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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12:42:00

이승하(야구선수)/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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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롯데 자이언츠
2.1. 2001~2008 시즌2.2. 2009 시즌2.3. 2010 시즌2.4. 2011 시즌2.5. 2012 시즌2.6. 2013 시즌2.7. 2014 시즌2.8. 2015 시즌2.9. 2016 시즌2.10. 2017 시즌2.11. FA
3. 은퇴4.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롯데 자이언츠 소속 외야수 이승하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

2. 롯데 자이언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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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2001~2008 시즌

2001년, 8888577이 시작된 롯데에 입단했다. 그 때 등번호는 0번. 2004~2005년에 군복무를 하고 제대하여 2006년 복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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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 하이를 찍은 2007년
전역 후 등번호가 1번이 되는 동시에 강병철 감독이 밀어줬고, 2007년 전반기에는 붙박이 1번타자로 내내 3할 이상의 타율을 기록하며 드디어 기량이 만개하나 싶었다. 자신의 생일날인 5월 4일에는 무려 오승환을 상대로 끝내기를 치기도 하며 자리를 잡나 싶더니, 6월 20일 홈 슬라이딩 도중 손등 골절을 당하며 모든게 날아갔다.

그래도 전반기의 활약 덕택에 투표로 올스타전에 뽑혔다. 대개 부상을 당한 선수들, 특히 손등 골절로 타격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까지 되면 출전을 고사하기 마련인데, 본인은 자신의 첫 올스타전이라는 미련 때문인지 1회초 타석에 들어서 스트라이크 하나 먹고 바로 대타로 교체되는 쪽을 택하면서까지 기어이 출전했다.[1] 시즌 막바지에 복귀해서 비록 규정타석 미달이긴 했지만 .301의 타율로 간신히 3할타율을 지켜내며 시즌을 마무리했다.

2008년 이후로는 주로 대주자 및 대수비 요원으로 뛰었다. 사실 2007년에 당한 부상이 그를 구렁텅이로 내몬 셈이었다. 사실 07년에 당한 부상여파로 인해 타격폼이 바뀐 이유가 크다고 보는 것이 맞다. 최고의 해를 보낸 2007시즌과 비교해서 은퇴시즌까지 타격폼을 보면 미세하지만 차이가 있다. 타격폼의 차이도 그렇고, 정말 잘맞은 타구가 상대 외야수의 글러브로 빨려 들어가는등 운도 지지리 없다.

그래도 수비력 덕분인지 2008년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에 주전 중견수로 출전했다. 하지만 펜스플레이 도중 부상을 당하며 최만호와 교체되었고, 생애 첫 가을야구를 끝내야했다.

2.2. 2009 시즌

2009 시즌에는 보통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7~8회쯤 대수비 요원으로 많이 나왔는데, 선발 투수가 우완이거나 우익수좌익수가 공격력은 뛰어난데 수비가 좀 나쁜 선수라면, 중견수 선발로 나오기도 했다. 농담삼아 롯데 최고의 마무리는 존 애킨스가 아니라 이승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즌 막판엔 괜찮은 타격도 선보이며 2번 타자 중견수로 주전 출전했고, 다시 한번 가을야구에 주전으로 출전하였다. 하지만 3경기동안 2번타순에서 10타수 1안타로 부진하여 4차전엔 벤치로 밀렸다. 이우민이 출전하지 않은 4차전에 롯데는 이우민 대신 중견수로 자리를 옮긴 김주찬의 에러성 플레이를 시작으로 대량실점하여 패했다.

2009 시즌에 이우민은 타율 0.259, 홈런0, 타점 15, 도루 12, OPS 0.648의 성적을 기록했다.

2.3. 2010 시즌

시즌 극초반에 몇차례 선발 출장이 있었지만, 타격에서는 2008 시즌, 2009 시즌보다 더 극악한 성적을 보이면서 완전히 경기 후반에 팀내 대수비나 대주자 요원으로 자리잡는 듯해 보는 팬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2]

9월 15일 결승타를 쳤다. 오래간만에 결승타도 쳤는데 인터뷰는 동점타의 주인공...

2010 시즌막바지 준플레이오프를 앞두고 맹타를 휘둘렀다. 사실 2009년에도 시즌 말에 잠깐 잘쳤다.

2010 시즌 정규시즌 기록은 타율 0.244 홈런 0 타점 9 도루 2 OPS 0.613.

이승화는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2타수 무안타, 타율&장타율&출루율 0을 기록했고, 팀은 2연승 뒤 3연패로 탈락했다.

2.3.1. 캔버라 캐벌리

시즌 종료후 10월 29일부로 11월 6일부터 2011년 1월 22일까지 열리는 MLB 주관의 해외 윈터리그인 호주 야구 리그의 캔버라 캐벌리팀에 허준혁, 문규현, 장성우, 이정민, 진명호 등과 함께 교육 목적으로 파견되었다.

