가 기각되었고, 이에 상고했으나 5월 19일 고등법원에서 상고가 기각되고 형이 확정되어 결국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예안기독교청년회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921년 신응한(申應漢)·신상면·이시교와 함께 불온 서류 등과 관련해 예안경찰서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다가 4월 28일 안동경찰서에 송치되었다. 그 뒤 1921년 6월 24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의 공판에서 소위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금고형 6개월을 선고받고 이감되었다가, 이에 공소하여 그해 12월 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고 벌금형 20원을 선고받은 대신에 납부치 않을 시 노역장에 20일간 유치되는 판결을 받았다.

형기를 마친 뒤에는 안동군 안동읍 법상정(現 안동시 법상동) 36번지로 이주했고, 1937년 7월 23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소속 목회자로 신고해 활동했다. 이후 1942년 7월 31일 목회활동을 중단한다고 조선총독부신고했고, 그해 12월 14일 사망했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당초 안동시 녹전면 갈현리 굴티마을 선영에 안장되었다가 2007년 10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3. 참고 문헌

독립유공자 공훈록 3권(1987년 발간)

[1] 1921년 12월 7일 수형인명부에는[2] 원촌파(遠村派) 20세 호(鎬) 항렬.[3] 1919년 5월 19일 수형인명부·디지털안동문화대전 참조.[4] 진보이씨상계파세보 상권 487쪽 참조.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2월 1일에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지만, 1943년 3월 10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에 이광호가 1942년 7월 31일 목회활동을 중단한다는 이른바 '포교폐지계(布敎廢止屆)'를 제출한 것으로 보아 당시까지는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 정대연(丁大淵)의 딸이다.[6] 서부리 7번지는 현재 인근의 지번들과 통합되어 도산면 서부리 5-2번지로 남아 있다. 1910년대 작성된 지적원도에는 당시 서부리 7번지가 예안군향교 소유로 되어 있었다.[7] 선성현문화단지 내 선성 산성공원이 바로 선성산이다.[8] 어대전(御大典)이란 천황 즉위식을 말하는데, 정황상 1912년에 즉위한 다이쇼 덴노의 즉위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