최종 기록은 타율 0.226, 홈런 2, 타점 6, OPS 0.643. 이래서야 전준우의 3루 전환에 따른 중견수 경쟁에서 이기기 힘들 듯.

2.4. 2011 시즌

시범 경기를 치르는 동안 2011 시즌이 상당히 기대가 될 것으로 보였다. 무엇보다 이우민의 발목을 잡았던 타격이 2011 시즌 시범경기에서 매우 발전이 된 것으로 보였기에 그의 2011 시즌의 미래는 밝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내려갈 타율은 내려간다고, 시즌이 가까워오자 그의 타율은 급격하게 하강했다.

일단은 타율과 상관없이 개막전부터 중견수 선발이 확정이었다. 2010 시즌 중견수 포텐이 터진 전준우의 3루 복귀로 인해 실질적인 경쟁자는 김주찬뿐이었는데 모두가 알다시피 김주찬은 수비를 정말 못한다. 하지만 김주찬의 기동력과 타격을 보자니 안 쓸 수도 없고 정말 계륵인 상황에서 예기치 못한 손아섭의 부상으로 꼭 중견수가 아니라도 개막전부터 외야선발이 확정이 된 상태였다.

거기다가 신임 감독인 양승호 감독을 필두로 롯데에서 가장 신경을 많이 쓰는 선수 중 한 명이 바로 이우민이였는데 이 기회를 잡아서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모든 롯빠가 꿈꾸던 이우민 붙박이 주전 복귀는 머지않았다고 볼 수가 있었다.

개막전, 4타수 0안타 3삼진 1볼넷을 기록, 내려갈 타율은 내려간다라는것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마냥 깔 수만 없었던 것이 선구안이 상당히 개선된 것으로 보였으며 류현진이 던진 공의 10% 이상을 혼자서 다 받아냈기 때문에 '투수가 류현진이라서 못했고 다음 경기는 기대해보자'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다음날 역시 무안타에 폭풍삼진을 거듭해줌으로써 역시 클래스는 여전하다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손아섭이 복귀하는 순간 벤치로 전락할 가능성이 상당히 컸다. 그리고 4월 9일 17타수 무안타 기록을 갱신하면서 좀 엽기적 형태로 그걸 넘는 환상의 라인이 구성되었다. 좌익 홍성흔, 중견 김주찬, 우익 박종윤.

4월 9일 기준 타율 0.000, 홈런 0, 타점 0, 1볼넷(!), 7삼진, 장타율 0.00 OPS 0.056을 기록 했다.(17타수 무안타 중) 이 정도 되니 이미 타격을 잘하네 못하네를 떠나서 무안타 기록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양승호 감독이 언제까지 이우민을 주전으로 기용할 지가 더 관심사가 되었다.

4월 12일까지 타율 0.000을 기록하며 롯데팬들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이걸로 20타수 무안타. 양승호 감독은 30타수 무안타가 된다해도 괜찮으니 부담가지지 말라고 언질 준적이 있지만 이쯤되면 이게 1군 선수가 맞긴 한건지조차 의심스러운 성적.[3] 초반 팀의 행보가 너무나도 안 좋았기 때문에(그렇다고 팀 타격만이라도 2010년 수준인 것도 아니었고) 부담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수가 없었다. 원래 부담감을 주면 더 부진해지는 타입이다 보니 연습 때와 경기 때의 스윙이 다르다는 소리를 몇 년째 듣고 있었다. 우선 심적 부담감을 덜어줘야 할 텐데 이렇게 무작정 밀어 준다고 해결될 선수가 절대 아니었다.

4월 14일에는 1점 뒤진 2사 1, 3루에서 '대타'로 나왔고 또 찬스를 날려먹었다. 이쯤되니 감독이 승리보다 이우민 살리는데 힘쓰고 있다는 말이 들릴 정도. 양승호 감독이 며칠 전 아예 인터뷰로 인증까지 해 버렸으니 그런 말이 나오는 것도 당연했다. 내 아들 이승화

4월 15일 LG전에선 8:2로 지고 있을 때 9회말 2아웃에 교체되어 땅볼로 광속 아웃. 그리고 경기 종료!! 이걸로 22타수 무안타. 참고로 4월 15일까지 출루한게 볼넷 한번 뿐인데 그 투수가 류현진이다. 4월 18일 기준으로 이우민이 1루를 밟은 횟수는 총 3번이다. 저 볼넷 한 번, 상대방 에러로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주자로 한 번. 시즌 통틀어서 살아있는 상태로 1루를 밟은 횟수가 고작 3번이다 3번. 참고로 연속무안타 한국기록은 OB의 유지훤이 1983년에 기록한 47타수였고, 2015년에 손시헌이 이 기록을 갱신하는 쾌거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4][5] 어떻게 보면 양승호 감독의 과도한 애정이 이우민을 더욱 어둠의 구렁텅이로 밀고 있는 느낌도 들었다.

훗날 스톡킹에서 말하기를, 이 당시 본인은 꾸준히 밀어주고있는 감독님 보기도 무안했던데다 구장으로 출근하는 것도 시합 뛰는 것도 정말 싫었다고 회고했다. 한번은 자신의 싸이월드에 어느 팬이 꾀병이라도 부리라며 제발 나오지말라는 내용의 쪽지까지 받았다면서 자신은 괜찮다고해도 행여나 부모님이 서운해하실까봐 그 후로 인터넷도 거의 끊어버렸다고...

결국 2군으로 내려갔다. 갈매기 마당에 롯데 2군을 자주 관전하는 사람이 올린 라인업에 중견수로 출장하고 있는 걸로 나왔다. 그리고 롯데 팬들이 바라던 첫 안타는 2군에 출장한 날 바로 쳤다.

5월 24일, 다시 1군에 승격.

그리고 6일만에 드디어 그 날이 오고 말았다. 5월 29일, 9회초 32타석 27타수만에 유동훈으로부터 투수정면 빠지는 안타로 올 시즌 첫 안타를 기록했다.[6]

2011년 6월 12일 사직 롯데 대 한화 경기에서 선발출장하였다. 이날 롯데는 무려 17점을 몰아치며(21안타 3홈런을 몰아치며) 한화에게 17:2 로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우민은 6번 타석에 나와서 5타수 무안타 1볼넷을 기록하며 타율이 0.087로 떨어졌다. 이후 SK전에서 2안타로 멀티히트를 기록하며 1할은 넘겼다.

7월 17일 기준 타율 0.125, 홈런 0, 타점 1, OPS 0.374.

9월 3일 잠실 롯데 대 LG 경기에서 교체출장. 5:1로 이기고 있던 9회초에 김선규 투수를 상대로 2타점 짜리 3루타를 쳤다! 1, 2루에 주자가 있긴 햇지만 이미 2아웃이라 포기하고 있던 팬들이 깜짝 놀란 적시타.

2.5. 2012 시즌

4월 7일에 열린 개막전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팀이 스코어 1:3으로 이기던 6회말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황성용의 대타로 나와 류현진에게 안타를 쳐냈다. 이승화는 이날 2타수 1안타를 기록했고 팀은 1:4로 승리하였다.

5월 11일, 투런 홈런을 쳤다! 이로 인해 롯데팬과 야구팬이 충격에 빠질 했으나 이날 경기가...

6월 13일 경기에서 1:0리드 2사 만루 상황 신본기의 어처구니 없는 콜 플레이 때문에 원래 신본기가 잡았어야 할 타구를 신나게 달려가면서 쫓아갔으나 결국 잡지 못했다.

2.6. 2013 시즌

장성호가 롯데에 영입되며 등번호 1번을 가져간지라 2013년부터 51번을 달게 되었다.[7] 시즌 초 맹타를 휘두르며 롯데 외야 마지막 퍼즐이 되리라 예상했던 김문호가 5월경 부상으로 빠지면서, 이우민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졌다.

5월 28일에 대주자로 출장하여 1득점을 기록하였다.

다음날인 5월 29일에 3타수 2안타를 기록하였다. 또 다음날인 5월 30일엔 3타수 2안타 2타점 1도루를 기록하였다. 롯데 자이언츠 갤러리에서는 이토이 요시오랑 영혼을 바꾼 게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왔다.[8]

6월 2일 삼성전까지 5게임 연속 안타를 쳤다.

6월 6일 롯데 홈경기에서 다시 3타수 2안타 3타점 2득점의 맹타를 쳐냈다. 특히 7회말 롯데가 3:7로 앞서있고 2사 만루인 상황에서 싹쓸이 3타점 2루타를 쳐내며 쐐기타를 박아냈다. 후속타자인 손아섭이 안타를 쳐내며 득점도 성공했고, 이날 경기는 롯데가 KIA 타이거즈를 영혼까지 털어버리며 3:13으로 승리했다.

6월 9일 LG전에서는 초반 흔들리는 팀 분위기를 2회 호수비를 통해 반전시켰고 타석에서는 4타수 2안타 2득점 맹활약을 하면서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이날 KBSN 수훈선수 선정.

6월 12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선 4타수 3안타 1득점을 기록했고 팀도 스코어 3:6으로 승리했다. 1군에 올라와 보여주는 폼 대로라면 2007년의 재림을 넘어설 분위기.

6월 19일에는 결승타를 친 박준서의 뒤를 이어 도망가는 2타점 적시타를 치면서 또다시 3안타 경기를 보여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6월 20일 4타석 부진했지만 마지막 타석에서 안타를 쳐 출루, 결승 득점을 올렸다.

6월 21일 문학 SK전에서 결승 역전 투런의 초석이 되는 볼넷을 얻으며 2루타 하나, 볼넷 두개로 100% 출루하였다.

6월 21일 기준 타율 0.315(73타수 23안타) 11타점 16득점 16삼진 5볼넷 3도루이며 5월 28일 이승화 콜업 이후 팀은 15승 6패로 선전하고 있다. 특히 안타를 친 14경기 중에서 팀은 12승을 거두고 있다.

국내 최고급 외야수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이지만, 웃기게도 가장 수비가 쉽다는 좌익수 포지션으로 출장하고 있다. 이유는 전준우중견수밖에 할 수 없기 때문. 가끔 좌익수 김대우 같은 창의적인 라인업이 나오면 중견수로 가기도 한다. 타격 순서는 좌우놀이에 따라 정훈과 함께 2번-9번자리를 왔다갔다하며 출장 중. 게뽕 키스톤과 함께 타격에서 롯데를 먹여살리고 있다.

하지만 내려갈 타격은 내려간다고 그 뒤로 기약 없는 타격 슬럼프 때문에 타율은 2할 5푼대로 뚝 떨어졌다. 7월 타율은 무려 36타수 4안타 0.111. 박흥식 코치가 무조건 주전보장을 약속했음에도 연약한 멘탈은 나아지지 않은 듯했다. 성적이 좀 올라가자 2번 타순으로 자주 출전하면서 부담감을 많이 느끼는 듯.

눈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감염성 결막염일 확률이 있어 선수들과 떨어져 치료를 받았으며, 상황에 따라 엔트리에서 말소될 수도 있다는 듯했다.

SK와의 경기에서 발목이 돌아가는 부상을 입고 말았다. .250이나마 꾸준히 치는 걸 보고 눈물을 흘리던 롯데 팬들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너무나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2.7. 2014 시즌

우천 딜레이 되었던 3월 30일 한화 이글스와의 홈 개막전에서 전준우를 벤치로 밀어내고 주전 중견수 및 1번타자로 선발 출장하였다.

5회말 2-1 으로 볼카운트가 불리한 와중에도 상대투수 케일럽 클레이의 몸쪽 변화구를 노려 깔끔한 우전안타로 팀의 2014시즌 첫 타점을 기록하였으나 바로 이어진 한화 포수 김민수의 피치아웃에 간파당해 도루자를 기록하며 아웃되었다. 이날 이우민은 교체없이 4타수 1안타를 기록하였다.

전준우의 부상 및 컨디션 난조 때문에 1번 중견수로 자주 출전하고 있으나 성적은 신통치 않은 편. 이대로라면 전준우가 중견수 수비를 무난히 소화할 정도로 회복되었을 때 준수한 컨택과 뛰어난 선구안을 가진 김문호에게 밀릴 가능성이 높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보다 우월한 타격을 보여주는 정훈과 김문호도 톱타자로만 나오면 삽을 푼다는 점. 시즌 초반 선발출장 기회가 있을 때 조금이라도 눈도장을 찍어야 할듯.

결국 타격부진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4월 25일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이후 5월 7일에 자신을 대신해서 올라온 김민하가 내려가는 대신 다시 1군에 콜업되었다. 2군 9경기에서 4할대를 기록한것이 콜업의 이유인듯. 그리고 김민하는 바로 퓨처스 경기서 발을 접질리는 부상을 당했다.

5월 7일 사직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 전날 가벼운 부상으로 결장한 전준우를 대신해서 9번타자 중견수로 출장하여, 2타수 1안타 2볼넷을 기록하였고 3번의 출루가 모두 득점으로 연결되어 팀의 6:10 승리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타격에서 답이 없는 모습을 계속 보여줬고 결국 23일에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이후 6월 24일에 이틀전 말소된 김주현을 대신해 다시 등록되었다.

6월 26일 대전 한화전에서 손바닥 통증을 호소하며 중간에 빠진 루이스 히메네스를 대신해 5회부터 수비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히메네스의 타순에 들어가 4번타자!가 되었다. 팬들은 당연히 자동아웃을 예상 했지만 놀랍게도 역전 2타점 결승타를 쳤다!

7월 10일 삼성전에서는 7회말 이지영의 좌익수 플라이 때 완벽한 캐치와 명품 송구로 3루주자 김상수를 홈에서 여유있게 잡아내며 9회초 대역전승의 발판을 놓았다. 그래도 타고투저와 박흥식 버프로 거의 모든 롯데 타자들의 성적이 향상되는 상황에서[9] 시즌 내내 2루타 하나 기록하지 못하며 주전의 길은 요원하다.

이후 7월 14일에 다시 제외되었다. 기회는 자주 부여받고 있지만 본인이 전혀 살리지 못하고 있다. 안타까운 실정.

시즌 종료 후 '이우민'으로 개명을 했는데 2015년 1월 4일에 가서야 처음으로 포털에 기사가 떴고, KBO 홈페이지나 롯데 자이언츠 홈페이지에는 아직 이승화 그대로 표기되어 있었다가 2015 시즌이 시작되고 나서야 변경되었다.

2.8. 2015 시즌

장성호가 방출됨에 따라 등번호가 다시 기존에 달던 1번이 되었다. 중견수 자리는 외국인 타자 짐 아두치에게 밀리고, 좌익수 포지션에서도 하준호김민하에게 밀리며 대수비, 대주자로 주로 출전하다가 4월 7일 뜬금없이 사이드암 신용운을 상대할 목적인지는 몰라도 대타로 나섰다. 물론 결과는 얄짤없이 삼진. 4월 8일에도 경기 막바지에 대타로 나섰으나 하필 상대가 임창용인지라 또 삼진으로 물러났다. 이때까지 성적은 3타수 무안타 1볼넷.

결국 1군에서 말소되었다. 개명효과는 전혀 없는 듯하다.

하지만! 5월 29일 다시 엔트리에 복귀, 5월 31일 울산 문수경기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8회 대타로 등장해 1타수 1안타 1도루 1득점 활약했다. 안타 직전의 파울홈런을 칠 때의 스윙이 이우민답지 않았다는 평가.

6월 24일 또다시 엔트리에 복귀, 당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신용운을 상대로 무려 홈런을 때려냈다!!! 1139일만의, 통산 7호 홈런.

7월 30일 4회 말 동점 쓰리런을 때려냈다. 롯데 팬들은 드디어 살아나는가 꼴레발중. 스톡킹에서 밝히기를 이 때 심수창은 덕분에 패전은 간신히 면했다는데 정작 이우민 본인은 심수창이 선발이었는지는 몰랐다고...

8월 6일 9회초에 3호 솔로 홈런을 때렸다!

8월 8일 한화전에도 7회초 박정진 상대로 솔로포를 쏘아 올렸다. 시즌 4호이자 통산 10호! 참고로 7월 달만해도 1할대의 타율이었는데 8월에 각성한건지 8월에만 무려 5할대의 타율을 기록하고 있다! 늦게라도 터지는 게 어디냐

8월 13일 kt전 멀티히트와 동점을 만드는 2타점 적시타를 때려냈다. 규정타석 미달이긴 하지만, 무려 8년만의 3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중이라고. 개명효과가 있을지도?

하지만 9월 6일 기준으로 돌아올 타율은 돌아온다고 2할 3푼대를 찍고 있다.

9월 18일 1회말 무사 2루 상황에서 보내기 번트 실패[10] 주자 손아섭이 3루에서 횡사하면서 감독과 함께 쌍으로 까였다. 기사 "롯데 9월 첫 연패, 치명적인 1회 번트 시도" 결과적으로 이날 경기를 1:3으로 내주면서 2연패를 기록, 롯데는 5위 수성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18일 기준 6위 기아와 반게임 7위 SK와 한게임차에 불과하다.

정말 열심히 하는데도 이러니 욕도 못하고 한숨밖에 안 나온다.

당초 시즌 끝나고 FA 신분이 된다는 소리가 있었지만 등록일수가 부족한 탓이었는지 자격 미달로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다.

2.9.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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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롯데가 마무리 손승락을 FA로 영입할 때 등번호 1번을 내주게 되면서 등번호가 또 바뀌었다. 이번에는 심수창이 달던 17번. 분명 못하긴 못하는데 하나도 기대를 안 하면 아주 가끔 영양가 만점의 안타를 쳤다.

시즌이 끝나고 드디어 FA자격 요건을 채우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본인의 입지가 좋지 않다는 걸 감안했는지 FA 신청을 하지 않았다. 설령 FA 신청을 한다고 해도 보상선수까지 내오면서 타격감 제로인 이우민을 데려갈 팀은 어디에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듬해에 더 안 좋은 방향으로 재현되었다.

2.10.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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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전 당일부터 이해 할 수 없는 도루 시도를 했다 잡히며 팀 패배를 자신의 손으로 매듭짓고 말았다. 동정심으로 참았던 팬들조차 가열차게 비판을 하는 중.

하지만 4월 6일 넥센전에서는 김문호의 담 증세로 인해 선발로 출장했는데 홈런을 쳤다! 그것도 밀어서!! 이로써 까임의 목소리는 일단 사그러든 상태. 게다가 이날의 기록은 무려 4타수 3안타이다. 다음 날에도 1안타 1볼넷을 얻어냈다.

심지어 4월 8일 LG전에서는 1안타를 친 이후 6회 말 승부처에서 고의사구를 얻어 1루로 출루했다. 다음 타자가 강민호의 부상때문에 대신 선발 출장했던 김사훈이었기 때문. 이우민이 고의사구를 얻어낸 건 2007년 이후 10년 만의 일이다.

4월 6일 이후 장타는 없지만 선발 출장을 할 때마다 꾸준히 안타를 치며 연속 안타 기록을 이어가다가 4월 15일 삼성전에선 양 팀의 점수 차이를 2점으로 벌리는 3루타를 쳐 내며 이번 시즌 9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달성했다. 9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개인에게는 2015년 8월 13일 이후 1년 반 만의 일이며 3루타를 친 건 그보다 더 오래 전인 2011년 9월 3일 이후 처음. 출전 경기로만 따지면 작년 8월 30일 이후 11경기 연속 안타이다.

그 후로도 경기에서 계속 나오면서 최소한의 평타는 쳐주었다.

5월 23일 SK전에서는 손승락이 9회말 블론 세이브를 범해 동점을 내주고 연장 10회초에 3점을 내주며 패색이 짙었던 10회말 상대 마무리 박희수를 상대로 동점 3점홈런을 날렸다. 이 때, 3점 홈런 타구가 날라갈 때, 당시 외야석이 찍혔는데 관중들도 이경기는 안되겠다 싶었는지, 외야에 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을 만큼 패색이 짙은 경기였으나, 기어이 동점에 성공하고, 번즈가 끝내기안타를 친 희대의 명경기가 되어버렸다.

5월 24일 SK전에서도 5회말 김동한의 2루타와 손아섭의 내야안타로 2사 1,2루에서 좌익수쪽 안타를 때려내며 1:0으로 끌려가던 승부를 원점으로 되돌리는데 성공하여 이 경기의 숨은 공신 중 하나가 되었다.

6월에 들어서면서 주전 외야수들인 전준우, 김문호, 손아섭이 잘해주고 있다보니 선발보다 백업으로 주로 출전하고 그로인해 타격감이 왔다갔다하다보니 부진에 빠지면서 도로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았고, 벤치에 머물러있는 일이 잦았다. 3할대던 타율도 2할 7푼까지 내려왔다. 이 정도 타율도 우리가 알던 원래의 이우민이라면 나쁜 건 아니지만.... 그래도 6월 22일에 시즌 4호 홈런을 쳤다. 627대첩에서는 대타로 나와 내야안타와 데드볼 하나를 기록했다.

7월부터는 간간히 대타와 대수비로 나오고 있는데, 대타 타율이 선발출장 타율보다 떨어진다는 것이 걸림거리. 그래도 2할 6푼~7푼대는 꾸준히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이후 8월 중순에 2군으로 내려갔다가 9월 확장엔트리에 콜업되었다. 콜업된 후로는 주로 대수비로 나오고 있다.

9월 17일, SK와의 마지막 홈 경기에서 8회에 대수비로 나온 후, 2사만루에서 데드볼로 밀어내기 타점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경기로 역대 138번째로 개인 통산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10월 9일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8회초에 대수비로 등판했다.

10월 13일 준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박헌도의 대수비로 나왔고, 8회초에도 타석에 들어섰으나 내야땅볼로 아웃되었다.

10월 15일 준플레이오프 5차전에서 신본기의 대타로 나와 에릭 해커를 상대로 안타를 때려냈다!! 하지만 팀은 패하며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

2.11. FA

지난시즌부터 FA 자격을 가지고 있는데, 올해 2차 드래프트가 있기도 하고 나름 커리어하이에 가까운 시즌을 보냈기에 FA 선언을 할 가능성이 있어졌다. 선언을 하더라도 주전 중견수인 전준우의 수비가 상당히 못미덥다는 게 밝혀졌고, 또 다른 주전 외야수이자 대어 중의 대어인 손아섭 역시 FA가 되기에, 롯데 구단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계약해 줄 가능성도 꽤나 높아졌다. 당장 손아섭이 이적하거나 메이저 진출을 한다 치면 나는 우익수다를 또 찍어야 하기 때문.

FA 자격 유지로 FA 선수 명단에 나왔다. 그리고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FA 시장으로 나왔다. 통산 타율 2할 3푼대, 직전 타율 2할 5푼대, OPS 7할대에 나이가 37인 외야수를 보상 선수 줘가며 데려갈 팀은 없을 테니[11] 보호선수 20인에 들지 않으면서 롯데에 잔류하려고 하는 것 같다는 추측이 있었다.

2군 코치직을 제안받았으나, 거절했다고.[12] 아직 현역 연장 의지가 있는 듯. 나중에 다시 협상 테이블을 차린다고 한다.

그러나 손아섭은 4년 98억에 잔류했고, 민병헌이 4년 80억에 영입되면서 롯데 팬들은 '잘 나가줘서 고마워. 그냥 박종윤이랑 같이 은퇴나 해.'라고 아쉬워하지도 않고 오히려 기뻐했다.

결국 롯데에서 보상 선수 없이 놔주기로 하면서 사실상 롯데와 결별했다. 이변이 없다면 이대로 현역 은퇴가 기정사실화되고 있다. 사실 5년 동안 좌익수 자리가 무주공산이었던 롯데의 사정상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지 다른 팀이었다면 진작에 방출되었더라도 할 말이 없는 성적이기 때문에 타팀 이적은 가능성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롯데는 김문호가 포텐을 터뜨린 데다가 민병헌까지 영입했고, 백업 외야수로도 나경민이 주루와 타격 모두 이우민보다 나은 성적을 보여주고 있고 제6 외야수로도 이우민보다 나은 장타력을 가진 박헌도라는 옵션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롯데에서도 더 이상 자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롯데는 2017 시즌을 앞두고 고만고만한 백업 수준의 선수들만 넘쳐다던 외야 자원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김민하를 방출했는데, 김민하는 통산 타율 및 장타율에 있어 모두 이우민보다 뛰어난 성적을 기록하고 있는데다가 나이마저 어리다. 이우민은 방출된 김민하보다도 낮은 기록을 가지고 있었지만 계속 팀에 남게 되었는데, 매우 성실한 선수라는 긍정적인 이미지와 수비 실력과 좌타로서의 가치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2017년 12월 19일 전화 인터뷰에서 자신의 심정을 허심탄회하게 고백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 롯데 팬들은 이우민이 알아 주는 노력파라는 것만큼은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비난이나 욕설같은 험악한 소리만 없을 뿐, 대체로 냉담하기 짝이 없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간 오랫동안 노력해 왔고, 또 그 노력만큼 기회를 받았지만 그때마다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여온 탓에 동정심에 응원하던 팬들도 FA 선언과 함께 오히려 "싸구려 감성팔이 하지 마라"라는 말과 함께 전부 떨어져 나간 상황.

개인 훈련에 한창인 2018년에 접어들어서도 구단은 묵묵부답이고 타 구단 역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롯데는 아예 대놓고 최준석, 이우민과 계약을 안 하겠다고 선언하면서 FA 미아가 될 확률이 더 높아졌다. 덤으로 롯데가 사인 앤드 트레이드로 영입한 채태인은 포지션만 1루수로 다를 뿐, 이우민과 같은 좌타자다. 게다가 채태인은 이우민보다 타격이 월등히 낫다.

FA 시장 개막 이래 70여일이 지나고 미아가 될 것만 같았던 김주찬, 정근우, 이대형, 안영명마저 난항 끝에 계약을 마쳤다. 이제 남은 FA 신청자들은 이우민과 최준석 2명뿐이었으나 2월 11일에 최준석이 사인 앤 트레이드 형식으로 NC 다이노스로 이적했다. 이제 남은 FA 미계약자는 본인 혼자다.

대체로 2010년대의 구단들도 팬들도 더 이상 정으로 야구하는 것은 지양하는지라, 대놓고 욕은 못해도 "그냥 코치 제의받고 깔끔하게 은퇴했으면 좋았을 것" 정도로 여론은 차갑기만 하다. 그나마 베테랑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던 구단과 지도자도 2010년 중반 들어 거의 사라졌다.

이후 스톡킹에서 fa 때 비화를 털어놓았는데 롯데에서 계약이 안되면 은퇴를 각오하고 신청을 했다고한다. fa가 아닌 다른 케이스로 이적해서 후배들과 경쟁하며 1 ~ 2군 왔다갔다할바에 fa 신청을 해서 헐값에라도 이적을 한다면 투자한 돈이 있어서인지 후배들보다는 먼저 기회를 잡을 것같다고 생각했다고. 하지만 갈수록 초조해지자 본인도 더 이상은 무리겠다싶었는지 일찌감치 전지훈련을 떠났음에도 그냥 몸만 만들었으며 귀국해서도 씁쓸한 나머지 술도 많이 마셨다고한다.[13]

3. 은퇴

그저 그런 선수였는데 너무나 아껴주시고 좋아해 주셔서 덕분에 17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야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하다는 말 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최대한 공부 많이 해서 좋은 지도자가 되어 여러분 앞에 다시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8년 2월 26일, 스포티비와의 인터뷰 中,

결국 2018년 2월 24일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지도자 수업을 받을 예정이라고.

금액적으로 보면 1군 코치의 초임연봉이 대략 5,000만원선에서 정해는 걸 생각하면 애초에 선수로서 6,000~7,000만원대에서 연봉을 받았던 이우민에게 경제적 타격은 그리 심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그의 성실성과 외야 수비 노하우 등을 생각해 본다면 현재의 무직 상태가 절대 길지 않을 것이며, 능력에 따라서는 코치 생활로 선수 시절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도 있다.[14] 선수로서는 비록 잠재력을 피우지 못했지만, 그의 현역 시절 노력은 코치 시절에라도 꽃피울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제 2의 야구 인생을 응원해보자. 팬들은 처음부터 코치 자리를 받아들였으면 어땠겠냐며[15] 아쉬워하고도 있지만, 동시에 그간의 노력과 성실성 또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17년간 원 클럽 플레이어로서 수고했다면서 응원해주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

4. 연도별 주요 성적

||<-18><tablewidth=100%><bgcolor=#000> 역대 기록 ||

[1] 아쉽게도 이 시즌 이후 단 한 번도 올스타에 선정된 적이 없기 때문에 처음이자 마지막 올스타전이 되었다.[2] 거기다 중견수 경쟁 상대였던 전준우가 타격과 수비 양쪽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여 출전 기회가 더더욱 어려워졌다.[3] 롯갤에선 혼자서 노히트 노런 만들어 주냐며 까였다.[4] 양승호 감독이 공언한 30타수로는 한참 부족하다. 30타수 무안타는 2009년 이승엽이 한참 부진할 때 성적이 대충 그정도였다.[5] 참고로 일본의 무안타 기록은 타자가 57타수, 더구나 용병이었다고. 투수까지 포함하면 90타수였다.[6] 그리고 이 날은 장성우가 정말 오랜만에 적시타를 치기도 했다. 타격이 너무나도 안 되던 두 선수가 모두 안타를 친 날.[7] 스톡킹에서 선수 본인이 언급한 것에 따르면 잠을 자고 있다가 김경언 선수에게 연락을 받고(장성호 선수가 이우민 선수의 번호를 모르므로) 바꾸었다고 한다.[8] 실제로도 이토이 요시오와 얼굴이 닮았다. 투/타 스타일도 같은 우투좌타에 포지션마저 똑같이 외야수.[9] 같이 잉여삼신기로 불리던 박종윤, 문규현이 확실하게 터지고 나이 어린 신본기오승택도 발전된 모습을 보이는 상황. 그나마 이우민의 경쟁자인 김문호의 타격이 다소 부진해 겨우 1군에 붙어있다.[10] 공을 배트에 대지도 못하고 스트라이크를 먹었다[11] 보상 선수를 받지 않고 보상금만 받는다고 해도 연봉의 300%에 해당하는 1억 8천만 원을 지불해야 한다.[12] 반면에 앞서 언급한 용덕한의 경우는 NC 다이노스에 2군 코치직을 제안받고 은퇴했다. 용덕한이 은퇴한 후 NC는 김태군의 경찰청 입대로 포수 문제에 시달리면서 트레이드, 신인 선수 지명 등으로 지속적인 포수 영입을 시도했으며 심지어는 이미 은퇴해 실전 감각이 크게 떨어졌을 윤여운(2018년 윤수강으로 개명)까지 육성선수로 데려왔다. 외야수는 오랜시간 공들여 키워야 하는 포수에 비해 키우기 쉽다. 반면 포수는 한번 키우려면 2년가량 걸린다.당장 포수가 급한 엔씨 입장에서는 신인이 아닌 어느정도 만들어지고 가격이 싼 포수가 필요해 윤수강을 데려온 것이다.[13] 당초 다른부분으로 선수생활 연장도 있었는데 FA라는 무리수를 둔게 문제였다. 팀에서도 프렌차이즈 대우 차원에서 그동안 후배들을 이끌어준 공로와 튼실한 수비로 플레잉 코치를 제안할 가능성도 있었음에도, 본인이 FA를 선언해서 여론과 팀의 마음을 못잡고 결국 선수생활을 접게되었다.[14] 선수로서는 레전드 대우를 받아도 지도자로서는 고배를 마는 사람이 있는 반면, 선수 시절에는 내야 백업 신세를 면치 못했지만 지도자 및 프런트로는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도 있다. 자세한 것은 명선수는 명감독이 될 수 없다 문서 참조.[15] 구단에서 좋은 대우로 코치직을 제시했으나 본인이 시장에서 자기 가치를 알아보고 싶었다고 한다. 결국 고배를 마시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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